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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하고 웃기기도 하고, 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손끝이 간질거리기도 하고, 가슴이 울렁거리기도 하고……. 너무 복잡한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물처럼 밀려와 피할 수도 없이 물속에 잠겨 버린 느낌이었다.
“많이 피곤하세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꼬리를 늘어뜨리고 웅얼거리던 정우진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계속 얼굴을 가린 채 벅벅 세수하듯 문지르는 게 피곤해서 그런 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크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흔들며 슬쩍 손을 내렸다. 그리고 틈 사이로 힐끗 정우진을 보자 눈이 마주쳤다. 울상을 짓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과는 좀 다른 표정이었다. 낙담을 한 것 같다고나 해야 할까? 뭔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한 걸 후회하고 있는 듯도 보였다.
“안 그래도 선배님 피곤하실 것 같아서 선물만 얼른 주고 가려고 했는데…….”
정우진이 뭔가 꺼내려는 듯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지만 억지로 괜찮은 척하려는 듯 애써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정우진은 가끔 지나치게 극존칭을 쓸 때가 있는데, 대체로 내 눈치를 보고 있을 때 그러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정우진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려고 하는 걸 가만히 보다가 손을 뻗었다. 내 손이 팔에 닿자 부산스럽게 움직이던 동작이 멈췄다.
“안 피곤해. 피곤해서 그런 게 아니라…….”
뭐 때문에 그런 거라고 해야 할까? 너무 복합적인 감정이라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결국 이렇다 할 이름을 붙이지 못한 채 말을 얼버무렸다.
“아무튼 아니니까 말해 봐.”
“아니에요, 좀 말했더니 이제 진짜 괜찮아졌어요.”
하지만 정우진은 이제 다시는 내게 자신의 속마음을 말하지 않을 사람처럼 단호하게 거짓말을 했다.
“아, 빨리 말해.”
내가 언성을 높이자 정우진의 표정이 금세 찡그러졌다.
“말 다 했어요.”
“빨리 말하라고. 아까 다른 말도 하려고 했잖아!”
“다 했어요. 이제 없어요, 할 말.”
“빨리! 계속 혼자 있고, 연락도 잘 안 돼서, 뭐!”
온몸이 간질간질해서 조금만 긴장을 늦춰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나는 웃지 않기 위해 일부러 언성을 높이며 짜증 내듯 말했다. 말하면 할수록 점점 더 안 좋아지는 정우진의 표정에도 멈춰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그,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울상을 볼수록 가슴이 더 크게 울렁거렸다.
“화나셨어요?”
결국 서러움이 극에 달했는지 정우진이 벌게진 눈으로 물었다. 그걸 보며 나는 한 번 숨을 고른 뒤 차분히 말했다.
“화 안 냈어. 네가 자꾸 말을 안 하니까 그랬지.”
“화냈잖아요, 막 소리 지르고. 그리고 저 할 말 다 했다니까 자꾸 뭘 말하라고 그러세요? 저 할 말 다 했어요.”
“이거 봐. 그런 표정으로 말을 안 하니까 내가 소리를 지른 거지! 빨리 말하라고! 할 말이 없기는 뭐가 없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무슨 이유로, 누구에게 질투를 한 건지 보고서를 받듯 하나부터 열까지 상세히 들어야겠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거기에 눈이 멀어서 다른 걸 살필 겨를이 없었던 나는 결국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버린 정우진을 보며 뒤늦게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야, 너 울…….”
“왜 자꾸 화를 내세요!”
“아니, 화낸 거 아니라니까? 화…….”
“아까부터 소리 질렀잖아요!”
빽 고함치던 정우진의 눈가에서 눈물이 한 방울 흐르는 걸 보니 등 뒤로 식은땀이 났다. 나는 얼른 손을 뻗어 정우진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다급히 말했다.
“화낸 게 아니라 그냥 물어본 거라고!”
“말하기 싫은데!”
“알았어, 울지 마.”
“자꾸 말하라고 그러고!”
“미안해. 말하지 마, 그럼.”
“말 다 했는데!”
“알았어, 알았어…….”
내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정우진이 옷깃을 꽉 잡고 버럭버럭 소리쳤다. 나는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등을 계속 토닥거리며 정우진을 달랬다.
“화나서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자꾸 말을 하다가 마니까 궁금해서 그런 거지.”
“말할 때마다 자꾸 한숨 쉬었잖아요.”
이제 괜찮다고 노래를 부르더니 내 목소리가 좀 누그러져서 그런 걸까? 정우진이 이실직고했다.
“그게 네 말을 듣기 싫어서 그랬겠냐?”
“그럼 왜 한숨을 쉬어요? 듣기 싫어서 그런 거죠? 귀찮다고 생각했죠? 안 그래도 피곤한데 성가시다고 생각하니까 한숨이 나온 거겠지…….”
혼자 소설을 쓰고 있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어떤 부분에서는 자존감이 좀 낮나? 싶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애가 이렇게까지 주눅이 든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야, 내가 언제 너 귀찮고 성가시다고 한 적 있어? 한 번도 그런 적 없는데, 그런 생각을 왜 하는 거야?”
내가 황당하다는 듯 묻자 정우진이 훌쩍거리면서 내 가슴에 이마와 눈가를 비볐다.
“전화해도 안 받고……. 문자 답장도 안 보내 주고…….”
“녹화 중에는 당연히 전화도 못 받고 문자도 못 보내지. 끝나고 나서는 꼬박꼬박 연락했잖아.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하고, 자기 전에도 하고.”
“잠깐 쉬는 시간에도 할 수 있잖아요…….”
“했잖아.”
“맨날은 안 해 주셨잖아요…….”
“…….”
흐느껴 울면서도 할 말은 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사실이었기 때문에 뭐라고 반박할 수가 없었다. 물론 쉬는 시간에 정우진에게 연락을 한 적도 있었지만, 피곤해서 핸드폰은 확인도 하지 않고 잠들거나 그럴 때가 몇 번은 있었다. 아니면 스태프들과 이야기하거나, 다른 가수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기도 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뭐라고 더 말을 할까 하다가 그냥 죄인처럼 고개만 숙였다.
“미안해.”
“미안하다고 하지 마세요. 선배님이 미안하다고 하면 왠지 무서워요.”
“무섭다고? 왜? 아무튼 그럼 미안해하지는 않을게.”
“그렇다고 그렇게 딱 잘라 말하시지는 말고요……. 그냥 아주 조금만 미안해해 주세요.”
얘는 왜 이렇게 까다로운 걸까? 그래도 주절주절 말대꾸하는 걸 보니 아까보다는 기분이 괜찮아진 듯해서 다행이었다. 나는 정우진의 머리통을 끌어안고 아기를 재우듯 몸을 양옆으로 조금씩 흔들며 말했다.
“너도 알잖아. 핸드폰 계속 보고 있기 힘든 거.”
“네, 그래서 저도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래도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돼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진작 좀 말하지 그랬어. 그럼 나도 더 신경 썼을 텐데.”
이렇게 야윌 때까지 참고 참다가 터뜨리다니. 아니, 이건 터뜨린 것도 아니었다. 내가 윽박질러서 억지로 듣게 된 거랄까.
나는 계속 몸을 가볍게 둥개둥개 흔들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내가 평소에 정우진한테 화를 많이 냈나? 왜 내가 화낼까 봐 말을 못 하는 거지? 별로 무섭게 한 적도 없는데. 말투가 문제인가?
“내가 평소에 말할 때도 화내면서 말하는 것처럼 들려?”
내 질문에 정우진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럼 목소리가 짜증 난 사람 같아?”
“아니에요.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안 그래도 바쁜데 자꾸 옆에서 징징거리면 짜증 나잖아요.”
정우진의 말에 나는 다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넌 징징거린 적이 없는데?”
“지금 그랬잖아요.”
“이게 무슨 징징이야? 그냥 그랬다고 말하는 거지.”
내 말에 정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얼굴을 자꾸 비비더니 마찰 때문인지 아까보다 눈가가 더욱 붉어져 있었다. 미처 닦이지 못한 눈물이 관자놀이까지 번져 있어 반사적으로 닦아 주자 정우진이 한쪽 눈을 찡그리며 물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뭐가? 너 징징거린 거 아니라는 거? 어.”
“그럼 계속 말해도 돼요?”
조금이나마 용기를 얻은 건지 조심스럽게 묻는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말하라고 했잖아.”
“그건 짜증 나서 일부러 그러는 건 줄 알았어요.”
“짜증 난 거 아니야. 네가 할 말이 있는 거 같은데 자꾸 아니라고 하니까 답답해서 그런 거지. 아무튼 빨리 말해 봐.”
뭐 때문에 또 이런 건지 궁금해서 가만히 정우진의 말을 기다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멤버한테 질투나 하고, 문자나 전화를 더 많이 하지 못해서 속상해하는 이런 것들이 그냥 너무 어린애 같아서 웃겼다. 또 저 입에서 어떤 기상천외한 말들이 나올지 이제는 기대감까지 들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느끼며 가만히 기다리자 잠시 우물쭈물하던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저 사실 계속 기분이 별로 안 좋았어요.”
“왜? 왜 기분이 안 좋았는데?”
다급한 질문에 정우진이 말을 이었다.
“컴백 준비 오랫동안 하고, 신경도 많이 쓰셨잖아요. 다행히 잘 돼서 저도 너무 기분이 좋은데……. 진짜 좋거든요? 이건 진심이에요.”
“그렇게 강조 안 해도 알아. 그래서?”
“……근데 엄청 바빠지셨잖아요. 그건 싫어요.”
그렇게 말한 정우진이 내 눈치를 한 번 봤다. 미세한 내 표정의 변화가 또 정우진의 입을 막을까 봐 염려돼서 나는 온 힘을 다해 무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또 방송 나와서 선배님이 막 웃는 것도 싫어요.”
“그럴 수…….”
입력이 된 로봇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도 있다고 다시 대답하려다가 멈칫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웃는 게 싫다고 하는 건 약간 이해가 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정우진이 다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랑 말하는 것도 싫고……. 왜냐면 선배님 말할 때 눈 마주치는 버릇 있잖아요. 눈 자꾸 쳐다보고, 엄청 잘 웃고, 다른 사람 말도 잘 들어 주고…….”
“……?”
눈 보면서 말을 하는 게 버릇인가? 그냥 다 그러지 않나? 그리고 잘 웃는다는 건 그렇다 쳐도, 도대체 다른 사람 말을 잘 들어 준다는 게 무슨 뜻이지?
정우진이 말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저는 매일 같이 있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그럴 수가 없으니까 너무 속상해요. 저도 모르는 거 아니에요. 그럴 수 없다는 거 당연히 알고 있는데, 왜 저는 불가능한 일 때문에 이렇게 힘들까요? 너무 바보 같아서 힘들고, 선배님 진짜 응원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그것도 잘 안 돼서 힘들고…….”
“…….”
“생일에도 못 만나니까 진짜 너무 힘든 거예요. 앞으로도 이렇게 바쁘면 어떡하죠? 계속 바빠서 내년 생일도 못 챙기면? 생일은 그렇다 쳐도, 이제 곧 크리스마스인데 그날도 바빠서 못 봐요? 우리 진짜 어떡해요? 이렇게 바쁘면 얼굴은 언제 보고, 데이트는 언제 하고, 뽀뽀는 언제 하고……. 매일 차 안에서만 밤늦게 잠깐 보고……. 진짜 미치겠어요. 전화도 하고 싶을 때 못 하고……. 예전에는 선배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것만 봐도 어느 정도 괜찮아졌는데, 이제 그걸로는 너무 부족해요.”
내가 어떻게 끼어들 틈도 없이 다급히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말문이 막힌 채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자 정우진의 눈에 다시 눈물이 가득 고였다.
“이러고 어떻게 살아요?”
“…….”
“선배님이 혹시라도 귀찮다고 생각할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러더니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폭포수처럼 콸콸콸 쏟아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