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와 B의 사이-159화 (164/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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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자다가 깨기를 반복해서 그런지 꿈과 현실이 모호해졌다.

“과일 사 왔는데, 좀 드실래요?”

“뭐 있는데?”

“딸기랑 귤이랑…….”

밥과 약을 먹고 정우진이 주는 과일도 틈틈이 먹은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왜냐면 나는 하늘에서 갓 딴 식빵 맛이 나는 사과도 먹었는데, 이건 당연히 꿈일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뜨자 사방이 어두워 눈앞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허리도 찌뿌듯하고 멍한 느낌도 심했지만, 감기 몸살 기운은 많이 사라진 것 같았다. 열도 내린 듯했기에, 역시 아플 땐 먹고 자는 게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우진은 돌아간 건가?

인기척이 들리지 않아서 알 수가 없었다. 상체를 일으켜 앉아 목을 둥글게 돌리자 우두둑하고 뼈 소리가 났다. 어깨도 돌리고 손목, 손가락, 전부 스트레칭을 하듯 움직이다가 핸드폰을 찾았다.

몇 시나 된 건지 확인하려고 했는데, 손을 움직이다가 뭐가 걸려 옆을 보니 정우진이 보였다.

“……?”

바닥에 앉아 침대에 얼굴을 기댄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마주친 시선에 어리둥절해하다가 뒤늦게 화들짝 놀라서 펄쩍 뛰었다.

“뭐, 뭐야!”

잔뜩 갈라지고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왔다. 나는 미친 듯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왜 거기에서 그러고 있어? 귀신인 줄 알았네.”

“귀신이 무서워요?”

“아니, 그건 아닌데……. 왜 바닥에 앉아 있어? 빨리 올라와.”

팔뚝을 잡아당기자 정우진이 힘없이 이끌려 왔다. 어둠에 익숙해져서 그런지 어두워도 침대맡에 앉은 정우진의 표정이 잘 보였다. 그걸 보니,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어딘가에서도 정우진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게 떠올랐다.

“밥은 먹었어?”

“아니요.”

당당하게 하는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왜?”

“밥이 넘어가겠어요?”

밥이 왜 안 넘어간다는 거지? 설마 내가 아파서?

일그러진 표정의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간질간질해졌다.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그냥 감기 몸살 좀 걸린 건데, 이게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가? 약 먹고 잠 좀 자면 괜찮아지는 건데, 왜 자기가 밥을 안 먹어?

내 입장에서는 솔직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지만, 정우진은 평소에도 좀 유별난 구석이 있어서 일단 달랬다.

헛기침을 몇 번 하고 손을 뻗어 정우진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난 거의 다 나은 거 같으니까 너도…….”

“선배님.”

“어?”

“왜 선배님 아프다는 소리를 제가 다른 사람한테 듣게 하세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묻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나를 쳐다보는 새카만 눈에는 서운함이 가득했다. 마치 믿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것 같은 눈빛이라, 나는 내가 순식간에 죽을죄를 지은 사람이 된 것만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른 사람?”

“아프면 저한테 제일 먼저 말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건…….”

“선배님 아파서 병원 갔다 왔다는 얘기를 다른 사람한테 들었을 때, 제 심정이 어땠는지 알긴 해요?”

일어나자마자 혼나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 고개를 슬쩍 숙이고 있는 자세가 됐다.

“그게…….”

변명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정우진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게, 뭐요? 저한테 말할 생각도 없었죠? 제 생각을 하기는 하셨어요?”

“…….”

이건 좀 억울한 얘기였다. 하지만 변명을 하려면 하고 싶지 않은 얘기까지 해야만 해서 그냥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입만 꾹 다물었다. 그러자 정우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가 울상을 짓고 물었다.

“왜 저한테 제일 먼저 말 안 해 준 거예요? 선배님은 아플 때 제 생각 안 나세요?”

“나지…….”

“근데 왜 말 안 했어요? 설마 제가 걱정할까 봐? 아니면 그냥 정신이 없어서 그랬던 거예요? 혹시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그런 거면, 병원 갔다가 집에 와서 연락해 줄 수도 있었던 거잖아요. 아파서 아무도 만나기 싫었던 거면, 저한테 그렇게 말해 주면 됐잖아요. 오늘 아파서 혼자 있고 싶으니까 오지 말라고……. 그럼 저도…….”

속사포로 쏟아 내는 서러운 말에 잠시 당황하다가 얼른 손을 뻗어 정우진의 머리통을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정우진이 나를 밀어내려는 듯 내 어깨에 손을 댔다가 이내 몸에 힘을 뺐다. 얌전히 안겨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훌쩍거렸다.

“……너 우냐, 설마?”

“…….”

“아니……. 진짜, 너는 무슨…….”

울보도 이런 울보가 없었다.

정우진의 말을 들어 보면 서운할 만도 한 거 같은데, 그렇다고 이게 울 일인가? 정우진이 이렇게 울 정도로 내가 잘못을 했나?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어쨌든 울고 있는 애한테 따질 수도 없어서 그냥 토닥거리면서 달랠 수밖에 없었다.

“야, 네가 밥을 안 먹으니까 이렇게 자꾸 눈물이 나는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세요.”

“진짜라니까? 원래 사람은 밥을 안 먹으면 별것도 아닌 일에 예민해지고 짜증도 나고, 눈물도 나고 그래. 맛있는 거 먹으면, 정말 심각하다고 생각했던 일도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그래. 진짜야, 나도 그랬어.”

이건 경험담이니 확실했다. 하지만 정우진은 내가 그냥 하는 소리라고 생각했는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좀 진정이 된 것 같아서 슬쩍 떼어 내자 잔뜩 심통이 난 채 젖어 있는 새하얀 얼굴이 보였다.

꼭 화가 나서 가시를 잔뜩 세우며, 몸을 부풀리고 있는 복어 같기도 해서 좀 웃겼지만, 여기서 웃었다가는 정우진이 더욱 열 받아 졸도라도 할 것 같아서 간신히 참았다.

“생각이 안 나서 너한테 연락을 안 한…….”

“그럼요? 그럼 왜 연락 안 했어요?”

“지금 말하고 있잖아. 내 말 좀 들어 봐. 내가 오늘 새벽에 좀…….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 너한테 연락하기가 좀 그랬어.”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하다가 겨우 알맞은 단어를 찾아냈다. 말 그대로 정말 불미스러운 일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불미스러운 일이요?”

“어……. 현실에서 일어난 건 아닌데……. 아, 아무튼 그런 일이 좀 있어서……. 너한테 연락을 안 하려고 그랬던 게 아니라, 그냥……. 아무튼…….”

말을 하다 보니 또 떠올라서 한숨이 나왔다. 크게 숨을 뱉으며 말을 더듬고 있는데, 정우진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보다가 물었다.

“선배님, 도대체 꿈에서 저랑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

그 갑작스럽고 순수한 질문에 나는 그만 정신을 잃을 뻔했다. 커다란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잠깐 넋이 나가 있다가 입을 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까 양치질할 때 계속 얘기했잖아요.”

“……뭐라고?”

등 뒤로 식은땀이 삐죽 났다. 그보다 양치질이라니? 설마 꿈이 아니었나?

예전에 술을 마시고 내가 정우진에게 양치질을 해 준 것처럼, 이번에는 정우진이 내게 양치질을 해 줬다. 당연히 꿈인 줄 알았는데,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현실에서 진짜 일어난 일인가 보다.

그럼 혹시 뽀뽀한 것도 꿈이 아닌가?

“자꾸 저한테 너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물어봤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그래서 제가 꿈에서 나온 가짜가 뭐 어떻게 했냐고 물어보니까 선배님이 걔가 자꾸 뽀뽀했다고.”

“…….”

미친 새낀가? 그걸 왜 다 말을 했지? 열이 나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진짜 또라이가 따로 없었다.

“기억 안 나세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숨을 삼켰다. 황당하기는 했지만, 저것만 말한 거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밤새 내가 샤워를 두 번이나 했다는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겠지? 그거까지 말했다면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었다.

“왜요? 다른 거 더 있었어요?”

내가 별 반응이 없자 정우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그 모습이 마치 증거를 찾아내려는 탐정 같아서 나는 최대한 정색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

“없었는데?”

“…….”

그때 딱 하고 손톱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정우진과 나의 시선이 동시에 아래로 내려갔다. 초조해서 그런지 내가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손톱끼리 부딪친 것이었다. 숨기는 게 있다고 시인한 꼴이라 나는 제 발 저리는 도둑처럼, 정우진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야!”

갑자기 큰 소리가 나자 정우진이 화들짝 놀랐다.

“우리 키스한 거 꿈 아니었지?”

내 물음에 정우진이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너는 내가 깨자마자 날 혼내냐?”

“제가 언제 혼냈어요?”

“왜 연락 안 했냐고 따졌잖아! 따지고 보면 이게 우리 첫 그건데, 일어나자마자 할 말이 그거밖에 없었냐? 어?”

내가 인상을 팍 쓰고 묻자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는 듯 입을 벌렸다가 이내 시무룩해져서 대답했다.

“그거랑 이건 다르잖아요. 그리고 저는 당연히 선배님이 기억을 못 하실 줄 알고…….”

“기억 못 하면 그게 없던 일이 돼?”

“……키스 아니고 뽀뽀였어요.”

웅얼거리는 말에 다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고 보니까 입술이 따뜻하고 말랑거렸던 것밖에 기억이 안 나는 걸 보니, 확실히 키스가 아니라 뽀뽀만 한 것 같았다. 떠오르니 다시 황당해졌다. 무슨 슬라임도 아니고, 입술이 어떻게 그렇게 말랑한 건지.

“당연히……. 저도 좋은데, 저는 진짜 그거랑 이거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선배님이랑 뽀뽀하는 건 진짜 너무 좋은데……. 저는 지금 이게 문제가 아니라……. 아니, 물론 뽀뽀해서 많이 나아지기는 했는데, 이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그냥 아주 잠깐 불안을 덮어 두기만 하는 거잖아요.”

도대체 정우진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불안하다고 하니까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일단 들어 보기로 했다.

“뭐가 불안해?”

나는 딱히 정우진을 불안하게 한 적이 없었는데. 바빠도 꼬박꼬박 만나고, 시간 날 때마다 전화하고 문자도 하고, 심지어 어제는 영상 통화까지 했다. 나는 그거 때문에 잠도 못 자고 꿈에서도 시달렸는데, 정작 정우진은 불안하다고 하니까 나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확실히 사귀기로 하자마자 내가 바빠지는 바람에 정우진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불만이 나올 수 있는 문제였다.

“선배님.”

나는 정우진의 말을 경청할 준비를 끝마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다음 들려오는 말에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은퇴하실 생각 없으세요?”

“…….”

잘못 들었나? 갑자기 웬 은퇴? 정우진의 표정을 보니 잘못 들은 건 아닌 것 같아서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

“그럼 이민은요?”

“없어.”

“……귀농하실 생각은요?”

“없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황당하다는 나를 보며 정우진이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없으시겠죠.”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어봐?”

“하…….”

정우진은 내 물음에 대답도 하질 않고 그대로 내 위로 쓰러졌다. 너무 피곤해 보이는 한숨이라 밀어내지 않고 그냥 그대로 나도 뒤로 넘어가 침대에 누워 버렸다. 손을 뻗어 대충 닿는 곳을 토닥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두서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저는 사실 바라는 게 별로 없었거든요. 처음에는 그냥 잘 있는지 궁금해서 그것만 알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잘 지내는 거 확인하니까 대화도 해 보고 싶고, 대화해 보니까 저를 기억해 줬으면 싶었고, 기억하는 거 알고 나서는 계속 같이 있고 싶어지고……. 같이 있다 보니까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고.”

그 마음은 나도 왠지 알 것 같았다. 손가락 끝에 보드라운 머리카락이 걸려서 빙빙 돌리고 풀기를 반복하며 계속 정우진의 말을 들었다.

“저는 선배님이 한 번 만나 보자고 했을 때, 그때는 더 이상 바라는 게 없었거든요. 앞으로 선배님이 저한테 무슨 짓을 해도, 저는 더 어떻게 할 수가 없을 거 같았어요.”

왜 내가 무슨 짓을 하는 걸 전제로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뭔 짓을 한다는 거지? 덮치는 건 아닐 거 같은데…….

“나만……. 그냥, 나만 계속 불리하고…….”

“뭐가 불리해?”

“나만 손해고…….”

“…….”

정우진이 또 훌쩍거리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감도 잡히질 않아서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정우진은 얼굴을 이불에 묻은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똑바로 좀 말해 봐. 뭐가 불리하고, 뭐가 손해야?”

“아까도 진짜……. 진짜 화났는데, 갑자기……. 뽀뽀하고, 진짜 화났었단 말이에요……. 근데 막 뽀뽀……. 흑…….”

“…….”

도저히 못 참겠는지 정우진이 말을 하다 말고 점점 더 크게 울기 시작했다. 우는 애한테 계속 말을 해 보라고 할 수도 없어서 일단 그치기만 기다리려고 했는데, 정우진이 갑자기 벌떡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표독스러운 얼굴과는 상반되는 맑은 눈망울로 잠시 나를 보던 정우진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혀 넣고 해도 돼요?”

“…….”

불리하니 손해니 어쩌고저쩌고 하다가 갑자기? 술이라도 마신 걸까? 아까부터 뭔 말을 하는지도 모를 만큼 두서없이 주절거리는 게 불안했다. 하지만 딱히 술 냄새는 나지 않아서, 맨정신일 확률이 컸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며 눈만 깜빡거리다가 짧게 대답했다.

“어.”

목구멍에서 소리가 나오자마자 정우진이 다급하게 입을 살짝 벌리고 내게 다가왔다. 입술만 닿고 끝낼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준비 만반의 모습에 혀가 입술에 닿자마자 웃음이 터져 버렸다.

“하하.”

“고개 돌리지 마세요.”

“아니……. 아, 하하읍…….”

웃느라고 정신을 못 차리는 내 뒷목을 꽉 잡은 정우진이 그대로 입 안에 혀를 넣더니 입술을 붙였다. 계속 웃어서 진동이 느껴지는 게 또 웃겨서 눈물까지 찔끔 났다.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던 정우진도 기어이 웃음이 터졌는지, 눈물이 맺힌 눈매가 휘어졌다.

“참나…….”

그러더니 입술을 떼고 자기도 웃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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