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와 B의 사이-172화 (17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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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해서 간단하게 라면을 끓여 먹고, 정우진이 꺼내 온 살짝 얼린 청포도까지 거의 다 먹어 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숙소로 돌아가야 하는데, 정우진은 아직까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은 상황이었다.

“넌 포도 얼려 먹는 걸 더 좋아해?”

“둘 다 좋아해요.”

포도를 얼려서 먹어 본 적은 없었는데 이것도 꽤 맛있었다. 포도 맛이 나는 슬러시 같다고나 할까? 먹을 때 사각사각하는 식감도 너무 좋고.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제는 더 이상 할 말도 없어서 결국 내가 먼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근데 너 안 물어보냐?”

“뭘요?”

“김도웅이 아까 나한테 했던 얘기 있잖아. 그거 안 궁금해? 무슨 일인지?”

“괜찮으세요?”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가?”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아서……. 나중에 천천히 들어도 되니까 급하게 말 안 해 줘도 돼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렇게까지 막 엄청 슬픈 얘기는 아니야. 오래되기도 했고, 나도 이제 별로 아무렇지도 않고. 사실 멤버들도 좀 이해를 못 하긴 했었거든. 친형도 아니고 사촌 형한테 그렇게 매달 꼬박꼬박 돈 주고 그러는 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니까.”

이걸 어떻게 잘 압축을 시켜서 말해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막상 이야기를 시작하니 술술 나왔다. 나는 정우진에게 마치 옛날이야기를 해 주는 할아버지처럼 그때의 일을 말해 주었다.

사건을 설명해 주는 위주로 최대한 간결하고 빠르게 말을 해서 그런지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사실 이런 건 별로 얘기를 안 해 주고 싶었는데……. 강수민한테 이런 일이 없었어도 곧 정리를 할 예정이었고.”

“왜 얘기하기 싫었어요?”

내가 말하는 동안 잠자코 듣기만 하던 정우진이 물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나는 대충 말을 얼버무렸다.

“별로 좋은 것도 아니고.”

“선배님은 저한테 좋은 이야기만 해 주고 싶으세요?”

이왕 말을 할 거라면 좋은 말만 해 주고 싶은 게 당연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긴 했지만.

“사실 저 대충 알고 있었어요.”

그때 정우진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강수민에 대해 조사하다 보니까……. 물론 이렇게 자세히는 몰랐고요. 선배님도 별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저도 계속 모른 척했던 거예요.”

“…….”

그러고 보니, 정우진이 강수민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 있던 다른 사람들까지도 다 조사했다고 했던 게 떠올랐다. 딱히 비밀도 아니었고, 중학교 다닐 때도 알음알음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아마 그 사건을 알아내는데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도 화가 많이 나서 강수민을 선배님 몰래 외국으로 보내려고 했던 건 맞지만, 만약 선배님이 저한테 그러지 말라고 했으면 안 그랬을 거예요. 나 대신에 네가 강수민을 평생 부양하라고 했으면 흔쾌히 알겠다고 했을 거고요. 죽을 때까지 사는데 어렵지 않게 돈도 주고 집도 주고 직장도 구해 주고, 최선을 다했을 거예요.”

나도 되도록이면 정우진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려고 했지만, 도저히 태클을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뭔 소리야? 네가 왜? 그리고 내가 미쳤냐? 너한테 그런 말을 하게?”

인상을 팍 찌푸리며 말하자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계속 말했잖아요. 이러려고 돈 번 거라고. 그렇게 해서 선배님 마음이 더 편해지면 그러는 게 맞아요.”

정우진이 하는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뭔 소리를 하고 싶은 거지? 미간을 구긴 채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을 이었다.

“반대로 저 새끼 꼴 보기 싫다고 했으면 평생 선배님 눈앞에 나타나지 않게 했을 거고요.”

“…….”

“그러니까 저한테는 좋고 나쁨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건 그냥 우리가 같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해결해야 하는 문제 같은 거예요. 처리 방법이 어떻든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고요.”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기에 고개를 갸웃하자, 정우진이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님처럼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만약 예를 들어서, 우리가 결혼했다고 생각해 보세요.”

“남자끼리 결혼을 어떻게 해?”

“그냥 예시를 든 거잖아요.”

갑자기 결혼은 무슨 결혼인지.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일단 말해 봐. 결혼했는데, 뭐?”

“우리가 결혼해서 같이 살고 있는데 현관 타일이 깨졌어요. 집에서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그게 계속 보이니까 거슬리잖아요. 별로 예쁘지도 않고. 그럼 어떻게 해요?

그 말에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새로 바꾸나?”

“그런 거예요. 선배님은 그냥 그걸 새로 바꿀지, 고칠지 선택만 하면 돼요. 우리가 같이 살면서 불편하지 않게. 좋고 나쁜 건 굳이 안 따지셔도 돼요.”

“…….”

“아시겠죠?”

정우진의 말에 나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두어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히 아직도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다 이해를 한 건 아니었지만, 그냥 넘어가고 싶었다.

“그러니까 깨진 타일 보면서 혼자 불편해하지 말고, 걸려 넘어질까 봐 불안해하지도 말고 저한테 말해 주세요. 그래야 제가 타일을 고치든 바꾸든 해 줄 거 아니에요. 아니면 이사를 가든가.”

“음…….”

이렇게 들으니까 어느 정도 이해되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되게…….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낯선 느낌도 들었다.

고마운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조금 이해가 안 가는 부분도 있고.

“남들이 깨진 타일 때문에 이사까지 가냐고 뭐라고 할까 봐 걱정도 하지 마세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무슨 상관이에요? 하지만 그것도 자꾸 신경 쓰인다면 몰래 이사 가는 방법도 있으니까, 아무튼 선배님은 저한테 말만 해 주면 돼요.”

“…….”

“남들이 뭐라고 하든, 법이 어떻든 그런 건 저한테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요. 선배님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가 저한테는 제일 중요해요. 그 과정에서 돈이 얼마나 드는지도 신경 쓰지 마세요. 저 돈 많아요.”

돈 자랑을 또 하는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콱 막혔다. 돈이 많은 건 알겠지만 그걸 너무 쓸데없는 곳에 쓰니까 문제인 건데, 이걸 이해를 못 하나? 하지만 나는 이제야 정우진이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나는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것부터 물어보기로 했다.

“넌 도대체…….”

하지만 막상 물어보려니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이걸 뭐라고 물어봐야 하지? 나는 한참을 고민하며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더듬더듬 말했다.

“왜 이렇게까지……, 날 좋아하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밖에 물어볼 수가 없었다. 보통 서로 좋아해서 사귀는 사람은 많지만, 좋아하는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나? 물론 고맙기는 하지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냥 어릴 때 좀 같이 시간을 보냈다고 이렇게까지 누굴 좋아할 수가 있나?

나름대로 진지하게 물었는데, 고개를 옆으로 젖힌 정우진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거 아닐까요?”

“뭐?”

“전생에 천년가약을 맺은 부부였는데, 같은 날에 죽어서 후생에도 꼭 부부가 되자고 약속을 한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어릴 때 서로 보자마자 첫눈에 반해서…….”

“뭔 개소리야.”

내 말에 정우진이 장난스럽게 웃더니 도리어 내게 물었다.

“그럼 선배님은 저를 왜 그렇게 좋아하세요?”

나도 물론 정우진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만나고 있지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저렇게……. 그러니까, 굳이 크기를 가늠하자면 저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아니……. 아니, 나는 그 정도까지는…….”

하지만 이걸 말로 하자니까 좀 미안하기도 하고, 정우진이 삐칠 것 같기도 해서 대충 우물우물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또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우는 건 아닐까 싶었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정우진은 별 표정이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애인이 내 뒷조사했다고 하면 화내는 게 정상 아니에요?”

마치 추궁을 하는 듯한 목소리라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고 주춤거리자 정우진이 말을 이었다.

“일하다가 보고 싶어서 손가락 부러뜨리고 찾아오면 되게 소름 끼치지 않아요?”

“…….”

“집에 못 가게 하려고 핸드폰도 숨기고 신발도 숨기고, 만나려고 회사까지 쫓아와서 계속 지켜보다가 결국 그 회사까지 샀는데, 왜 저랑 계속 만나 주시는 거예요?”

“…….”

아니, 미친……. 이렇게 모아서 듣고 보니까 진짜……. 저 새끼 저거, 제정신이 아니긴 하네…….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경악하고 있는 나를 보던 정우진의 눈매가 휘어졌다.

“사실은 엄청 좋아해서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거 아니에요?”

“……진짜 황당하네.”

“선배님은 저를 왜 그렇게 좋아하세요?”

“내가 진짜 제정신이 아닌 거 같아.”

이 와중에도 정우진에게 화가 난다거나 소름 끼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걸 보면, 확실했다.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정우진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럼 저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이 될게요.”

그 말에 덩달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넌 내가 봤을 때 이미 약간 그런 과야.”

“제정신 아닌 사람이 좋아요?”

“좋겠냐?”

“그럼 어떤 사람이 좋아요? 저는 선배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뭐든 다 될 수 있어요. 착한 사람, 나쁜 사람, 다정한 사람, 귀여운 사람 등등. 말만 하면 다 가능해요.”

뭔 자판기도 아니고……. 정우진이 꾸물꾸물 옆으로 오더니 내 어깨에 몸을 기댔다.

“됐으니까, 그냥 네가 되고 싶은 사람이 돼. 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데?”

“평생 선배님 옆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요.”

“그건 이미 됐잖아.”

“그러니까요.”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내 어깨에 몸을 기댄 정우진이 애처럼 자기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저는 이미 되고 싶은 사람이 됐으니까, 이제부터는 뭐든 다 될 수 있어요. 매일매일 선배님이 저를 어제보다 더 좋아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어요.”

“…….”

뭔가 엄청난 말을 들은 거 같아서 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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