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와 B의 사이-169화 (174/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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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황당했다. 아주 적은 확률이라도 자기가 정말 30억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도대체 어떻게 저리 허황된 망상을 하는 걸까?

강수민도 이것저것 받았으니, 자기도 기회가 있다고 여긴 걸까? 아무튼 정우진의 귀찮음이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씁쓸했다.

“진짜 호구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딱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질 않아서 한숨만 쉬고 있는데, 김도웅이 덩달아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걔들한테 돈을 도대체 왜 주냐고. 네? 그 새끼들 진짜 나쁜 새끼들이라니까? 이거 보세요. 돈 받자 들고튀었잖아요. 하, 진짜 세상 물정을 이렇게 몰라서야…….”

“…….”

돈 들고튄 게 아니라 뭔가 일이 잘못돼서 잠수를 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본 걸까? 그러고 보니까 강수민은 그렇다 쳐도 박영덕은 어떻게 된 건지 나도 알 수가 없었다.

“당신이 그렇게 애지중지 있는 거 없는 거 다 퍼 줬던 사촌 형님이 밖에서 뭐 하고 다닌 건지 알기나 하세요? 사촌 동생 욕은 또 얼마나 했는데.”

“뭐라고 했는데요?”

강수민과 나는 이간질이 통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애초에 나는 강수민을 믿은 적도 없고, 우리가 친하게 지내는 사이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내 침묵이 그를 보호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 건지, 김도웅은 열심히 강수민을 헐뜯었다.

“그 새끼한테 그렇게 돈을 줄 필요가 없었다니까요? 아, 진짜……. 이걸 다 말을 할 수도 없고, 존나 답답하네.”

답답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돈 달라는 소리를 다채롭게 하고 있기는 했지만, 별로 화도 나지 않고 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욕을 먹고 뺏기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원래 그 인간에게 별로 기대를 안 해서 그런지 정말 화가 나지도 않았다.

“이거 진짜 내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쪽 인생이 불쌍해서 말해 주는 거예요. 그렇게 감쌀 필요가 없는 새낀데, 진짜…….”

아니, 감싼 적 없다고…….

내가 인상을 팍 찌푸리자 김도웅이 한숨을 내쉬더니 탁자에 노크를 하듯 똑똑 두드린 다음 나를 쳐다봤다.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네, 말씀하세요.”

“그쪽이 중학교 다닐 때 강수민 부모님을……. 그러니까 어릴 때 고아가 된 당신을 거둬 준 삼촌이랑 고모를 죽게 한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잖아요.”

“…….”

“그거 때문에 강수민한테 약점 잡혀서 지금까지 그렇게 호구 노릇한 거고.”

도대체 강수민은 그때 일을 얼마나 자세하게 떠들어 댔던 걸까? 뭔가 세세하게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와중에, 이 얘기를 정우진도 듣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오는 길에 이 부분에 대해 정우진에게도 말을 해 주려고 했던 참이었는데, 자꾸 변태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이상한 소리나 해 대서 결국 아무 얘기도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른 사람의 입으로 듣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말해 주고 싶었는데…….

딱히 뭐 엄청나고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긴 하지만.

정우진이 이 얘기를 듣고 무슨 생각을 할지 상상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표정이 일그러졌다. 초조해서 그런 걸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도 모르게 손가락 끝을 손톱으로 긁고 있었다.

그걸 보더니 김도웅이 재수 없는 표정으로 피식거렸다.

“오래됐는데 그래도 기억은 나나 봐요?”

평소에 굳이 생각하면서 사는 건 아니었지만, 떠올리려고 하면 어제 일처럼 생생한 것도 사실이기는 했다.

그러니까 내가 중학생일 때……. 나는 사람은 도대체 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건지 너무 궁금했던, 질풍노도의 사춘기를 겪고 있던 평범한 학생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고, 시간이 지나면 죽는다. 그렇다면 사람이 살아가는 건 결국 죽기 위한 것이 아닐까? 어차피 죽을 텐데 다들 왜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걸까? 이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다들 죽는데, 왜 이렇게 울고 웃고 지랄 염병들인 건지……. 결국 죽으면 다 끝인데.

사는 게 힘들어서 끊임없이 이유를 찾아야만 했던, 세상을 통달했다고 믿었던 나는 지독한 중2병을 앓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반 친구와 시비가 붙었다. 왜 싸웠는지 정확한 이유도 이제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우개를 뒤로 썼다고 싸웠었나? 그러니까 계속 써서 둥글게 변했던 부분이 아니라, 새것처럼 뾰족했던 뒷부분을 써서 그랬던 듯싶었다.

아무튼 시작은 사소했지만, 말다툼을 하다 보니 서로 감정이 상해 버려서 큰 싸움이 되고 말았다.

욕을 하고 언성을 높이다가 플라스틱 필통으로 머리통을 얻어맞은 나는 덩달아 필통으로 똑같이 그 애의 머리통을 갈겨 버렸다. 특별히 더 세게 때린 것도 아니고, 내가 잡은 건 천으로 만든 필통이라 분명히 내가 맞은 것보다 덜 아팠을 텐데도, 그 애는 맞자마자 머리통을 부여잡고 쓰러지면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종이 울려서 그 애는 훌쩍거리면서 자리로 돌아갔다. 맞은 이마가 욱신거렸지만 아픈 티를 내기도 싫어서 나도 자리로 돌아갔는데,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학교로 그 애의 엄마가 찾아왔던 것이다.

“아니, 애가 머리를 맞았다는데 그럼 엄마가 돼서 가만히 있어야 했다는 거예요?”

“어머니, 그게 아니라…… 애들은 원래 좀 싸우면서 크기도 하고, 크게 다친 곳도 없는데…….”

“다친 곳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기는 하셨어요? 머리가 얼마나 예민한 곳인데, 그것도 성장기 애가 얼마나 세게 맞았으면 울고불고하면서 전화를 했겠냐고요. 당신, 선생 맞아요? 학생이 맞았다고 하면 전후 사정 파악을 먼저 해야지, 그냥 애들 싸움이라고? 장난하세요?”

점심시간인데 밥도 못 먹고 교무실에 불려 온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아직도 훌쩍거리고 있는 애를 쳐다봤다. 아니, 장난하나? 고작 이런 일로 학교에 엄마를 부른다고?

“아니, 저, 저 눈빛 좀 봐! 얘! 넌 무슨 애가 눈을 그렇게 뜨니?”

그때 날 본 건지, 선생님한테 고함을 지르고 있던 여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선생님이 내 앞에서 나를 막듯 서더니 여자를 달래듯 말했다.

“어머니, 진정 좀 하세요. 전후 사정 파악을 안 해 본 게 아니라, 애들 말 들어 보니까 해군이가 서주를 먼저 때렸대요. 서로 싸우다가 한 대씩 때린 거고, 종 쳐서 그것도 바로 끝났고요. 해군아, 서주야. 너희들이 말해 봐. 선생님이 들은 말 중에 틀린 부분이 있을까?”

선생님이 살짝 허리를 굽히더니 나와 그 애를 보며 물었다. 안경 너머의 눈빛과 목소리가 너무 친절해서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뭐라고 하려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는데,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말이 안 통하네. 저기요, 선생님. 지금 애들 협박하세요? 아휴, 됐고. 저애 부모 연락처나 좀 알려 주세요. 부모랑 얘기하는 게 더 낫겠네.”

“어머니, 일단 애들은 점심도 먹어야 하니까 보내고 저희 둘이 이야기를 하시죠.”

“지금 이 상황에서 애들도 밥이 넘어가겠어요?! 아니, 선생님. 진짜 섭섭하게 왜 이러세요? 제가 뭐 진상이라도 부리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시는데, 선생님은 아이 없으세요?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한테 맞았다고 하면 걱정이 안 되겠어요? 네? 무슨 선생이 이래.”

마치 그 애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말을 하다 보니 점점 감정이 더 상했던 건지 결국 둘의 싸움으로 번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뒤에서 뭐라고 하든 말든 일단 밥부터 먹으라고 선생님은 교무실에서 날 내보냈다.

하지만 복도로 나온 내가 입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속이 상해서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고……. 나도 만약 엄마가 있었다면 조금은 더 나았을까? 하는 지겹고 헛된 생각과 부러움이 불현듯 들어 그저 눈앞이 캄캄해졌다.

눈물을 참는 것에만 온 힘을 다하느라 결국 점심도 거르고 뒤뜰 구석으로 가 마음을 추스르고 있는데,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을 보니 숙모에게 걸려 온 전화였다.

사실 나는 이때까지도 삼촌과 숙모에게 그렇다 할 관심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냥 어렸을 때 나를 데리고 와 별말을 안 해 준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딱히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할까.

잠은 자는지, 밥은 먹는지, 내가 집에 오기는 한 건지…….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나를 괴롭히고 욕하는 강수민에게 더 정을 느끼고 있던 시기였다.

그렇게 내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약해졌던 상황에서 액정 위에 떠오른 글자를 보니 왈칵 울음이 나왔다. 그렇게나 참았는데 결국 흘러내린 눈물을 대충 벅벅 닦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다음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서주야.

조금 전 선생님이 나를 바라보며 내 이름을 불렀던 것과 오버랩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평소와 크게 다를 것도 없는 목소리였는데, 뇌에서 멋대로 다정한 목소리로 변조시켜 버렸다.

“네…….”

-목소리는 또 왜 그래? 너 설마 울어?

“…….”

울 때 우냐고 물어보면 원래 눈물이 더 나는 법이었다. 아니, 씨발. 진짜 별것도 아닌 걸로 싸우고, 서로 한 대씩 때린 것밖에 없는데……. 이렇게까지 울 일이냐는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지금 서러움이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었다.

평소에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엄마의 존재에 대한 생각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감정을 조절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너 친구랑 싸웠다며?

“그게 아니라…….”

-상대 학부모가 난리 쳐서 학교에 좀 오라고 하던데, 도대체 뭔 짓을 했길래 전화까지 오게 만들어.

하지만 멋대로 변조되는 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귀찮은 게 역력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온몸이 젖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오늘 바빠서 못 가니까 네가 선생님한테 대충 말 좀 해 봐. 둘 다 맞벌이라 시간이 도저히 안 난다고. 원래 일하는 중에는 전화 잘 못 받는다고도 말하고.

“…….”

-그리고 너는 친구랑 싸웠으면 그냥 대충 사과하고 끝낼 것이지, 그걸……. 어? 뭐라고? 못 들었어! 돗자리? 무슨 돗자리? 그거 장롱 안에 없어? 아니, 꽃 보러 가는데 돗자리는 왜 챙겨!

“…….”

핸드폰 너머로 희미하게 삼촌의 목소리도 들렸다. 도시락은 쌌는지, 수민이랑 병원 가서 주사나 맞고 오라든지, 하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강수민이 아침에 열이 나서 학교를 안 갔던 게 떠올랐다.

-진짜 못 살아, 저 양반. 혼자서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아무튼 서주야, 지금 바쁘니까 네가 선생님한테 말 좀 잘해. 자꾸 귀찮게 해서 일단 내가 가겠다고 말은 해 놨거든? 근데 못 가. 알았지? 끊는다?

“숙모.”

-왜?

“저 맞았어요.”

-뭐?

“맞았다고요. 엄청 딱딱한 플라스틱 필통으로 이마 맞고…….”

이런 게 처음도 아니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상이었지만, 평범한 날들이 버거운 순간이 있다. 늘 똑같은 하루인데도, 이상하게 견딜 수가 없는 그런 날 말이다.

-이마를 맞았다고?

“가만히 있어도 계속 욱신거리고, 만지면 엄청 아프고…….”

-내가 의사도 아니고 그걸 나한테 말하면 어떡해? 학교에 양호실 없어?

“양호실 있긴 한데……. 계속 아프고…….”

-양호실을 가, 그럼. 어? 양말 어디 있냐고? 어휴, 진짜! 좀! 거기 있네! 없다고? 내가 가서 찾으면 어쩔래?

시끄럽게 들려오는 소음에 스스로 인식하기도 전에 버럭 고함이 터졌다.

“저 아프다고요!”

-아, 깜짝이야! 얘가 갑자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제가 언제 아프다고 한 적 있어요? 한 번도 없잖아요. 근데 지금 아프다고요! 엄청 많이 아프다고요!”

-그러니까 양호실에 가라고! 이게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게 소리를 질러!

한 번도 소리를 지르거나 대들었던 적이 없었는데, 나는 그날 처음으로 언성을 높였다. 꾹꾹 막아 놨던 감정들이 한 번 터지니 걷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냥 계속 울면서 토하고, 토하고, 토하고, 또 토했다.

“그 아줌마가 저한테 계속 욕하고, 저 머리 맞은 곳에 피도 나는데 그냥 좀 와 주면 안 돼요? 그게 그렇게 어려워요? 그게 힘들어요?”

동정 받고 싶고 불쌍해 보이고 싶어서 거짓말까지 하며 바락바락 고함을 지르고 있는데, 내 첫 반항에 당황하던 숙모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알았어. 갈게, 간다고. 무슨 애가 이렇게……. 어휴, 지금 갈 테니까 기다리든가!

“…….”

또 온다고 하니까 타는 불처럼 들끓던 가슴이 거짓말처럼 사그라지고 있었다. 혼자 씩씩거리면서 뭐라고 하려는데 전화가 끊어졌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정말 숙모가 올 일까지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그냥 내 편이 필요했던 것 같았다. 내 편이라는 게 내 말을 믿어 줄 사람이 아니라, 꼭 나를 두둔하지 않더라도 그냥 내 옆에 서 있을 사람 말이다.

누군가가 나를 비난하고 욕할 때, 그냥 같이 옆에 서 있어 줄 사람.

그래서 나는 숙모가 학교에 와서 친구랑 싸웠다고 나를 혼내면 죄송하다고 꼭 사과를 할 생각이었다. 그 애한테도, 그리고 그 애의 부모님한테도, 친절하고 다정한 선생님께도 허리를 숙여 사과하고, 숙모한테도 버릇없이 굴어서 죄송하다는 말을 꼭 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감사하다고.

하지만 나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오는 길에 교통사고가 나서 삼촌과 숙모는 그 자리에서 어떻게 손쓸 방도도 없이 곧장 죽었다고 했다.

꽃놀이보다는 손톱만큼이라도 더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나의 사춘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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