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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급 가이드는 이만 퇴사합니다-17화 (17/65)
  • 17화

    윤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기밀 S급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S급까지는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가능성이 있다면 도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하루라도 빨리 능력치가 높아져 A급이 되었으면 했다.

    프로젝트 훈련은 승급 프로그램 때와 마찬가지로 저녁 7시 이후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2시간가량 수면 마취를 하고 무의식 상태로 자동 가이딩 훈련 기계를 통해 파장을 늘린다고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꿀 빠는 훈련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하는 것이라곤 자는 것밖에 없으니 말이다.

    오늘도 무사히 프로젝트 훈련을 마치고 탈의실로 이동하고 있을 때였다. 복도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장신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처음 보는 남자였는데, 외국인인지 금발 머리에 검은색에 가까운 금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미남이었다.

    해외에서 파병 온 사람인가 싶어 그를 흘끔거리며 지나치려는 찰나였다.

    “몸에 전류가 가득하네요. 이대로면 망가져요.”

    외국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익숙한 한국말이 들려와 걸음을 멈췄지만, 그는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내가 귀신을 봤나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빨랐다.

    B급 에스퍼는 아닌 것 같았다. 저렇게 빠르게 몸을 이동시킬 수 있다면 A급 이상인 에스퍼일 것이다.

    내 몸에 전류가 가득하다니. 가끔 몸이 저릿하고 경련이 일어날 때가 있었지만, 윤 박사님은 이상 없다고 하셨다.

    이상이 없다곤 하나, 조심해서 나쁠 건 없기에 몸 상태를 더 신경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가려고 하던 차였다. 게이트 경고등이 켜지더니 주변이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긴급 알림이 울리기 시작했다.

    <35구역에 A급 게이트 발생. A급 게이트 발생.>

    가이딩 워치에도 현장으로 출동하라는 알림이 도착해 있었다. 나는 시간을 확인했다. 밤 10시였다. 이렇게 밤에 게이트가 출현할 때가 인명 피해가 가장 컸기에 걱정부터 되었다.

    나는 서둘러 센터 정문으로 뛰어갔다. 이제 알림을 보자마자 다리가 먼저 셸터로 향했다.

    가이딩 셸터 안에 오르고 팀 전용실 안에 배치되어 있는 특수 전투복을 입었다.

    옷을 다 입고 나자 민성 선배가 왔다.

    “신의 씨, 일찍 왔네요?”

    “네. 센터에 있었어요.”

    “이번 게이트는 시간 꽤 걸릴 거 같아요.”

    이번 게이트는 돌발형이었다. 고정형 게이트는 출몰 마물들이 정해져 있지만 돌발형일 때는 이형 마물들이 나타날 확률이 높았기에 모두 긴장했다.

    나는 부디 태운이 다치지 않고 무사히 게이트가 닫히길 바라며 모니터를 봤다. 게이트가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밤이라 전자기파를 다루는 에스퍼의 능력으로 주변을 비추고 있었지만, 빛이 닿지 않는 곳도 있었다. 이어셋에서 위험에 대비하라는 박 팀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이트 문이 열리고 사슴처럼 이마에 두 개의 뿔이 달린 마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보스로 보이는 마물은 족히 10m 이상은 되어 보였는데, 사람처럼 이족 보행 했다.

    마물들의 등에는 박쥐처럼 날개도 있어, 허공을 날아다니다 입을 쫙 찢으며 단숨에 에스퍼들에게 달려들어 몸째로 삼키려고 했다.

    이형 마물이기도 했고 이번 게이트는 중심가 도로 위에서 발생했기에 사상자들이 많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 게이트는 C급 에스퍼까지 동원되었다.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스피커에 고스란히 담겨 들려왔다.

    나는 민성 선배와 셸터 중앙 대기실로 이동해 대형 모니터로 상황을 지켜봤다.

    게이트 주변에 마물들이 나가지 못하도록 배리어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빠져나가지 못한 시민들은 그대로 마물들의 표적이 되었다.

    B, C급 에스퍼들은 지상에서 시민들을 대피시키며 마물들을 죽였고, S, A급 에스퍼들은 보스 마물과 보스의 곁을 지키는 마물들을 처리했다.

    에스퍼들의 투입 수가 많은 만큼 평소보다 마물들이 빠르게 소멸해 갔다. 그 모습에 안도하며 태운을 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민성 선배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성요한 에스퍼 돌아왔네.”

    ‘성요한?’

    “급이 다르긴 해. 빠르게 치워 버리고.”

    민성 선배가 보는 화면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마물들이 토막 난 것처럼 몸이 분리되는 모습이 보였다. 어떤 마물은 얼굴만 허공에서 사라졌다. 어떤 능력으로 죽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능력을 발휘하는 에스퍼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고 말이다.

    능력으로 보아 S급 에스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소속 S급 에스퍼는 20명이었지만, 태운을 제외하고는 본 적이 없었다. 각자 맡은 지부가 있었고 파병을 자주 나가다 보니 보기 드물었다.

    나는 다시 태운의 모습이 비치는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기세 좋게 날아다니는 모습으로 보아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 것 같다. 태운은 불 속성 계열 에스퍼인 만큼 그의 주변은 늘 불로 휩싸여 있었다.

    태운이 손에서 쉴 새 없이 불을 생성하더니 마물을 향해 쏘아 댔다. 그의 불이 한번 닿은 마물들은 소멸할 때까지 불에 휩싸여 있었다.

    이내 보스 마물의 얼굴이 반으로 잘렸다. 그리고 몸체 또한 날카로운 칼로 베어진 것처럼 조각조각 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태운의 능력은 아니었고 조금 전에 본 에스퍼의 능력인 것 같았다.

    보스 마물에서 흘러나온 진득한 피가 도로에 후드득 떨어지며 게이트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마물들이 지상에서 활개 치고 있었다.

    그래도 등급이 높은 마물들은 대부분 처리해서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에스퍼들이 셸터로 이동하는 모습이 모니터로 보였다. 이번에는 태운이 오길 바랐다.

    셸터 문이 열리며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소란이 이는 쪽을 보자, 조금 전 센터에서 봤던 금발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곧장 내게로 걸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멀리 떨어져 주었다. 금발 남자는 어느새 내 앞까지 다가와 말했다.

    “가이딩해 주실 수 있으세요?”

    분명 조금 전에 만났을 때는 사복 차림이었는데 그는 어느새 검은색 특수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 태운과 같은 S급이었다.

    S급이면 전속 가이드나 페어 가이드가 있을 텐데 왜 나한테 가이딩해 달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전속 가이드님은 같이 안 오셨나요?”

    “조금 전에 막 귀국해서 전속 가이드가 없어요.”

    “저는 B급 가이드라서 A급 가이드분이랑 가이딩하시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괜찮아요. 나는 그쪽이랑 가이딩하고 싶어요.”

    내 말에도 금발 머리의 남자는 내 양손을 잡아 오며 가이딩을 시도했다. 보통은 가이드가 에스퍼의 파장을 찾는데, 금발 남자는 능숙하게 내 파장을 찾아 가이딩을 시도했다.

    파장이 맞닿자마자, 순간 숨이 멈췄다. 마치 어둠 속으로 끌려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몸부림치며 손을 풀려고 했지만, 그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다.

    “놔요!”

    “조금만 더요.”

    “놓으라고요!”

    금발 머리는 내 몸에 자기 몸을 밀착해 왔다. 태운을 제외한 다른 에스퍼와의 가이딩이 이토록 기분 나쁜 것인지 처음 알았다.

    나는 여전히 소리치며 발버둥 쳤고, 그런 나를 민성 선배가 도와줬지만 금발 남자의 몸은 떼어지지 않았다.

    그때였다. 태운의 목소리와 함께 손에 가해지던 압박이 사라졌다.

    “씨발, 뭐 하는 거야!”

    태운이 나를 껴안은 채 금발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태운의 손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가이딩하고 있지.”

    “내 전속이야.”

    “태운이 네 가이드였구나. 그런데 왜 이리 깨끗하지? 제대로 가이딩한 적 없나 봐?”

    “건들지 마.”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태운이 신경질적으로 내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와 입을 맞춘 건 처음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너무나도 놀라 숨을 멈췄다.

    입맞춤은 가이딩 속도가 빨라 모두 선호하는 방법이었지만, 이렇게 그와 공공연하게 키스할 것이라곤 예상치 못해서 더욱더 당황한 것 같다.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금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그렇게 해야 흔적이 남지. 너무 깨끗하면 다른 에스퍼들이 탐낼 거야. 우리는 순결한 파장을 좋아하니까.”

    태운이 입술을 떼더니 금발 남자를 노려봤다.

    “내 전속이니까 건들지 마.”

    태운은 그대로 나를 안은 채로 공간 이동을 했다. 우리는 순식간에 태운의 방에 도착했다. 그가 나를 데리고 공간 이동을 한 건 처음이었기에 또다시 놀랐다.

    “너 성요한이랑 어떻게 알아? 왜 그 새끼 가이딩을 해 주고 있냐고!”

    이동하자마자 태운이 나를 떨쳐 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몰라. 갑자기 나타나서 가이딩한 거고, 오늘 처음 봤어.”

    놀란 나머지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태운의 입맞춤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진정하기 위해 노력하며 태운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금발 머리의 남자가 성요한인 것 같았다. 성요한이라고 불린 남자의 가이딩을 했을 때 느꼈던 어두운 기류가 여전히 나를 감싸고 있었다.

    “넌 전속 가이드 뜻 몰라?”

    “…알아.”

    태운의 차가운 목소리에 계속해서 정신을 차리고자 노력했지만, 여전히 호흡은 불규칙했다.

    “이신의.”

    “…다른 가이드 찾으라고 말했어.”

    “그럼 지금 모습은 뭔데?”

    “싫다고 했는데….”

    분명 싫다고 했지만, 성요한은 나보다 덩치도 컸고 가이드인 내가 S급 에스퍼의 힘을 저항하기란 어려웠다.

    “나 말고 다른 에스퍼 새끼들이랑 가이딩할 생각 하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태운은 내 손목을 잡고 그대로 침대에 밀쳤다. 그는 평소보다 더 화가 났는지 거칠었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진정시킬 틈도 주지 않았다.

    태운은 손도 잡기 싫다며 방사 가이딩을 하라고 했다.

    나는 그가 말한 대로 방사 가이딩을 했지만, 좀처럼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런 내 상태를 태운도 느낀 것인지 혀를 차며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고 나를 타박했다.

    나는 최대한 생각을 비우며 가이딩했지만, 어느새 부푼 입술과 여전히 주변에 맴도는 검은 파장에 내 파장마저 불안정해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태운은 더는 못 참겠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를 붙잡고 싶었지만, 나 또한 머릿속이 복잡했기에 그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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