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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하냐는 질문을 갑자기 왜 하는 거지? 이해가 되질 않아서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정우진은 그런 내 표정을 보고 혼자 결론을 내린 건지, 멋쩍게 웃었다.
“그냥 적당히 참으면서 살게요.”
“뭘 참아?”
“저는 선배님이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좀 참아 보니까, 참는 것도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또 참으니까 좋은 일도 생기고.”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표정이 너무 행복해 보여서 그냥 나도 웃고 말았다.
“근데 이 커피는 왜 이렇게 양이 적냐.”
종이컵에 쥐똥만큼 있던 커피가 또 바닥을 보였다. 몇 모금 마신 것 같지도 않은데.
“한 잔 더 마실까?”
“또요? 밤늦게 커피를 왜 자꾸 마셔요? 그리고 선배님, 커피 좀 줄여야 돼요. 평소에 샷도 엄청 넣어 마시죠? 완전 사약처럼 마시던데, 적당히 좀 마셔요. 제발. 저랑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야죠. 선배님이 아프면 저는 어떻게 살아요?”
“…….”
갑자기 정우진이 오버를 하기 시작했다. 그냥 커피에 샷 좀 넣어 마시는 걸로 도대체 어디까지 상상하고 있는 건지. 하도 옆에서 잔소리를 해서 결국 커피는 마시지 않기로 했다.
“저는 벌써 두 잔이나 마셨더니, 오늘 잠도 못 잘 것 같아요.”
“그러게 왜 따라 마셔? 넌 마시지 말지.”
나야 커피를 마셔도 잠을 자는데 지장이 없었지만, 정우진은 또 그게 아닌가 보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정우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선배님이 마시니까 저도 마시는 거죠.”
“그러니까 왜 따라 하냐고.”
“좋아하니까요.”
“그게 그거랑 무슨 상관이야.”
참나, 어이가 없네.
나는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다가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조금 밑으로 내려와서 그런지, 이제는 별이 몇 개 보이지도 않았다. 선명하게 빛나지도 않고 안개가 낀 것처럼 뿌옇기만 해서 구경하는 재미도 없었다.
나는 식빵을 꺼내 뜯어 먹다가 말했다.
“잠 안 오면 그냥 이러고 밤새도록 얘기나 하지, 뭐.”
“밤새도록이요?”
“응, 왜? 싫어?”
내 물음에 정우진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흔들다가 어쩐지 수줍어 보이는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근데 밤새도록 얘기만 하면……. 좀 너무 지루하지 않을까요?”
“주제를 계속 바꿔서 얘기하면 되지 않나?”
“그래도 이야기만 하기에는 밤이 너무 길잖아요.”
그럼 뭐 어쩌자고……. 잠도 못 자겠다고 그러고, 얘기도 못 하겠다고 그러고…….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뭔가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뒤늦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어렴풋 알 것 같았다.
“그럼 뭐? 뽀뽀하자고?”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입술을 꽉 깨물고 웃음을 참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좋고요. 근데 뽀뽀만 하기에도 시간이 너무 길지 않을까요?”
“그럼 어쩌자고.”
“뽀뽀 말고 다른 건 어때요?”
“키스?”
“키스를 막 몇 시간 동안……. 물론, 그것도 좋기는 한데…….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턱도 아프고……. 입술도 다 막 퉁퉁 부을 거 같은데.”
정우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얼굴로 그걸 가만히 보다가 나는 고개를 휙 올려 하늘을 바라봤다.
“뽀뽀랑 키스 말고도 뭔가 할 만한 게 있지 않을까요?”
“…….”
나는 밤하늘의 별이 왜 그렇게 예전처럼 예쁘지 않았던 건지, 정말 뜬금없이, 아주 불현듯 이유를 깨달아 버렸다. 지금 당장 내 옆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이…….
“악, 씨발!”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소름이 끼쳐서 비명이 절로 터졌다. 진짜 낯간지러워 죽을 것 같았다. 무슨 소설을 쓰는 것도 아니고, 별이 밝게 빛나고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싫으세요?”
내가 한 생각에 닭살이 돋아서 팔뚝을 벅벅 문지르고 있는데, 정우진이 상처 받은 표정으로 울먹거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해서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뭐라고? 뭐, 다른 거 하자고?”
“선배님이 싫으시면 저는……. 저는……. 조금 참을 수도 있긴 해요. 근데 너무 오래 말고…….”
“해, 그래. 하자.”
“네?”
내가 다급히 말하자 정우진이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요?”
“왜 그렇게 놀라?”
“너무 쉽게…….”
많이 당황한 듯 정우진은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오히려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네, 저는 당연히 싫다고 할 줄 알았어요.”
“뭐? 왜? 아니, 우리가 무슨 미성년자도 아니고, 남도 아니고, 다 큰 성인 둘이 사귀는데 뭐 다른 것도 좀 할 수 있지.”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평생 손만 잡고 잘 것도 아닌데 정우진은 신대륙을 발견한 탐험가처럼 놀라고 있었다.
“진짜 말도 안 돼…….”
“……우리 혹시 사귀는 거 아니었냐?”
“맞죠! 사귀는 거!”
“근데 반응이 왜 그러냐고.”
얼마나 놀란 건지 들고 있던 식빵까지 툭 떨어뜨렸다. 다행히 비닐봉지 안에 있어서 흙이 묻거나 하진 않았다. 나는 가볍게 허리를 숙여 떨어진 식빵을 주워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아무튼 그건 그렇고, 우리 다음에 바다도 가자.”
“바다 좋아요. 저는 다 좋아요. 그냥 섬을 하나 살까요? 거기에 집도 지어서 둘이 살까요? 어떡해, 진짜 너무 좋겠다.”
밤하늘을 보며 바다라고 했던 게 떠올라 충동적으로 한 얘기인데, 정우진은 또 혼자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오랫동안 함께 있을 날이 많을 텐데, 뽀뽀나 키스 말고 다른 것 역시 할 수도 있고, 섬에 집을 지어서 살 수도 있고, 또 다른 날에 이곳에 찾아와 우리는 함께 추억을 되새길 수도 있다.
“외딴섬 하나 사서 거기에서 살면 너무 좋을 거 같아요. 사람도 없고, 우리 둘만 있으니까 세상에 우리밖에 없는 것 같잖아요. 그쵸?”
“근데 그럼 밥은 어떡해? 낚시해서 먹어야 돼?”
“당연히 배로 식자재 같은 건 들여와야죠. 근데 낚시해서 원시인처럼 살아도 재미있을 것 같긴 해요.”
“그래, 뭐……. 그렇게도 살아 보자.”
이제는 혼자가 아니라 둘이니까.
가슴이 몽글몽글해져서 정우진을 보며 웃으려는 순간, 뺨 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놀라서 어깨를 움츠리자 바닥이 빠르게 짙어지고 있었다.
“아니, 무슨……. 크리스마스이브에 눈도 아니고 비가 오고 난리야.”
“선배님, 이 안으로 들어오세요. 빨리요.”
정우진이 빠르게 겉옷을 벗어 위로 우산처럼 펼치며 말했다. 나는 그 안으로 들어가 정우진의 허리를 끌어안듯 당기며 뛰었다.
“야, 그냥 집에 가자. 밤새도록 얘기는 무슨, 어우 씨. 추워 죽겠네.”
“아, 위에 한 번 더 올라갔다 가고 싶었는데.”
나를 따라 차를 주차해 둔 곳으로 뛰며 정우진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다음에 또 오면 되지.”
“다음 언제요?”
“그냥 언제든.”
열심히 뛰었지만 그 잠깐 사이에 비가 폭포수처럼 떨어져서 우리는 이미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은 상태였다. 빗소리가 너무 커서 정우진이 내 말에 대답을 한 건지, 아닌지도 몰랐다.
그때 한참 뛰던 정우진이 별안간 다리를 멈췄다. 덩달아 빗속 한가운데서 멈춘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바라봤다. 왜 갑자기 섰냐고 묻고 싶었지만, 어쩐지 정우진이 울고 있는 것 같아서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물론 눈가에 고였다가 흐르는 저 물이 단순히 빗물일 수도 있겠지만, 왠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 그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떨어지는 비를 맨몸으로 맞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모습이 너무 추워 보여서 나는 팔을 뻗어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줬다.
“왜? 비 맞으니까 추워?”
“저 하고 싶은 말 있어요.”
“뭔데?”
도대체 무슨 말이 그렇게 하고 싶으면 비까지 다 맞으면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일단 비부터 먼저 피했으면 좋겠는데……. 정우진은 빗물인지 눈물인지, 물이 잔뜩 고인 눈으로 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
하지만 목소리는 다 나오지 않고 다시 입이 다물어졌다. 정우진이 푹 고개를 숙이자 동그란 뒤통수 위로 소낙비가 떨어졌다. 손을 내밀어 그 위를 가려 주자 그제야 정우진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좋아해요.”
“뭐?”
“진짜 엄청 좋아해요.”
“…….”
설마 이 얘기를 하려고 이 난리를 피운 걸까? 비까지 다 맞으면서? 뭐 엄청난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보다가 물었다.
“끝이야?”
“네?”
“할 말이 그게 다냐고.”
“아, 아니요. 엄청 좋아하고, 또 사랑하고 보고 있어도 보고 싶고, 늘 언제나 항상 옆에 있고 싶고, 만약 선배님이 저를 싫어하게 되는 날이 오면 저한테 꼭 말씀해 주시고, 또 제가 뭐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다면…….”
“…….”
나는 정우진이 구구절절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다가 손으로 젖은 얼굴을 쓸어내린 다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진아.”
“네?”
“……그 말을 꼭 지금 해야겠니?”
“…….”
이렇게 비가 미친 듯이 쏟아지고 있는데? 지금 이 정도면 거의 홍수 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물론 진짜로 홍수가 나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빗방울도 점점 굵어지고 있어서 체감상 우박으로 처맞고 있는 기분이었다.
“비가 오니까 갑자기 그 말이 하고 싶어졌어?”
어이가 나간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훌쩍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 나도 사랑하고…….”
“…….”
“뽀뽀나 한 번 하고 빨리 가자. 알겠지?”
나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그대로 정우진의 입술에 내 입술을 박았다. 더 이상 뭐라고 하지 못하게 빨리 끝낼 심산이라 주변에 누가 있는지 보지도 못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비가 오고 있으면, 아마 가까이 오지 않으면 잘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마치 게임 퀘스트를 해치우듯 입술을 냅다 박아 버린 뒤 떨어지려는데, 정우진이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솜털처럼 아주 가벼운 움직임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떨어질 수가 없었다.
우리는 마치 드라마 속의 한 장면처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키스했다.
“엣취!”
하지만 이건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이었다.
“이게 뭔 짓거리야, 진짜. 빨리 좀 가자, 우진아. 울든가 재채기를 하든가 하나만 좀 하고.”
나는 키스도 해야 하고, 재채기도 해야 하고, 훌쩍거리기도 하느라 바쁜 정우진의 손을 붙잡고 다시 뛰었다.
“잠시만요, 선배님. 다시 해요. 이제 재채기 안 할게요.”
“차에 가서 해.”
“차 안에서요?”
놀란 목소리로 묻는 말에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니, 집에 가서.”
“집이요?”
“음, 아니다. 그냥 내일 하자.”
“뭐예요, 진짜! 도대체 언제 하는 건데.”
정우진이 내 손에 붙잡혀 질질 끌려오며 투덜거리는 소리에 푸핫 하고 웃음이 터졌다.
차 안으로 가든, 집으로 가든, 비를 피할 처마 밑으로 가든, 결국 다시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다 맞든.
어쨌든 우리는 어딜 가든 둘이서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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