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와 B의 사이-180화 (185/190)

180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까? 예고도 없이 시작된 불편한 침묵에 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다짜고짜 말했다.

“나는……. 나는 꽃 좋아해. 근데 보통, 싫어하더라고. 보통 사람들이 그렇다는 거지, 나는 엄청 좋아해. 진짜로…….”

“…….”

“정말 나는 좋아해, 꽃……. 냄새도 좋고, 예쁘고…….”

더듬거리며 말하자 정우진이 창백해진 얼굴로 애써 웃었다.

“아니에요, 선배님. 저 꽃 안 샀어요.”

“…….”

“진짜 안 샀어요. 보세요, 아무 데도 없잖아요.”

양팔을 벌리며 필사적으로 거짓말하고 있는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일단 꽃 얘기는 나중에 하자 싶어 들고 있던 걸 건넸다. 그러자 정우진도 계속 민망했던 건지, 상자를 냅다 받으며 물었다.

“제 선물이에요?”

“어……. 너 생일 선물…….”

“열어 봐도 돼요?”

“되지. 근데 내가……. 그, 원래는 진짜 너한테 꼭 필요한 걸 사 주고 싶었는데, 다른 사람한테 선물한 적이 별로 없어서……. 뭘 사야 할지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변명하듯 떠들고 있는데, 정우진이 조심스럽게 작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달칵하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입을 다문 채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는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민망한 걸까? 어떻게든 민망함을 줄여 보고자 열심히 떠들어 댔지만 결국 헛수고였다. 그리고 뒤늦게 조금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너무 오버를 한 건 아닐까? 그냥 손수건 같은 거나 사 줄걸……. 아니면 연필이나 지우개나……. 학 종이나 살걸 그랬나? 정우진 학 접는 거 좋아하던데.

그런 생각을 하며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다가 정우진이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굳이 표정을 보지 않아도 또 눈물을 흘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신신당부했다.

“울지 마. 진짜, 제발 좀…….”

“선배님은 왜 그렇게 어려운 부탁만 하세요?”

“참아 봐. 사람이 좀 참을 줄도 알아야지. 너도 이제 어린애도 아닌데. 참아. 제발, 울지 마. 진짜 부탁 좀 할게.”

내가 빌다시피 말하자 정우진이 물이 가득 차 넘쳐흐르기 일보 직전인 눈에 잔뜩 힘을 줬다. 미간이 잔뜩 구겨지고 입술이 꾹 다물리는 걸 보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

내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결국 눈물은 넘쳐흘렀지만 정우진은 웃고 있었다.

“저는……. 저는 당연히 좋아요.”

그 말에 나는 웃다 말고 고개를 갸웃했다.

“반지가 좋다고?”

“결혼하는 거 좋다고요.”

“……?”

갑자기 결혼은 무슨 결혼?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정우진이 들고 있는 반지 케이스를 한 번 본 뒤, 물었다.

“결혼은 갑자기 무슨 결혼?”

“이거 프러포즈 아니에요?”

“뭐? 프러포즈? 아니……. 그냥 커플링인데?”

예상치도 못했던 단어였다. 그리고 애초에 남자끼리 결혼은 무슨 결혼? 장난을 치는 건가 했는데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당황하고 있는 것 같아서 덩달아 말문이 막혀 버렸다.

“결혼반지는 아니고 그냥 커플링.”

“비슷한 거 아니에요?”

“……비슷한 거 같기는 한데……. 아, 아무튼 프러포즈는 아니야.”

따지고 보면 같은 반지이기는 했으니까 그거나 이거나 얼추 비슷한 건 맞았다. 헷갈려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행복하다는 표정으로 웃으며 뭔가를 꺼냈다.

“저도 사실 반지 샀어요.”

“뭐? 진짜?”

“네, 저희 통했나 봐요. 진짜 천생연분 아닐까? 어떻게 생일 선물을 똑같은 걸 살 수가 있죠? 저는 살면서 이런 경우는 들어 본 적도 없어요.”

갑자기 또 오버하고 있는 정우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반지 케이스를 받았다. 달칵하고 뚜껑을 열자, 반지 두 개가 위아래로 나란히 꽂혀 있었다. 하지만 반지보다 더 먼저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이게 뭐야?”

반지의 주변에 종이로 만든 작은 별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너무 작아서 처음에는 장식 같은 건 줄 알았는데, 길고 가느다란 종이로 직접 접은 별 같았다. 하나를 집어 자세히 보니 종이 끄트머리가 살짝 어긋나 앞면과 뒷면이 같이 보이고 있었다.

“이거…….”

그게 왠지 귀여워서 이거 네가 접은 거냐고 물어보려다가 멈칫했다.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내가 준 반지 케이스를 양손에 들고 눈에서 반짝반짝하는 빔 같은 걸 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온몸에서 빛이 터지고 있는 듯한 환각이 보였다.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것 같아서 말을 걸기가 망설여졌다. 이쪽 좀 보라고 몇 번 헛기침을 해 봤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상태인 듯했다.

처음에는 그런 모습이 당황스러웠는데, 계속 보고 있으니 마치 전염되듯 나까지 들뜨는 기분이었다. 아까는 그렇게 울더니…….

눈에서 한참이나 빛을 토해 내고 있던 정우진이 뒤늦게 내 시선을 느낀 건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껏 뛰어놀다가 제자리에 선 어린애처럼 상기된 얼굴이었다.

“선배님…….”

“…….”

선물을 받으면 당연히 좋아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나도 과도한 반응에 점점 민망해지고 있었다. 엄청 대단한 선물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그런 생각이 드는 반면, 저렇게나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좀 뭐라도 사 줄걸 그랬나 싶기도 했다. 떠올려 보면 정우진은 내게 이것저것 큰 것부터 시작해서 아주 작은 것까지 틈만 나면 주곤 했는데, 나는 딱히 준 게 없었다.

“안 그래도 반지 사면서 어차피 끼고 다니지도 못할 텐데, 괜히 사는 건가 싶었거든. 근데 다행이다. 나는 이거 끼고, 너는 그거 끼면 디자인도 다르니까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지도 않을 거 아니야.”

“진짜 천재 같아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어요?”

숨을 들이켜면서 놀라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버 좀 하지 마. 아까부터 뭔데, 놀리는 것도 아니고.”

“진심인데요? 완전 천재 아니에요? 저도 반지 사면서 선배님이 왠지 보관만 하고 손가락에 끼고 다니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목걸이 줄이라도 사야 하나 고민했는데, 이런 방법이 있었다니…….”

“……아무튼 생일…….”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힐끗 시선을 돌리자 정우진이 뺨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채 기대에 찬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다가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열었다.

“생일 축하해. 태…….”

“…….”

“태어나 줘서, 고맙고…….”

아니, 씨발…….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도대체 정우진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한 거야? 온몸에서 벌레가 기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하.”

뒤죽박죽인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데, 작게 웃는 소리가 났다. 휙 소리가 나게 빠르게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입을 가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도저히 못 참겠는지 결국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빨개진 거예요?”

“야, 웃지 마!”

“하하하.”

“웃지 말라고!”

민망함에 견딜 수가 없어 배를 부여잡고 웃는 정우진의 어깨며 등을 주먹으로 퍽퍽퍽 때렸다. 맞고 있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정우진은 그 뒤로도 한참을 더 웃었다.

“저 반지 끼워 주세요.”

“네가 껴.”

“빨리요. 네?”

내 옷깃을 잡고 거세게 흔드는 통에 하는 수 없이 케이스에서 반지를 꺼냈다. 그러자 정우진이 수줍게 왼손을 내밀었다. 그걸 보니 한숨이 터져서 잠깐 망설이고 있는 사이, 정우진이 뭔가 생각난 듯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를 켰다.

“저 이거 동영상 찍을래요.”

“뭐? 반지 끼워 주는 걸 동영상으로 찍는다고? 이걸? 왜?”

“어떡해, 너무 떨려…….”

내 말에 대답도 안 하고 정우진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부들부들 손을 떨었다. 그리고 그때 띠롱, 하고 동영상 촬영이 시작되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경험상 어차피 하겠다고 한 정우진을 말릴 방법은 없었다. 차라리 빨리 정우진이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영상을 찍고 있어서 그런 걸까? 갑자기 나까지 긴장되기 시작했다. 속으로 숨을 한 번 삼킨 다음에 반지를 끼워 주려고 내민 손을 살짝 받치듯 잡자, 떨림은 더욱 심해졌다.

내가 떨고 있는 건지, 정우진이 떨고 있는 건지 분간도 되질 않았다.

조심스럽게 약지에 반지를 끼웠다. 마디를 지나가려던 순간,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울 것 같은 얼굴로 염병을 떨고 있는 게 보였다.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이 촌극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 재빨리 반지를 끝까지 끼웠다.

“됐지?”

“제가 선배님 손가락에도 끼워 드릴게요. 이걸로 찍으세요.”

“뭐? 나도 찍으라고? 아니, 나는…….”

“빨리요. 이거 누르면 돼요. 알았죠? 준비됐어요?”

“…….”

한껏 들뜬 정우진의 지시대로 결국 내 손가락에 반지가 끼워지는 모습도 동영상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내가 준 반지를 끼는 영상, 정우진이 준 반지를 끼는 영상, 그리고 중지와 약지에 하나씩 반지를 끼는 영상 등등을 모두 촬영했다.

하다 보니까 재미있어서 나는 정우진이 끼고 있는 반지까지 가지고 와 내 왼손의 검지, 중지, 약지, 소지에 다 끼고 손을 들어 얼굴 옆에 댔다.

“야, 이것도 찍어.”

“그게 뭐예요.”

정우진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웃으면서도 사진을 몇 장이나 찍었다. 핑거 스냅도 해 보려다가 그건 너무 유치한 것 같아서 그냥 관뒀다.

“저도 할래요.”

내가 네 손가락에 반지 낀 게 멋있어 보였던 건지, 정우진이 자기도 하겠다고 나섰다. 똑같이 찍으면 재미가 없으니 나는 정우진의 중지에 반지 네 개를 동시에 끼웠다. 별생각 없이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만 올리려던 정우진이 멈칫하는 게 보였다.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는 게 웃겨서 입에서 자꾸만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왔다.

“왜 하필 여기에다가 끼워요?”

“너 그런 사진 찍어 본 적 없지?”

“손가락 올리고요? 이런 걸 누가 찍어요? 진짜 유치해.”

마치 선을 그으려는 듯 정우진이 슬쩍 상체를 뒤로 뺐다. 질색팔색하는 표정이 볼만해서 그 모습도 사진으로 남겼다. 아무튼 그렇게 몇 번이나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다 보니 슬슬 올라가 봐야 할 시간이 되었다. 조금 더 놀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는 게 아쉬웠다.

“내일 연락드릴게요.”

“틈틈이 나도 연락할 테니까 문자나 전화 안 된다고 꿍해 있지 말고, 그 반지 끼워 주는 동영상이나 보면서 놀아. 알았지?”

“……말투가 너무 이상한 거 아니에요?”

뭔가 느낌이 별달랐는지 정우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제 정말 가 봐야 해서 나가려고 차 문을 열려다가 멈칫했다.

“맞다, 그것도 줘.”

“어떤 거요?”

“꽃.”

“…….”

하마터면 잊을 뻔했다. 내 말에 정우진도 잠시 잊고 있었던 건지 주춤하는 게 보였다.

“저 꽃 안 샀어요.”

“빨리 달라고.”

“…….”

“아, 빨리. 나 졸려.”

내가 재촉하자 계속 시치미를 떼던 정우진이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더니 갑자기 차 문을 열고 내렸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보다가 나도 덩달아 밖으로 나갔다. 정우진은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보며 차 뒤쪽으로 발을 질질 끌면서 갔고, 나는 그런 정우진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정우진이 트렁크의 손잡이를 잡는 순간,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잠시 기다려 보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활짝 트렁크가 열렸고, 그 안에는 형형색색의 수많은 꽃들이 마치 꽃밭처럼 피어 있었다.

“…….”

몇 송이인지 세기도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에 압도되어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