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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같아서는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숨어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아직 몇 시인지 확인을 못 했는데 날이 저물었으니 언제 애들이 돌아올지 몰랐다. 집에 왔는데 정우진이 욕실 앞에서 죽치고 있는 걸 발견하면 얼마나 상황이 웃기겠는가?
“우리 같이 살면 제가 선배님 피난처도 만들어 드릴 수 있는데.”
그래서 그냥 얼굴에 철판 깔고 나가려고 마음먹었는데, 정우진이 저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더 나갈 수가 없었다.
“제가 생각을 해 봤는데 선배님은 감당 못 할 일이 생기면 일단 도망을 가시더라고요. 근데 너무 멀리 가거나 제가 모르는 곳으로 가면 저도 곤란하니까, 제가 그럴 때마다 숨을 수 있는 곳을 만들어 드릴게요. 아무도 못 찾는 아주 깊숙한, 선배님만의 아지트 같은 거요.”
“나도 생각을 해 봤는데, 너는 이상한 소리를 참 그럴듯하게 하는 능력이 있는 거 같아.”
“장난 아니고 정말 진심이에요.”
진지한 목소리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냥 입을 다물었다. 계속 여기에 이러고 있을 수도 없어서 변기에서 일어나는데, 정우진이 또 헛소리를 해서 도로 앉을 수밖에 없었다.
“술 마시고 실수해도 거기에 숨으면 제가 아무도 못 찾게 해 드릴게요.”
“그 얘기는 왜 또 꺼내?”
“그냥 예시를 드는 거예요. 숨고 싶을 때 거기에 숨으시라고요. 꼭 술 마셨을 때만이 아니라도.”
“술 얘기 그만하라고.”
겨우 기억 속에서 지우고 있었던 애기 사건이 떠오르자 어떻게 막을 새도 없이 온몸에 소름이 돋아 버렸다. 벼락에 맞은 것처럼 따끔거리는 느낌에 목 뒤를 벅벅 긁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정말 너무 끔찍했다. 그동안 정우진을 만나면서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미친 짓거리들을 많이 했지만 방금 그건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을 만큼 해괴했다.
억지로 당한 것도 아니고, 서로 하자고 합의하에 진행이 된 행위였는데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겨서 머리카락을 뽑지를 않나, 짐승 새끼처럼 네발로 기어서 도망치지를 않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내가 형인데…….
“…….”
씨발…….
쪽팔려서 얼굴을 들 수도 없었지만, 여기에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더 나가기 힘들 것 같아서 마음을 먹었다. 문고리를 잡고 속으로 몇 번이나 아주 크게 심호흡을 한 다음에 문을 열자, 벽에 기대고 있던 정우진이 살짝 상체를 구부리며 나를 쳐다봤다.
“…….”
“…….”
마치 못된 사람을 노려보듯 눈을 깜빡이지도 않고 계속 정우진을 쳐다봤다. 정우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무표정한 얼굴로 한참 나를 바라봤다. 민망해하는 나를 위해 정우진이 아무것도 묻지 않는 건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니까 뭔가 시선이 이상했다.
눈을 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좀 더 아래쪽에…….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입을 확 가렸다. 그제야 정우진이 시선을 올려 나를 쳐다봤다. 눈빛이 왠지 아까와 비슷해서 나도 모르게 정우진의 머리통에 꿀밤을 먹이려다가 주먹만 쥐고 말았다.
“계속 안 해요?”
내가 자길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가 멈칫하는 걸 봤을 텐데도, 정우진은 그런 것 따윈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물었다.
“뭘 계속해?”
“하다가 말았잖아요.”
“다음에 해.”
“다음 언제요? 밥 먹고?”
내가 주방 쪽으로 걸어가자 정우진이 내 뒤를 졸졸 쫓으며 끈질기게 대답을 재촉했다. 뭐라고 하려다가 식탁 위에 있는 산더미처럼 많은 과일들을 보고 놀라서 물었다.
“이게 다 뭐야? 네가 사 왔어?”
“네, 감기 걸렸을 때는 과일을 많이 먹어야 한대요. 과일 먹고 할래요?”
“죽도 끓였어?”
“네, 그럼 죽 먹고 할래요?”
가스레인지 위 냄비에 죽이 한가득 있었다. 뚜껑을 열자 고소한 냄새가 훅 끼쳐 허기가 밀려왔다. 국자를 꺼내 그릇에 죽을 담고 있는데,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던 정우진이 가스레인지에 불을 켰다.
“데워서 드세요.”
차갑게 그냥 먹어도 맛있을 것 같은데 국자로 퍼서 보니 식어서 그런지 너무 꾸덕꾸덕하긴 했다. 큼지막하게 자른 전복이 잔뜩 들어간 죽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어쩐지 시선이 느껴져 슬쩍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뭘 봐?”
“…….”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보니 내가 자꾸 말을 돌리던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건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솔직히 아까 내가 순간 당황해서 저지른 행동이 일단 너무 쪽팔렸고, 그래도 내가 나이도 더 많은데 뭔가 너무 허둥지둥 어리숙하게 굴었던 것 같아서 그것도 좆같고…….
아무튼 지금 나는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사면초가,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그런 내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저 발랑 까진 놈은…….
아니, 근데 쟤는 사귄 사람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거 다 구라 아니야?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스런 눈초리로 한참을 쳐다보자, 정우진이 멀뚱멀뚱 날 보다가 물었다.
“지금 할까요?”
“그만 좀 해.”
뭔 말만 하면 기승전할까요, 야?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정우진이 윗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왜 웃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더 이상 이 주제로 대화하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아까는 너무 당황해서 그런 거고, 두 번째부터는 나도 이만큼 크게 놀라지는 않을 테니, 차라리 그때 제대로…….
아니, 근데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아무렇지도 않아서 그것도 좀 충격이었다. 도대체 나는 그동안 왜 고민했던 걸까? 물론 엄청 치열하고 진지하게 고민을 한 건 또 아니었지만, 그래도 막상 해 보니까 남자고, 어린애고 이런 걸 떠나서 그냥 말랑말랑하고 부드럽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걸 보니, 사실 따지고 보면 나도 게이일지도 모르겠다.
“…….”
미친…….
내 성 정체성에 대해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 충격에 잠시 멍하게 있는데, 어느새 죽을 다 데운 정우진이 그릇에 담아 식탁에 놓아 주었다.
“드세요. 너무 뜨거울 것 같아서 조금만 덜었는데, 더 드시고 싶으면 말해 주세요.”
“넌 먹었어?”
그릇이 하나뿐이라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눈빛과 표정을 보니 무슨 말을 할지 짐작이 돼서 얼른 말을 가로챘다.
“됐어, 그냥 먹지 마. 넌 평생 먹지 말고 계속 굶어. 나 혼자 다 먹을 거니까.”
내 말에 정우진이 맞은편에 앉으며 심각하게 물었다.
“그럼 내일은 해도 돼요?”
그것도 안 된다고 하려다가 내일이면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 아주 잠깐, 고민할 동안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정우진이 대단한 걸 발견한 듯 말했다.
“저 그럼 여기에 12시까지 있다가 딱 12시 1분에 하고 집에 갈게요. 12시 넘으면 다음 날이잖아요.”
“넌 참 좋겠다.”
“갑자기 왜요?”
“똑똑해서.”
황당해서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바보 같은 표정으로 웃었다. 나도 그냥 웃어넘기려고 했는데, 혹시라도 이걸 진짜라고 받아들이고 있을까 봐 덧붙였다.
“오늘은 밥 먹고 집에 가. 좀 있으면 애들 와.”
“그럼 주차장에서 12시까지 기다릴 테니까, 1분 되면 잠시만 내려오세요.”
“제발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하고.”
“저 진심이에요. 아까 피난처 얘기도 진심이었고, 12시까지 기다리는 것도 안 힘들어요. 피난처는 제가 전국 팔도에 하나씩 만들어 드릴 테니까, 괜히 다른 데 가지 말고 그중에 하나 골라서 거기에 숨어 주세요.”
진지한 표정으로 말은 하고 있었지만 별로 현실성이 없는 얘기라 그냥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죽을 먹었다. 큼지막한 전복은 쫄깃하고 죽은 고소해서 금방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느라 안 먹는 정우진에게도 죽을 먹이고, 과일도 같이 먹었다. 그러는 동안 계속 자정까지 기다리겠다는 정우진을 겨우 집에 보내자마자 타이밍 좋게 애들이 들어왔다.
“형, 몸은 좀 괜찮아?”
“어, 자고 일어나서 죽 먹었더니 괜찮아. 약도 잘 챙겨 먹었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일 병원 가서 주사 한 방 더 맞으려고.”
느낌상 이제는 정말 다 나은 것 같았지만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했다. 이러다가 또 괜히 시름시름 아파지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이거 다 뭐야? 배달 시켰어?”
그때 집에 오자마자 습관적으로 주방으로 간 유노을이 냄비에 담겨 있는 죽과 여러 종류의 과일을 보며 물었다. 혹시 정우진이 온 걸 모르나? 그럼 누가 말해 준 거지? 당연히 애들이 내가 아프다고 말해 줬을 줄 알았는데…….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거짓말하는 것도 이상해서 그냥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정우진 왔다 갔어.”
“아픈데 혼자 둬서 좀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이네.”
“맞아, 아플 때 혼자 있으면 서럽지.”
말을 하고 있는데도 너무 피곤한 것 같아서 약간 마음에 걸렸다. 밥도 아직 안 먹은 것 같아서 오늘은 내가 만들어 주겠다고 했는데, 끝까지 극구 사양해서 그냥 내가 배달을 시켜 주었다.
“근데 우리 아직 도마랑 칼도 없는데, 이걸 집에서 만든 거야?”
이진혁의 물음에 놀라서 묻자 유노을이 고개를 갸웃했다.
“없다고? 아까 보니까 있던데?”
“엥? 계속 바빠서 안 샀는데? 우리 밥도 요즘에는 밖에서 먹거나 계속 시켜 먹기도 해서……. 저번 숙소에 있던 거 버리고 왔잖아. 칼이랑 도마도 사 온 건가?”
“헐, 대박. 그러고 보니까 냄비도 처음 보는 거 같은데…….”
죽 재료랑 과일만이 아닌 별걸 다 사 온 모양이었다. 아니면 집에 왔다가 없어서 내가 자는 사이에 다시 나가서 사 왔던 건가?
당장 물어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서 다음 날 일어나자마자 정우진에게 전화를 했다.
-네, 선배님.
그런데 정우진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자다가 일어났어?”
-아……. 네, 누워, 콜록, 콜록.
“기침을 왜 해? 너 감기 걸렸어?”
하루아침에 목소리가 이렇게 맛이 갈 수가 있나? 많이 아픈 것 같아서 걱정스런 마음에 묻자 정우진이 크게 숨을 마셨다 뱉으며 말했다.
-네, 좀 있다가 병원 가 보려고요.
“갑자기 감기가 왜 걸려? 너 어제 바로 집에 가지 않았어?”
-바로 갔어요. 선배님은 괜찮으세요?
“난 완전 멀쩡해졌지.”
-그럼 됐어요. 다행이다.
“…….”
힘없이 웃는 목소리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설마 아픈데, 키스 같은 걸 해서 옮은 건가?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하루 만에 멀쩡해진 건가?
일단 주차장에 매니저 형이 와 있어서 전화를 끊고 나중에 다시 통화하기로 했다. 차에 타자마자 내 옆에 앉은 김강이 물었다.
“도마랑 칼 사 온 거 맞대?”
“어?”
“아까 통화하지 않았어?”
“아……. 아, 그거 못 물어봤어. 감기 걸린 거 같아서…….”
“감기?”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강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갑자기?”
그 물음에 순간 뜨끔했다. 따지고 보면 원흉이 나였으니까……. 괜히 찔려서 나는 묻지도 않은 말들을 줄줄 하기 시작했다.
“아, 어제 옷을 좀 얇게 입고 왔더라고.”
“아…….”
“그러니까 옷 좀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고 했는데.”
“아……. 어쨌든 형은 나아서 다행이네.”
“그치…….”
왠지 계속 찝찝했지만 더 말해 봤자 나만 불리할 것 같아서 그냥 고개를 돌려 창밖만 쳐다봤다.
컴백까지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아서 연습을 하는 와중에 틈틈이 정우진을 만나러 갔다. 나는 하루 만에 나았는데 정우진은 도대체 얼마나 독한 감기에 걸린 건지 몇 날 며칠을 고생했다.
이 와중에 또 뽀뽀했다가는 다시 옮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하자고 난리난리 염병을 떨던 정우진이 마스크까지 끼고 맨손으로는 나를 붙잡지도 않았다. 유난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번 고집을 부리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냥 편한 대로 하라고 내버려 뒀다.
정우진이 아프다는 것 이외에는 딱히 별일 없이 시간이 흘러, 드디어 약 20초가량의 뮤직비디오 티저가 공개됐다.
***
댓글
>헐 어나더 컴백하네
>와 드디어 나오네
>미친 구클인데 갑자기 가슴이 웅장해진다.. 죽기전에 클래스 컴백을 보다니ㅠㅠ
>여기가 서주 있는 그룹이야?
re: ㅇㅇ어나더
>목소리 누구임?
re: 이진혁
re: 투투라고 어나더 메보임
>와 음색 엄청 좋네 원래 이렇게 좋았나?
>뭔가 되게 데뷔곡이랑 느낌이 엄청 다르네
re: ㄱㄴㄲ 완전 180도 다름
re: 데뷔곡 어땠는데?
rere: 연하남들의 반란 같은 느낌..
rerere: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rerere: 존나 정확하다ㅋㅋㅋㅋㅋㅋㅋㅋ
rerere: ㅋㅋㅋㅋㅅㅂ 안들어봤는데 뭔지 알거 같애ㅋㅋㅋㅋㅋ
rerere: 아니 달라도 너무 다르잖앜ㅋㅋㅋㅋ
>와 미친 노래 개좋을거 같아ㅠㅠ
>실루엣 제일 끝이 서주인가?
re: 나도 그런거 같음
re: 오른쪽에서 두번째 아님?
rere: 그거 누가 봐도 석삼이
rerere: 노을이라구 해줘...
>뭔가 되게 생각했던거랑은 다른데 좋다
>나 눈물날거 같다 진짜..
re: 클래스니? 같이 울자..
rere: 나도 같이 울어ㅠㅠ
>진혁이 목소리 대박~~~
>미친 나 지금 너무 떨려서 죽을 거 같아
>컴백 담주인거지?
re: ㅇㅇ
>사랑해 얘들아 앞으로 꽃길만 걷자 내새끼들ㅠㅠㅠ
>어나더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