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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이미 꽃을 들고 집에 가야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마치 이삿짐을 옮기듯 통째로 들고 운반해야 할 정도였다. 정우진과 내가 양손 가득 꽃을 든다고 해도 반도 들지 못할 것이다.
넋이 나가 있는 나의 눈치를 보던 정우진이 멋쩍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많이 살 생각은 아니었는데, 보여 주고 싶어서 이것저것 고르다 보니까…….”
정우진의 말을 듣자 가출한 정신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아까는 너무 놀라서 미처 맡지 못했던 꽃 냄새가 진하게 났다. 밀폐된 곳에 오래 있었던 터라 트렁크가 열리자 한꺼번에 향이 사방으로 퍼진 것이다.
손을 뻗어 붉은 장미 한 송이를 꺼내자 정우진이 다시 말했다.
“그거 한 송이만 가지고 가세요. 나머지는 제가 집에 갖다 둘게요. 좀 한가해지면 와서 그때 자세히 구경하세요.”
그 말에 차마 아니라고, 그래도 선물인데 내가 들고 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너무 많은 양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옮기려면 지금 자고 있을 애들까지 다 깨워서 내려오라고 해야 했다.
나는 손에 든 장미를 코끝으로 가져가 숨을 마셨다. 난 평소에도 꽃 냄새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꽃 냄새라고는 하지만 막상 맡아 보면 그게 도대체 무슨 냄새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좋은 냄새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상한 냄새도 아니고……. 그냥 말 그대로 정말 이게 무슨 냄새인지 구분을 잘 못했는데, 지금은 마치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이 노곤해졌다.
꽃 선물도 도대체 이걸 왜 하는 건지 이해를 잘 못했는데, 막상 받아 보니 나쁘지 않았다. 꽃 선물이 문제였던 게 아니라, 누가 준 건지가 중요했던 건가?
잔뜩 미간을 구기며 심각한 표정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한동안 말이 없는 나를 정우진이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무슨 오해를 하고 있을지 안 봐도 알 것 같았다. 조금 전에 내가 마른세수를 했을 때처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너무 낯간지러워서 그때도 제대로 된 해명을 할 수가 없었는데, 왠지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꽃을 들고 있던 팔을 내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까 네가 말할 때 내가 계속 한숨 쉬고 그랬던 건…….”
갑작스러운 내 말에 정우진이 불안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눈치였다. 그럴 만도 했다. 나도 도대체 조금 전 나의 행동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갑자기 막……. 내가 고개 숙이고 그랬잖아.”
“아……. 제가 이상한 말을 해서요? 네, 근데 그게 왜요?”
다행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챈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나는 곧장 말했다.
“그거 네가 이상한 말해서 그랬던 게 아니라, 웃겨서 그랬던 거야.”
“네?”
“아니……. 아니, 웃긴 게 아니라……. 아니, 웃긴 것도 맞긴 한데, 아무튼 자꾸 네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면서 그러니까…….”
보통 이렇게까지 말하면 좀 알아들어야 되는 거 아니냐? 아직도 어리둥절한 표정이라 나는 결국 결정적인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귀여워서 그랬다고.”
“네?”
“그냥 딱 보면 모르냐? 그걸 무슨 귀찮아한다고 생각을 하는 건지, 진짜 황당하네. 네가 자꾸 쓸데없는 걱정을 하니까 그게 너무 웃기잖아. 그러니까 네 걱정이 쓸데없다는 뜻이 아니라, 말 그대로 진짜 할 필요가 없는 걱정인데……. 그게 그 말인가? 아무튼 하늘이 무너지면 어쩌죠? 땅이 꺼지면 어쩌죠? 이러면서 뺑뺑 우는 게 귀여워서 그랬다고. 귀찮은 게 아니라.”
“…….”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못 알아들으면 진짜 지능에 문제가 있는 거다. 조금의 오해도 하지 않기를 바라서 주절주절 길게 떠들고 나니, 목 위가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잠시 기다렸다.
왜냐면 정우진이 어떤 반응일지 안 봐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혼자 실실 웃으면서 날 놀릴 생각이 만만할 터였다. 그런 모습을 상상하니 괜히 말해 줬나 아주 조금 후회가 들긴 했지만, 그래도 내가 자기를 귀찮다고 오해하는 것보다는 백 배, 천 배 나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괜히 아무것도 없는 지하 주차장을 뺑 둘러보다가 힐끗 정우진을 바라봤다.
“…….”
“…….”
그렇게 귀여운 척을 하고, 밥 먹듯이 떼를 쓰고 애처럼 굴어서 당연히 자기가 귀여운 걸 본인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정우진은 마치 살면서 난생처음 이런 말을 들어 본 사람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불에 달궈진 쇳덩어리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
진짜 거짓말이 아니라, 얼굴은 당연했고, 귀, 손, 팔, 심지어는 입술까지 아주 그냥 시뻘겠다.
“뭐, 뭐야.”
눈까지 충혈되기 시작한 모습을 보고 당황해서 주춤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정우진이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자세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니까 저건 쑥스러워하는 연기를 해 보라고 하면 열에 아홉이 취할 자세였다.
“뭔데?”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왜, 왜 갑자기 그런 말을 하세요!”
“아니, 왜 그렇게 부끄러워하냐고! 괜히 나까지 기분 이상해지잖아!”
“그럼 그런 말을 들었는데 안 부끄럽겠어요?”
“뭐가 부끄러워. 네가 그렇게 행동을 했으면서!”
평소에 밥 먹듯이 귀여운 척하는 주제에 고작 귀여워서 그랬다는 말 한 번 들었다고 저렇게까지 벌게지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다.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하고 후딱 넘어가려고 했던 내 계획은 산산조각이 났다.
전혀 예상을 못 했는지 정우진은 순식간에 고장이 난 로봇이 됐다.
“아, 아무튼 귀찮아서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인상 쓴 것도 제가 귀여워서 그랬던 거예요?”
황당한 질문에 뭐라 하려고 크게 숨을 마셨다가 정우진의 얼굴을 보자마자 푸시식 식어 버렸다. 사람이 저렇게까지 빨개질 수가 있는 건가? 어떻게 손등까지 저렇게 빨개지지?
나는 저러다 종내는 정우진이 작은 정우진으로 분열해 사방팔방으로 터져 버리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막 한숨 쉬고,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노려보고 그랬던 것도 다?”
“…….”
왜 저렇게 구체적으로 말하는 거지? 역시 부끄러운 척을 하면서 날 놀리고 있는 건가? 그런 의심도 들었지만 곧 생각을 접고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우진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보다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 꼬라지를 보고 있자니 온몸에서 두드러기가 돋을 것 같았다.
“아무튼 그러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고!”
괜히 민망해져서 버럭 고함을 지르자 정우진이 더듬더듬 물었다.
“근데 제가 귀엽다는 말을 갑자기 왜 하신 거예요? 혹시 제가 오해할까 봐 걱정해서?”
“…….”
이번에는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나를 보고 있던 정우진이 과장된 몸짓으로 지나치게 놀랐다.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았지만, 표정을 보면 정말 진심이라 뭐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뒷목을 벅벅 긁다가 문득 손에 들고 있던 붉은 장미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시선 너머로는 트렁크 안에 가득 피어 있는 꽃들이 보였다. 나는 그걸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그냥 예뻐서…….”
“제가요?”
“꽃이……. 뭐?”
“네?”
정우진과 동시에 말한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까보다 더 새빨개진 정우진이 물었다.
“제가 예뻐서 갑자기 귀엽다고 하셨다고요?”
“뭔 소리야? 아니, 꽃…….”
꽃이 너무 예뻐서, 그냥 갑자기 말할 용기가 생긴 건데.
하지만 정우진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꽃이 예뻐서 그런 건지, 꽃을 선물해 준 정우진이 예뻐서 그런 건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보여 주고 싶다는 이유로 이렇게 많은 양의 꽃을 트렁크 한가득 채워 온 그 마음이 예쁘기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어쨌든 모든 가정의 종결점에는 정우진이 있었다. 그러니 이 세 가지는 결국 같은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짧은 생각을 정리한 뒤 간단하게 대답하자 정우진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것도 맞다고요? 예뻐서?”
“그래.”
“제가 귀엽고 예뻐서?”
“그렇대도.”
“…….”
분명 내가 아니라고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이제 더 이상 붉어질 수도 없을 것 같던 얼굴이 다시금 타오르고 있었다.
“혹시 취하셨어요?”
“…….”
정우진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헛소리를 해 댔다. 내가 팍 인상을 구기자 정우진이 한 발자국 내게 다가와 내가 자주 했던 짓을 했다. 그러니까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고 입 근처에서 술 냄새가 나는지, 나지 않는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가까이에서 들리는 숨소리가 불쾌했지만 일단 취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해야 하니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냄새를 맡기 위해서라지만 거리가 자꾸만 가까워지고 있었다. 몇 번 움찔거리며 참다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자 정우진이 내 팔뚝을 세게 붙잡았다.
“키스해도 돼요?”
나는 키스고 나발이고 잡힌 팔뚝이 너무 아파서 놀란 상태였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붙잡힌 순간 손가락 끝까지 피가 통하지 않는 느낌이 곧바로 들 정도였다. 너무 아파서 인상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안 되지. 여기 밖이잖아.”
좀 놓으라고 가볍게 팔을 흔들었지만, 팔뚝을 잡은 손의 힘은 더욱 세지기만 할 뿐이었다.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반대쪽 손으로 정우진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냈다.
“팔 좀, 억.”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우진이 팔뚝을 잡은 손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순간적인 힘에 그대로 다리가 꺾여 그 자리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버렸다. 그러자 내 맞은편에서 나와 똑같은 자세로 허리를 숙인 정우진이 내 등을 끌어안고 몸을 밀착했다.
“이러면 아무도 못 보지 않을까요?”
“아니, 블랙박스 같은 것도 있고!”
“그러니까 지금 차에 가려져서 안 보이잖아요.”
“누가 보면 갑자기 밑으로 쑥 꺼진 건데,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잖아.”
“뭐가 떨어져서 줍고 있나 보다, 하겠죠.”
작은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거리가 가까워졌다. 나중에는 정우진이 말할 때마다 입술과 입술이 스치는 지경이 됐다. 나는 주먹을 꽉 쥔 손으로 정우진의 정수리를 쿵쿵 때렸다.
“그럼 5초만 해.”
“50초요?”
“5초.”
“하는 김에 50초 말고 60초 하면 안 돼요? 60초가 1분이니까 뭔가 숫자도 더 안정적이고 딱 떨어지잖아요.”
“아니, 5초라고. 내 말 안 들리니?”
“그럼 지금부터 할게요. 60초.”
“아니…….”
이 새끼 귀가 먹었나?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보든 말든 정우진이 다짜고짜 입을 부딪쳐 왔다. 곧장 입 안으로 쳐들어오는 혀에 잠깐 웃음이 터졌지만 너무 다급한 동작이라 덩달아 다급해졌다.
붙어 있는데도 자꾸만 붙으려고 해서, 끝내 뒤로 밀려 엉덩방아를 찧자 정우진이 무릎을 꿇고 서서 양손으로 내 얼굴을 잡고 그대로 깊게 입을 맞춰 왔다.
키스를 하는 건 좋았는데, 회의감이 들었다.
차 뒤에 숨어서 이러는 게 맞는 거야? 무슨 도둑놈 새끼들도 아니고…….
그리고 숫자 세는 걸 깜빡해서 몇 초나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지금부터 1초 시작이었다.
***
도대체 그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얼마나 시간을 보낸 건지도 몰랐다. 한 10초 정도 지나면 숫자 세는 걸 자꾸 깜빡해서 또다시 처음부터 셀 수밖에 없었다. 60초는 진작 지난 것 같은데, 정우진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쨌든 입술을 비비고 혀도 비비고, 차 뒤에 숨어서 그 난리를 치다가 겨우 집에 올 수 있었다.
[꽃 시들기 전에 놀러 오세요.]
조용히 방에 들어가 그대로 바닥에 대자로 뻗어 넋이 나가 있는데, 정우진에게 문자가 왔다. 결국 그 많은 꽃은 다시 정우진이 가지고 가고, 나는 장미꽃 한 송이만 집에 들고 왔다.
꽃을 입가에 대고 냄새를 맡다가 반지 케이스도 다시 열어 봤다. 순식간에 반지가 두 개나 생겨 버렸다. 정우진이 준 반지를 가만히 보다가 자그마한 종이별을 집게손가락으로 하나 집어 자세히 살폈다.
“이런 걸 도대체 왜 접는 거야.”
자세히 보면 반듯하게 접지를 않아서 끄트머리가 살짝 어긋난 부분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자꾸 그쪽으로 눈이 갔다. 그게 너무 귀엽고 웃겨서 한참을 보고 있으니 아랫배가 근질근질했다.
빨리 자야 되는데 잠도 오질 않고 피곤함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침대에 누운 것도 아니고 바닥에 모로 누워 한참 종이별을 보고 있는데, 계속 만져서 그런 걸까? 풀어지지 않게 끼워 놨던 가장 끝의 종이 부분이 삐져나와 풀리려고 하는 게 보였다.
벌떡 일어나 앉아 다시 그 부분만 잘 끼워 넣으려고 했지만, 너무 작아서 만지는 것조차 쉽지가 않았다. 잔뜩 집중해서 종이별을 코앞에 두고 조심조심 손을 움직였지만, 기어이 풀려 버리고 말았다.
“아이씨…….”
별 못 접는데 어떡하지? 인터넷에서 찾아보고 새로 접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풀린 종이 끝에 뭔가가 적혀 있는 게 보였다. 의아한 표정으로 둘둘 말려 있는 별을 끝까지 풀어내자 기다란 종이에 작은 글씨가 쓰여 있었다.
‘선배님, 사랑해요. 생일 축하해요.’
“…….”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에 나는 놀라 숨을 쉬는 것도 잊어버렸다. 멀뚱멀뚱 글자를 보다가 혹시나 싶어 다른 별들도 풀어 봤다.
‘강서주♡정우진’
‘앞으로 있을 선배님의 모든 생일을 제가 축하해 줘도 될까요?’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사랑해. 진짜로. 엄청 많이.’
‘보고 싶다.’
‘빨리 아침이 왔으면 좋겠어요. 해 뜨면 만나러 갈 거예요.’
‘어릴 때 꿈 꿔서 오늘 하루 종일 너무 기분이 좋아요. 안 먹어도 배불러.’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을까? 정말 미스터리.’
‘우리 사귄다. 내 애인 강서주.’
하나도 빠짐없이 모든 종이별 안에는 정우진이 직접 쓴 문장들이 있었다. 혹시나 싶어 예전에 줬던 종이학도 찾아서 풀어 보자, 정사각형의 종이에는 조금 더 긴 문장이 적혀 있었다.
‘어제 잠들기 전에 선배님 생각을 했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그래서 도대체 왜 이렇게 좋은 건지, 제가 생각을 해 봤거든요? 처음에는 분명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유를 떠올려 보니까 너무 많은 거예요. 예쁘고, 귀엽고, 다정하고, 멋있고, 밥도 잘 먹고, 천재고, 반짝반짝 빛나고, 입술도 따뜻하고, 손도 크고, 머리카락도 부드럽고, 손가락도 길고, 뼈도 단단하고, 귀도 약하고, 속눈썹도 살랑거리고, 물도 꿀꺽꿀꺽 마시고……. 아무튼 너무 많아서 생각하다 보니까 해가 떴어요. 진짜 피곤해……. 나중에 낮잠이라도 잠깐 자야겠어요. 사랑해요.’
진짜 뜬금없고 황당한 내용들이었다. 다른 종이학에도, 그리고 또 다른 종이학에도 이런 엉뚱한 말들이 장황하게 쓰여 있었다.
“참나…….”
나는 정우진이 숨긴 비밀 일기를 훔쳐보느라 해가 뜨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