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와 B의 사이-171화 (176/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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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오랫동안 믿었던 말이 거짓이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는데, 지금은 정우진이 내 멍청한 짓을 다 알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길이 없는 낭떠러지 위에 선 것처럼 막막하고, 숨기고 덮어 놨던 치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견딜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멋진 척은 하고 싶은가 보다. 물론 그동안 잘난 모습을 보여 준 적은 딱히 없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긴 시간 동안 등쳐 먹힌 사실까지 남의 입에서 듣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말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정우진의 시선이 느껴졌다. 눈이 마주치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의도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별안간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저희 집에서 라면 먹고 가실래요?”

“뭐?”

“피곤할 때 따뜻한 거 먹으면 피로가 좀 풀리지 않나? 그리고 선배님 라면도 좋아하시잖아요.”

“…….”

갑자기 라면은 무슨 라면? 그리고 라면 먹고 가라는 건 약간 좀 다른 의미가 있는 질문 아니었나?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정우진을 멍하게 보다가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참나.”

“집에 가면 혼자 있어야 하잖아요.”

“애들 다 있는데 무슨 혼자야.”

“방에서는 혼자 있잖아요.”

그렇기는 했다. 지금 돌아가면 애들은 당연히 다 곯아떨어졌을 거고. 그래도 이 상황에서 갑자기 라면 먹고 갈 거냐고 묻는다는 것 자체가 너무 웃겼다.

“라면은 무슨…….”

“안 드실 거예요?”

“뭐 있는데?”

“집에 라면 없어요. 가면서 사야 돼요.”

당당하게 하는 말에 나는 다시 헛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라면도 없으면서 무슨 라면을 먹고 가라 그래?”

“사서 들어가면 되잖아요.”

회의실을 나가 주차장까지 가는 길에도 계속 고민을 했다. 일단 지금 너무 피곤하고 시간도 늦었긴 한데, 라면 얘기를 들으니까 딱 하나만 먹고 싶기도 하고……. 근데 정우진 집까지 가서 라면 하나 먹고 또 숙소에 오려면 시간도 제법 걸릴 텐데. 하지만 내일 오전 스케줄은 또 없긴 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차에 타서 안전벨트를 하며 물었다.

“근데 너 가방 안에 돈 그거 뭐야? 얼마를 넣은 거야, 도대체?”

라면 먹고 가라는 얘기에 순간 중요한 걸 잠시 잊고 있었다. 갑자기 떠올라서 묻자 정우진이 길거리 거지에게 300원 정도 적선한 졸부처럼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다.

“1억 정도 될걸요?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어요. 제가 가지고 온 게 아니라서…….”

“…….”

가방 크기가 엄청 큰 것도 아니고, 안이 꽉 찼던 것도 아니라 그 정도까지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5만 원권 지폐라 그런지 금액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그걸 그렇게……. 현금으로 그냥 줘? 계좌 이체 같은 거로 차라리 증거라도 남기는 게 낫지 않아? 차용증 같은 것도 없는데, 그걸 나중에 어떻게 받아?”

“이체 기록 남기기 싫어서 그랬던 거예요. 그리고 돈 안 줬으면 그렇게 쉽게 가지도 않았을 거고요.”

“그래도 그렇지, 그 큰돈을 그렇게 그냥 줘 버리냐?”

“안 그럼 선배님이 계속 거기에서 그 새끼가 하는 말을 듣고 있어야 하잖아요.”

아니, 씨발……. 아무리 그래도 1억이면……. 엄청 큰돈인데. 차라리 나나 주지…….

강수민도 모자라서 그런 새끼한테 또 정우진이 피땀 흘려 번 돈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니 뒤늦게 속에서 열불이 치솟기 시작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신경을 어떻게 안 써? 너 그리고 그놈한테 진짜 30억 줄 건 아니지?”

당연히 안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까 1억을 그렇게 허공에 버리듯 던져 준 걸 보니 조금 불안해졌다. 내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묻자 정우진이 웃었다.

“당연히 안 주죠.”

내 의심스러운 눈빛에 정우진이 의미심장한 말을 덧붙였다.

“많이 쓰라고 하세요. 돈이 있어야 나가서 도박도 하고 약도 사고 그러죠.”

“뭐?”

“돈이 없으면 놀 수가 없잖아요. 술도 못 마시고.”

“…….”

당연한 말이기는 한데, 뭔가 안에 뼈가 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노는 것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긴 한데……. 정우진이 김도웅의 원활한 여가 생활을 위해서 그 큰돈을 선뜻 준 건 당연히 아닐 것이다.

문득 귀신 같은 얼굴로 김도웅을 내려다보던 정우진의 표정이 떠올랐다. 감정이라고는 쥐뿔만큼도 느껴지지 않던 시커먼 눈은 마치 영화 속에서 봤던 정신 나간 사이코패스 살인마와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나는 찝찝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죽여?”

헛소리를 한 게 아니라 정말 티끌만큼은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질문한 건데, 정우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네가 말을 하는 게 꼭…….”

내가 말을 얼버무리자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보던 정우진이 갓길에 주차를 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선배님, 도대체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

이걸 차까지 세우고 물어볼 일인가? 물론 내가 황당한 질문을 하긴 했지만……. 생각해 보니 내가 너무 비약한 것 같아서 좀 민망하긴 했다.

“저번에도 그러시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던 정우진이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핸들에 팔을 기대고 나를 보며 물었다.

“근데 만약 제가 사람 죽이면, 그래도 계속 만나 주실 거예요?”

뜬금없는 말에 다시 등 뒤가 서늘해졌다.

“설마 그런 적 있어?”

“아니요? 그냥 자꾸 그런 말을 하시니까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표정을 보니 정말 순전히 호기심인 것 같았다. 생각할 것도 없이 당연히 안 만난다고 대답하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진지하게 물었다.

“왜 죽였는데?”

내 물음에 정우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 이유가 납득이 가면 괜찮은 거예요?”

“괜찮은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일단 들어는 봐야지. 아무 이유도 없이 그러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음…….”

정우진은 마치 고민을 하듯, 아니면 뭔가를 떠올리듯 허공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쁜 사람이라서?”

“얼마나? 너한테 나쁘게 한 거야?”

“자꾸 거짓말하고, 헛소문 퍼뜨리고, 욕심도 많고, 앞길 막고…….”

저게 사실이면 나쁜 사람이 맞긴 한 거 같은데, 그렇다고 또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고작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는 건 좀 아니지 않냐고 하려는데, 문득 떠오른 생각에 혹시나 하고 물었다.

“그게 김도웅이야?”

“아니요?”

“그럼 누군데?”

가상의 인물을 예로 들었다고 하기에는 너무 구체적이었다. 내 물음에 정우진이 웃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아무튼 누구 안 죽여요. 앞으로도 그럴 일 없고요. 그거 범죄잖아요. 들키면 감옥도 가야 되는데, 그럼 선배님이랑 같이 있을 수도 없고……. 선배님도 살인자 남자 친구는 싫을 것 같고.”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는데, 왜 이렇게 내가 고마운 느낌이 드는 걸까? 평소에 이상한 소리를 하도 많이 들었더니, 사람 안 죽인다는 말을 듣고 안도가 되는 것도 웃겼다.

나도 덩달아 정우진을 따라 피식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요즘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너무 피곤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일 때문에 예민해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그리고 고통도 살아 있어야 받는 거지.”

“뭐?”

“죽으면 다 끝이잖아요.”

“…….”

그 말에 반사적으로 끄덕거리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또 의미심장한 말이라 기분이 찝찝해졌다.

“그러니까 나쁜 사람이 있으면 오래오래 살게 도와줘야죠.”

햇살처럼 웃으며 이상한 소리를 하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타협안을 제시해 봤다.

“그냥 경찰에 신고하면 안 돼?”

“아, 편의점이다. 제가 금방 라면 사 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집 근처도 아닌 곳에 잠깐 차를 세운 정우진이 후다닥 밖으로 튀어 나갔다.

“…….”

설마 말을 돌린 건가? 경찰에 신고는 안 한다는 뜻인가?

나는 정우진이 들어간 편의점 유리문을 착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얼마 뒤, 뭘 잔뜩 사 온 정우진이 봉투를 들고 운전석에 앉았다. 자연스럽게 그걸 받아 뒤적뒤적 안을 확인하며 물었다.

“근데 너 돈 쓸 때 나한테 허락받고 쓴다고 하지 않았냐?”

“네?”

“이건 왜 네 마음대로 사?”

“……저희 같이 먹는…….”

놀란 정우진이 눈에 띄게 당황하며 말까지 더듬었다. 그러더니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내일부터는 꼭 허락받을게요. 잘못했어요.”

“그 새끼한테 돈도 네 마음대로 주고. 잃어버릴까 봐 아주 가방까지 준비해서 차곡차곡 담아 줬더구만.”

“근데 그건 어쩔 수가 없었어요.”

내가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변명을 했다.

“돈 안 줬으면 그렇게 빨리 안 갔을 거예요. 또 이상한 소리나 하면서 드러누웠을 수도 있고……. 그럼 선배님은 그 꼬라지 보면서 안 그래도 힘들 텐데, 스트레스 더 받았을 거잖아요. 안 그래요?”

“어, 안 그런데? 아무튼 너는 앞으로 진짜 돈 쓸 때 나한테 허락 안 받으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허락받지 않고 돈을 썼을 때 내가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디 때릴 때도 없고, 그렇다고 장난이라도 이런 걸로 헤어지느니 어쩌니 그런 말은 하기 싫고……. 좀 적당히 선을 넘지 않게 협박할 게 뭐가 있나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조금 전에 정우진과 했던 대화가 떠올랐다.

“안 받으면?”

내가 한동안 말이 없자 정우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나는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미간을 구겼다.

“벌 받을 줄 알아.”

“…….”

하지만 내 말이 협박처럼 들리지 않은 건지 정우진이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걸 보고 있자니 속이 갑갑해져 한숨이 절로 나왔다.

“두근거리지 말라고, 이 변태 새끼야.”

순식간에 기대에 젖어 촉촉해진 검은 눈을 보며, 이마를 짚지 않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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