55화
분명 어젯밤에 파티를 했던 건 기억하는데 어떻게 방까지 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샴페인과 와인을 연달아 마셔서 취한 것 같다. 그래도 귀소 본능으로 호텔 방까지 돌아와 다행이라 생각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잠들어, 어제 입었던 정장 차림 그대로였다. 몸을 조이는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고 있는데 어제의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났다. 마지막 기억은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키스하는 내 모습이었다. 선명하지는 않지만, 혀의 감촉과 손에 닿았던 단단한 근육이 떠올랐다.
나는 손을 멈춘 채 누구와 키스했는지 떠올려 봤지만, 백지였다. 결국 머리를 주먹으로 치며 침대에 다시 누웠다. 숙취로 인해 두통이 일었다. 타지까지 와서 추태를 부리다니, 내 행동이 부끄러웠다.
적어도 누구와 키스했는지 떠올리기 위해 어제의 일을 처음부터 더듬으며 협탁 위에 올려진 생수를 마셨다. 어제 나와 긴 시간 함께 있었고, 내 호텔 방을 알고 있는 사람은… 셋이었다.
성요한, 레이너, 현태운.
세 명을 떠올리자마자, 나는 그대로 사레들려 한참을 콜록거렸다. 셋 중 한 명일 거 같지만, 누구여도 불편했다.
기침이 잦아들고 나서 누구와 키스를 한 것인지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나를 부드럽게 감싸는 에스퍼의 파장만 떠오를 뿐이었다.
***
어제 있었던 일을 잊으려 애쓰며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게이트가 닫히고 미국 협회와 에스퍼들에게 감사의 선물을 받다 보니 어느새 짐들이 많아져서 캐리어도 샀다.
선물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을 보니 원재였다.
그제야 원재에게 연락하지 못했던 것이 기억났다. 게이트가 닫히자마자 연락했어야 했는데…. 나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응, 원재야.”
- 형…. 연락 계속 기다렸는데….
“미안해. 정신이 없어서 못 했어.”
게이트가 닫히자마자 이틀은 휴식을 취하는 데 시간을 보냈고, 다음 날은 레이너의 저택에 초대받았다. 그다음 날은 미국 센터 구경과 뉴스 취재. 그리고 어제 파티까지 다녀오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 게이트 닫히면 바로 연락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서운해요.
집에서 나만 기다리고 있는 원재를 알았기에 미안함을 느끼며 토라진 그를 다독였다.
“미안해. 그래도 오늘 가니까, 조금만 기다려.”
- 네…. 형 없으니까 너무 외로워요. 집도 더 넓게 느껴지고요.
“나도 원재 너 없이 지내니까 허전하더라.”
- 형도 그래요?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원재 생각이 종종 났다. 그와 함께 미국을 여행해도 좋겠단 생각을 했었다.
“응.”
- 그렇다면 다행이다…. 오늘 몇 시에 출발하는 거예요?
“밤이야. 아마 한국에 도착하면 오전일 거 같고.”
- 알겠어요. 미국에 더 길게 있지 말고 꼭 와야 해요.
“응.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 네.
그렇게 원재와의 전화가 끝나고 나는 캐리어를 덮으며 원재의 선물을 준비해야겠단 생각을 했다. 이렇게 내가 오기만 기다리는 아이였기에 선물을 기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룸서비스를 먹으면서 핸드폰으로 선물을 살 만한 곳을 찾아보는 도중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현관으로 다가가자, 레이너가 앞에 있었다.
“신의, 잘 잤어요?”
“네. 레이, 무슨 일이에요?”
“신의한테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왔어요.”
“뭔데요?”
어제 파티에서도 만났으면서 아침부터 찾아온 그에게 의문이 들었다.
“저와 매칭 테스트를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레이너의 말은 그의 폭주를 잠재웠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었기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현재 레이너도 나도 전담이 없는 상태이고 말이다.
“매칭 테스트는 왜요?”
“신의가 한국 협회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어요.”
미국 협회 소속이면서 이런 사실까지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내 뒷조사를 한 거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쪽으로 올 생각은 없어요.”
“알아요. 하지만 미국 협회에서 신의가 원하는 조건을 모두 들어줄 겁니다. 그리고 사실 매칭 테스트는 제가 궁금해서 그래요. 계속 신의의 파장이 떠오르거든요.”
“레이 말은 알겠어요. 그런데 한국 협회 동의 없이는 매칭 테스트는 못 할 거 같아요.”
내 말에도 레이너는 나를 설득했다. 늘 거짓말만 늘어놓는 다른 에스퍼들과 달리 솔직하게 테스트하고 싶은 이유를 말하는 그의 모습에 부탁을 들어주고 싶어졌다.
“그럼 매칭률만 확인하고 보내 주실 거죠?”
“네. 당연하죠!”
내가 긍정적으로 대답하자 레이너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테스트받기 전에 여행 선물부터 사고 싶어요.”
“선물 사는 곳이라면 제가 잘 알고 있죠. 안내해 드릴게요.”
“그래 줄 수 있어요?”
“당연하죠.”
안 그래도 어떻게 선물을 사야 하나 난처했는데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레이너와 함께 외출했다. 오늘 밤에 떠나야 했기에 서둘러야 했다.
“미국에서만 살 수 있는 물건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야외 마켓에 가는 게 더 좋을 거 같네요.”
“야외 마켓이요?”
“네. 대신 나갈 때 변장이 필요해요.”
마켓 근처에 차를 세운 나와 레이너는 선글라스를 쓰고 목도리를 칭칭 감아 얼굴을 가린 채 밖으로 나왔다.
“지금 저희가 여기서 유명인이거든요.”
레이너가 손가락으로 무언갈 가리켰다. 그의 광고가 붙은 전광판과 게이트 상황이 보고되는 메인 전광판이 보였다. 게이트 상황 전광판에는 내가 방사 가이딩하는 모습과 에스퍼들의 활약이 반복적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한국과 달리 상위권 각성자들이 연예인처럼 활동하고 있었다.
이내 레이너는 내 어깨에 손을 두른 뒤, 함께 마켓을 둘러봤다.
원재에게 줄 것만이 아니라 진석과 지훤, 그리고 다른 사람들 몫의 선물까지 골랐다. 레이너가 추천해 준 기념품도 샀다.
이것저것 고르다 보니 벌써 양손에 짐이 한가득했다.
“레이, 고마워요. 덕분에 무사히 다 골랐어요.”
“아니에요. 그리고 이건 제 선물.”
레이너가 언제 샀는지 내게 꽃다발을 선물로 주었다. 이곳에 오고 느낀 것이지만, 미국 사람들은 다정한 것 같다. 이내 어젯밤의 키스가 떠올랐다. 혹시 레이너일지도 몰랐지만, 나를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도 한결같았다. 아무래도 살짝 떠봐야겠다고 생각했다.
***
그렇게 기념품을 한 아름 사고 미국 협회로 향했다.
미국 협회로 가는 길에 살짝 긴장했다. 현태운과의 매칭 테스트가 트라우마가 되어 테스트를 할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고 몸이 경직됐다.
나는 협회에 도착하자마자 미국 협회장을 만났다.
“미국 협회장 에드윈입니다.”
미국 협회장은 게이트에서의 내 행동들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넌지시 미국 협회로 언제든지 와도 된다며 스카우트 제의를 해 왔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며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오겠다고 말해 놓았다. 이렇게 보험을 들어 놓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협회장과 고위 임원들과의 대화를 마친 나는 레이너와 곧장 매칭 테스트실로 이동했다.
매칭 테스트실은 한국보다 기계도 최신식이고 연구진들도 많았다.
이번 게이트로 S급 가이드들이 역가이딩으로 많이 사망했다고 들었다. 그러니 미국 협회도 S급 가이드인 내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이 바라는 대로 해 줄 수는 없었다. 나는 미국보다는 아직 한국이 좋았다.
이대로 매칭 테스트만 하고 호텔로 돌아가, 한국으로 떠날 것이다.
나는 재차 레이너에게 확인했다.
“매칭률만 확인하고 호텔에 보내 주는 거 맞죠?”
“신의, 당연하죠.”
레이너의 말을 믿기에 나는 연구원에게 매칭 테스트에 대한 설명을 받고 테스트를 시작했다.
- 이신의 가이드님은 레이너 에스퍼님께 가이딩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레이너의 손을 잡고 평소처럼 가이딩했다. 서툴게 가이딩을 해 볼까도 했지만, 기계를 속일 수 없단 걸 알기에 늘 하던 대로 했다.
“역시 다른 가이드들과는 다른 거 같아요.”
“다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높게 나왔으면 좋겠어요.”
나는 매칭률이 높게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높게 나오면 레이너도 현태운과 성요한처럼 내게 집착하게 될 거 같았다. 그런 그의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 매칭률 48%입니다.
48%라는 연구원의 말에 레이너는 정말 기쁜 얼굴이었지만, 성요한과 현태운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는 수치였다.
- 수고하셨습니다. 상황실로 오시죠.
나와 레이너는 상황실로 가서 어느 부분의 수치가 높고 낮은지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런 점도 한국 협회와는 달랐다. 한국 협회는 이렇게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다.
“신의만 괜찮다면 미국 협회 쪽으로 와도 돼요.”
“한국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올게요.”
“네. 그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들면 언제든지 연락해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호텔로 돌아가도 될까요?”
내 말에 레이너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호텔까지 데려다주었다. 이제 한국에 돌아갈 준비를 해야 했기에 레이너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미국에 있는 동안 고마웠어요.”
“저야말로요. 다음에는 제가 한국에 놀러 갈게요.”
그의 말에 언제든지 오라고 말한 순간, 어젯밤 키스가 생각나서 그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어제 호텔 방까지 절 데려다주셨나요?”
“아니요. 무슨 일 있어요?”
역시 레이너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성요한 아니면 현태운이었다.
“그냥 물어봤어요. 그럼 또 만나요, 레이.”
내 말에 레이너는 볼 키스를 하고 돌아갔다.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키스 상대가 성요한 아니면 현태운이라니, 최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