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와 B의 사이-167화 (172/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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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는 도대체…….

정우진이 했던 말을 떠올려 보면, 자기 나름대로 논리적인 척을 하고 있기는 한데 그냥 내가 봤을 땐 호구나 다름없었다. 귀찮아서 돈으로 해결한다는 논지는 알겠는데, 그것도 정도껏 해야지…….

“에휴.”

자기 돈이니까 어떻게 쓰든 자기 마음이겠지만, 옆에서 보고 있자니 답답하고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저렇게 호구라는 게 소문이 나면 여기저기에서 안 좋은 마음으로 접근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어쩌면 이미 크게 사기를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뭐라고 한마디 해 주고 싶어도 정우진도 다 큰 성인인데,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이대로 넘어가려니 자꾸 찝찝해서 지나가는 말처럼 입을 열었다.

“만약 누가 돈 빌려 달라고 하거나, 뭐 좋은 사업 아이템 같은 게 있다고 해도 덜컥 투자하거나 빌려 주고 그러지 마. 알겠지?”

내 갑작스러운 말에도 정우진은 별 의문 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돈 쓸 일 있으면 꼭 허락받고 쓸게요.”

“아니, 허락을 받으라는 게 아니라…….”

아니, 차라리 허락을 받는 게 나으려나? 근데 내가 무슨 아빠도 아니고, 이런 것까지 검사를 하는 건 좀 이상하지 않나? 그래도 정우진이 애먼 곳에 돈을 갖다 버리는 걸 볼 바에 내가 관여하는 게…….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저 현금은 잘 안 들고 다니고, 평소에 카드 위주로 쓰는데 선배님 핸드폰으로 문자 가게 해 둘게요.”

제2의 강수민이 나타날지도 모르니 이게 나을 것 같아서 한 말이었지만, 정우진은 너무 단도직입적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돼. 그냥 누가 돈 빌려 달라고 하거나 그러면…….”

“현금으로 쓰면 영수증도 꼭 챙겨 둘게요.”

“그러지 말라고.”

“한 달에 얼마 정도 쓰면 돼요?”

“…….”

이쯤 되니까 그냥 또 날 놀리고 있는 거 같아서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뭔가 잔뜩 기대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보고 있자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선배님이 그렇게 관리해 주면 너무 좋을 거 같아요.”

“그게 관리냐? 참견이지.”

“참견 좀 해 주면 어디 덧나요? 우리가 남도 아닌데.”

정우진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입술을 삐죽거렸다.

“막 선배님이 저한테 오늘은 무슨 옷 입으라고 해 주고, 말 안 들으면 혼내 주고 그랬으면 좋겠다. 막 하나부터 열까지 다 참견하고……. 밥도 뭐 먹으라고 말해 주고, 돈도 마음대로 쓰지 말라고 하고…….”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냥 혼잣말이에요.”

“무슨 혼잣말을 그렇게 크게 해?”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정우진이 슬쩍 내게 시선을 돌렸다. 뭔가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 눈빛이 그렇게 부담스러울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 만나면 혼내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데 왜 혼내?”

“연락했는데 3초 만에 안 받으면 벌주고…….”

“자동 응답기도 아니고 3초는 무슨……. 아니, 내가 선생님이냐? 뭘 자꾸 혼내고 벌을 주래? 그리고 바쁘면 연락도 좀 못 받을 수도 있고 그런 거지.”

평소에 별로 화를 낸 적도 없는 거 같은데, 아까부터 왜 자꾸 벌타령인지 모르겠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기도 하고, 불현듯 든 생각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혹시 변태야?”

하나부터 열까지 다 구속하고 통제하는 걸 좋아하는 뭐, 이런 게 있다고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혹시라도 그런 성향인가 싶어서 묻자, 정우진이 도리어 내게 물었다.

“변태가 좋아요? 그럼 변태 할게요.”

“아니, 좋으냐고 물어본 게 아니라 네가 변태인지 아닌지 물어본 거잖아.”

아까부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내 말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근데 그건 갑자기 왜 물어보세요?”

그걸 몰라서 물어보나? 자기가 했던 말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도 못한 걸까? 정우진은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특이한 성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니까 또 하나하나 설명하기가 애매했다.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눈만 깜빡거리다가 말했다.

“네가 아까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만 했잖아.”

“무슨 이상한 소리요? 돈 얘기요?”

“돈 얘기가 문제가 아니라, 막 하나부터 열까지 다 참견해 달라고 그러고…….”

“참견해 달라고 하면 변태예요?”

생각해 보니까 그냥 그런 성향이 있을 수도 있는 건데, 내가 너무 무작정 변태라고 한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것도 그냥 취향일 뿐인데, 내가 너무 쫌생이처럼 말했나?

저렇게 별것도 아닌 것처럼 말하니까 내가 너무 인색한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멋쩍은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자 정우진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그럼 저 변태 맞나 봐요.”

“어, 그래……. 축하해.”

“그럼 저 변태니까 앞으로 선배님이…….”

“우리 변태 얘기 좀 그만하면 안 될까?”

저 입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지 무서워 얼른 말을 막자, 정우진이 웃었다.

“선배님이 먼저 말했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너무 경솔했던 거 같아.”

“근데 저 진짜 변태 맞긴 한 거 같아요.”

“그래, 좋겠다. 축하해.”

별 쓸데도 없는 얘기를 하는 와중에 회사에 도착했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나 봐요. 선배님이랑 따로 이야기하고 싶다고 해서 일단 회의실에 넣어 놨대요.”

넣어 놨다고 하니까 마치 짐 같았다.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회사는 조용했고, 사람도 없었다. 적막해서인지 발걸음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려왔다. 정우진이 말할 때마다 목소리도 울려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죽이고 대답했다.

“근데 선배님은 제가 변태인 게 좋아요, 아니면 변태가 아닌 게 좋아요?”

“그 얘기를 지금 꼭 해야 되냐?”

안 그래도 목소리도 울리고 조용한데 변태 얘기를 왜 지금 하지? 황당한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승강기의 버튼을 누르며 말했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데 뭐 어때요.”

“그래도 하지 마. 회사잖아.”

“그냥 좋다, 싫다 한마디만 해 주세요. 그 단어는 저도 말 안 할게요.”

끈질기게 묻는 걸 보니 쉽게 포기할 것 같지가 않아서 나는 생각할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싫어.”

“싫어요? 왜요?”

“그냥 싫어. 난 그게 아니니까.”

“변태요?”

“아, 좀! 그 단어 말 안 한다며!”

내가 작은 목소리로 진저리를 치며 발작하자 정우진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따지고 보면 지금은 좀 심각한 상황이고, 나를 모함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이렇게 긴장감이 없어도 되는 건가? 뭔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도웅이 기다리고 있는 층에 도착하자 정우진이 내게 녹음기를 건넸다.

“저도 듣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궁금한 것만 물어보고 나오세요. 혹시 마음이 바뀌어서 한 대 때리고 싶거나 그러면 뒷일은 제가 책임질 테니까 마음껏 패세요. 혹시 다칠지도 모르니까 맨손으로는 때리지 말고, 뭐라도 아무거나 잡아서 때리시고요.”

정우진이 하는 말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장난인지 알 수 없다는 특징이 있었다. 뭐라고 대꾸를 해 봤자 또 이상한 소리나 할 게 뻔해서 그냥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길게 얘기할 것도 없어. 그냥 날 왜 만나고 싶었냐고 그거나 물어보고……. 왜 그런 글을 올렸냐고만 물어보고 바로 나올 거야.”

“네,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부르세요. 3초 안에 갈게요.”

3초라는 말에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3초 안에 안 오면 혼내 줄게.”

“…….”

내 말에 정우진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요상한 얼굴이라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표정이 왜 그래?”

“저 지금 너무 고민돼요…….”

“뭔 고민?”

“선배님한테 혼날 수 있는 기회와 선배님이 나를 필요로 하는 것 중에서 뭘 선택해야 할지……. 생각해 보니까 4초 안에 가면 혼날 수도 있고, 선배님한테 갈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해도 되죠?”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한숨을 쉬고 말했다.

“아무튼 갔다 올게. 어디에 있다고?”

“C룸이요. 그리고 아까 한 말은 농담이에요. 저 부르면 1초 안에 갈게요.”

“그래, 든든하네.”

“만약 걔가 나쁘게 말하면 제가 임의로 결정해서 쳐들어가도 될까요?”

“그건 안 돼.”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악당 소굴로 들어가는 것도 아닌데 정우진은 끊임없이 내게 주의를 시켰다.

“조심하세요.”

이러다가 울 것 같아서 얼른 정우진을 두고 C룸으로 갔다. 가장 구석에 있는 넓은 회의실이라 복도를 따라 걷다가 문 앞에 섰다. 방음이 확실해서 아마 내가 오는 발소리도 못 들었을 것 같아 우선 노크를 했다.

“들어와.”

그러자 낯선 누군가가 마치 집주인처럼 당당하게 말했다. 순간 헛웃음이 나와서 잠깐 웃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빼빼 마른 남자가 거만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 밑은 시커멓고 눈빛도 퀭한 게, 며칠 밤을 새우고 일한 사람처럼 피곤해 보였다. 비쩍 말라서 얼굴도 좀 창백하고 광대가 많이 나와 있어서 그런지 해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머리카락은 물이 다 빠진 주황색에 가까운 탈색 모였는데, 뿌리가 많이 자라고 군데군데 떡이 져 있어서 많이 지저분해 보였다. 다 구겨진 트레이닝복에 꺾어 신은 운동화…….

인사도 하지 않고 찬찬히 남자를 살폈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고 생각해 봐도 내가 모르는 사람이었다.

“뭘 그렇게 쳐다보세요?”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거의 눕다시피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던 김도웅이 웃으며 물었다. 누가 봐도 시비를 거는 말투와 억양이었다.

“저는 왜 보자고 했어요?”

“할 말이 있으니까 보자고 했죠. 근데 인사도 안 하고 이렇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요?”

“아, 예. 안녕하세요. 전 왜 보자고 했습니까?”

“아니, 진짜 성격이 너무 급하네.”

김도웅은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자세를 똑바로 하고 앉았다. 그리고 책상에 팔을 올리며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일단 좀 앉으세요. 올려다보려니까 목이 너무 아픈데.”

그 말에 나는 김도웅의 맞은편 자리에 의자를 빼서 앉았다.

“식사는 하셨어요?”

“…….”

“아니, 스몰 토크 같은 것도 몰라요? 참 빡빡하네, 사람이…….”

“…….”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나는 지금 꽤 당황하는 중이었다. 자기가 잘못해서 찾아와 놓고 뭐 이렇게 뻔뻔한 거지? 하긴, 제정신이면 그런 글을 올리지도 않았겠지.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물었다.

“할 말이 뭔데요?”

“할 말이야 많지……. 근데 이렇게 나와도 되나? 내가 지금 강서주 씨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생각보다 많은 거 같은데.”

얄미운 표정으로 괴상하게 웃고 있는 김도웅을 보고 있자니 본능적으로 불쾌함이 들끓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는 듯해 일단 다른 질문을 했다.

“근데 누구세요?”

생각해 보니까 나는 이 사람이 누군지도 몰랐다. 정우진에게 대충 듣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기소개 정도는 본인에게 들어야 할 것 같아서 물었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세요?”

“아니요. 안 궁금하니까 그냥 왜 보자고 했는지나 빨리 말하세요.”

다시 생각해 보니까 굳이 듣지 않아도 될 것 같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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