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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눈으로 밤을 샌 나는 미리 맞춰 놨던 알람을 끄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
피곤해 죽겠는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
영상 통화를 하던 액정 속의 정우진이 자꾸만 떠올랐다.
얼굴, 표정, 나를 바라보던 눈빛, 말을 할 때마다 움직이던 입술, 웃을 때마다 가늘어지던 눈매와 평소보다 작고 낮았던 목소리, 뒤척일 때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솜털처럼 작고 희미했던 숨소리, 곁에 있는 것처럼 커다랗게 들리던 입을 벌릴 때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지…….
쾅!
나도 모르게 양치질을 하다 말고 화장실 벽을 주먹으로 세게 내려쳤다. 때마침 욕실 앞을 지나가고 있던 이진혁이 화들짝 놀라 내게 다가왔다.
“왜 그래, 갑자기? 귀신이라도 봤어?”
“…….”
내 옆으로 온 이진혁이 거울 속에 비치는 나를 당황한 얼굴로 보다가 뒤를 돌아보며 무언가를 찾듯 눈알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칫솔을 입에 물고 고개를 흔들다가 손이 따끔해서 고개를 숙이니 피가 나고 있었다.
진짜 씨발,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
별로 심한 건 아니고 그냥 주먹 뼈 근처 살이 살짝 찢어진 정도라 소독이니 뭐니 그런 걸 할 필요도 없었다. 손 씻고 약 바르고 밴드만 붙이고 있는데, 유노을이 내 옆을 얼쩡거리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오늘 컨디션 별로야?”
“아니, 그냥 날파리가 날아다녀서 잡으려다가 부딪친 거야.”
별로 믿는 거 같지 않는 눈치였지만, 내가 입을 꾹 다물자 유노을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때 옷을 입고 나온 김강이 내 옆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오늘 미역국 먹을까?”
뭘 먹든 딱히 상관은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유노을이 고개를 갸웃했다.
“미역국은 갑자기 왜?”
“미역이 조혈 작용을 한대.”
“조혈? 피 만들어 준대? 그럼 미역국 먹어야지. 형, 오늘 미역 많이 먹어.”
“…….”
그냥 살이 좀 찢어져서 찔끔 피가 난 거라 미역국까지 먹을 일인가 싶었지만 더 뭐라고 했다가는 피곤해질 것 같아서 알겠다고 했다.
연습실에 가는 길, 운전을 하고 있는 매니저 형에게도 유노을이 주절주절 떠들었다.
“형, 저희 오늘 미역국 먹어야 돼요.”
“미역국은 갑자기 왜? 누구 생일이야? 너희 생일은 아니잖아. 서주 생일도 아직이고.”
“서주 형 오늘 양치질하다가 날파리 잡았는데, 손에서 피 나서요. 미역국 먹으면 피 만드는데 도움이 되나 봐요.”
“다쳤다고? 심하게 다쳤어?”
매니저 형이 룸 미러로 나를 보며 말했다. 나는 밴드를 붙인 손을 보여 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냥 살짝 까진 건데, 애들이 오버하는 거예요.”
“병원 가야 되나?”
“네? 아니…….”
“그래, 형. 병원 들렀다 가자.”
“맞아. 붕대도 좀 새로 감고.”
하여튼 건수만 하나 생기면 놀리기가 바쁘다. 설마 매니저 형까지 합세할 줄은 몰랐던 터라 잠시 당황하다가 그냥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고작 주먹 좀 까진 거 가지고도 이 난리인데…….
“…….”
창밖을 보고 있자니 착잡해지기 시작했다.
새벽 내도록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던 이유는, 샤워를 두 번이나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피곤해서 그랬나? 한동안 바쁘고 힘들었던 게 뭔가 그런 쪽으로 발산이 됐던 걸까?
정우진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과 어투로 내게 말했고, 대화 내용도 딱히 특별한 건 아니었다. 정우진은 원래 내게 뭘 주지 못해서 늘 안달이었는데, 새삼스러울 것이 딱히 있었던 건가?
‘저는 언제든 준비되어 있어요.’
막을 새도 없이 떠오른 생각에 나도 모르게 질끈 눈을 감았다.
‘제 전부를 다 드릴 준비요.’
이건 그러니까 그런 뜻일 거다. 하늘의 별을 따다 줄게,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게 해 줄게 등등……. 이런 말처럼 그냥 관용적으로 하는 말.
하지만 어째서인지 그 말을 들을 때 나는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치 정우진이 자신의 모든 몸과 마음을 내게 주겠다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본인의 사랑과 정성과 마음과 몸을…….
“…….”
몸을…….
몸…….
“…….”
쾅!
차 창문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살짝 뗐다가 박치기를 하자 자기들끼리 응급실에 가야 한다며 난리를 치던 애들이 놀라서 나를 불렀다.
“뭐야? 또 왜 그래?”
“또 벌레 나타났어?”
“아니, 졸다가…….”
나는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변태 새낀가? 씨발?
아니, 물론 우리가 남도 아니고 충분히 할 수 있는 생각이기는 하지만, 뭔가 너무 뜬금없이 이러니까 나도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성욕이 강한 편도 아닌데 그걸 그런 식으로 받아들여서 혼자 이 지랄 염병을 떨고 있는 것도 너무 등신 같고…….
아니면 혹시 그동안 잘 풀지 못해서 이러는 걸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것들이 내 몸속에 차곡차곡 쌓여서 때마침 새벽에 정우진과 영상 통화를 하고 있을 때 터져 버렸던 걸까?
그래, 차라리 이쪽이 신빙성이 있었다.
그동안 계속 바쁘기도 했고,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도 분명 받았을 거라…….
“…….”
거기서는 발기를 할 게 아니라 감동받았어야 할 타이밍이었는데. 발…….
쾅!
다시 창문에 이마를 박자 이제 슬슬 애들이 정말 걱정하기 시작했다.
“형, 진짜 왜 그래?”
“아니……. 하.”
이제는 별거 아니라는 말을 할 기운도 없었다. 진짜 내가 너무 쓰레기 같고, 새벽에 자지도 못하고 샤워를 두 번이나 한 것도 너무 등신 새끼 같고, 지금 할 것도 많은데 이런 거 때문에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것도 거지 같고…….
“얼굴이 왜 저렇게 빨갛지?”
불안한 눈으로 나를 보던 이진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어디 좀 봐. 그러네? 아니, 형? 열나는 거 같은데?”
“아니야, 그냥……. 그냥 좀 생각이 많아서 그래.”
내 이마에 닿는 김강의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너무 쪽팔리고 참담한 심정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가만 보니 몸 여기저기가 몸살이라도 걸린 것처럼 찌뿌듯하기는 했다.
몸이 뜨거운 것도 그냥 내가 너무 변태처럼 굴고, 자꾸 이상한 생각만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결국 병원에 가서 열을 재어 보니 정말 감기 몸살에 걸렸다는 걸 알았다.
“형은 일단 오늘 아무것도 하지 말고 들어가서 쉬어.”
“그럼 오전 연습만…….”
“아니, 집에 가. 가서 쉬어. 무조건 최선을 다해서 휴식하고 온 힘을 다해서 빨리 나아야 해. 그거 오전 연습 좀 한다고 뭐가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것도 아니고, 지금은 차라리 빨리 낫는 게 나아.”
“…….”
이진혁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구구절절 다 맞는 말이라 뭐라 반박도 못 하고 결국 혼자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진짜 바보인가…….”
새벽에 찬물로 좀 씻었다고 감기에 걸릴 리가 없었다. 물이 얼 정도로 추운 한겨울에도 마당에서 씻은 적이 많았는데, 그때도 나는 한 번도 그런 걸로 아팠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걸 떠나서 어쨌든 몸이 아픈 건 사실이었기 때문에 심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본격적으로 바빠질 시기에 아픈 게 아니라 지금 아파서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오기 전에 사 온 죽과 약을 먹고 침대에 기어들어 가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밤을 새워서 그런지 눈을 감자마자 급격히 졸리기 시작했다.
“변태 새끼……. 씨발…….”
그러는 와중에도 또 정우진이 했던 말이 떠올라 몸이 뜨거워졌다. 열 때문인지,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술주정뱅이처럼 계속 혼자 중얼중얼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잠이 들었다.
비몽사몽 중에 방문을 열고 정우진이 들어오는 꿈을 꿨다. 몸이 너무 가볍고 공중으로 붕 뜨는 느낌이 나서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선배님, 괜찮아요?’
꿈속에서 정우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너무 표정이 좋지 않아서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려고 했는데 닿질 않았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자꾸만 멀어져서 안간힘을 다하고 있는데, 그런 나를 가만히 보고 있던 정우진의 얼굴이 불쑥 가까워졌다.
예고도 없이 입술이 눈가에 닿았다.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부드럽고 말랑했다. 나는 이게 꿈인 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그냥 정우진의 입술이 너무 아기의 손이나 발처럼 부드럽고 말랑하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놀라는 중이었다.
손으로 만져 보고 싶었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아서 최대한 닿는 걸 느끼기만 했다. 눈가를 꾹 누르고 있던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 마침내 입술에 도달했다.
느껴질 리가 없는 숨결과 온기에 나는 이게 정말 꿈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혹시 꿈이 아니라면? 진짜 정우진이 잠든 나에게 입을 맞추고 있는 거라면?
한 번 시작된 불안한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 시작했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무거운 몸을 최대한 꿈틀거리자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번쩍 눈을 뜨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앞에 있던 정우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
뻑뻑한 눈으로 천장을 보다가 혹시나 싶어 방 안을 둘러봤지만 역시나 아무도 없었다. 잠을 잘 땐 몰랐는데 깨어나니, 몸도 아프고 열 때문에 자꾸만 숨이 거칠어졌다.
다시 잠들면 같은 꿈을 꿀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다행히 금세 잠에 빠져들면서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났다. 좌우로 흔들리는 침대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있자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졌던 정우진이 연기 속에서 나타났다.
손가락 끝이 뺨에 닿는 순간, 삐리릭 하고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꿈속에서 깨어나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니, 씨발…….”
뭔가 방해 받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 몽롱한 정신에도 짜증이 치밀었다. 중얼중얼 욕을 하다가 이마에 닿는 서늘한 손에 눈을 떴다.
“…….”
“…….”
분명 발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정우진이 내 앞에 있었다. 혹시 이것도 꿈인가?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구분이 가질 않아서 겨우 눈만 뜬 채 가만히 있자, 손길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뺨까지 내려왔다가 목덜미, 옷 안의 어깨까지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훑던 손이 떨어지자마자 물었다.
“꿈인가?”
“꿈 아니에요.”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어쩐지 정우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속이 많이 상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화가 난 듯도 했다. 여긴 어떻게 온 건지, 내가 아프다는 말을 혹시 들은 건지, 밥은 먹은 건지, 궁금한 게 많았지만, 이걸 전부 다 묻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눈꺼풀이 무거워서 눈을 감자 커다란 손이 내 눈가를 덮었다. 시원해서 그런지 조금 힘이 나는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영상 통화할 때 나한테 전부를 주겠다고 했던 게 무슨 뜻이었냐고 묻고 싶었는데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너 키스 해 봤어?”
눈가를 덮고 있는 손이 움찔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걸 물어보려고 했던 게 아니었는데…….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어서 다시 물었다.
“해 봤어?”
“꿈꿨어요?”
“어.”
“그럼 왜, 네?”
다급하게 되묻는 소리에 정우진의 손목을 잡아 내리고 눈을 떴다. 눈앞이 흐려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우진이 많이 당황하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잡고 있던 손목에 힘을 주고 상체를 일으키자 정우진이 자연스럽게 내 등허리를 받쳤다.
가까워진 거리에 나는 정우진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싫으면…….”
“싫으면?”
싫으면 한 대 때리기라도 하라고 하려 했는데, 저렇게 기다렸다는 듯 되물으니 그런 말도 해 주기 싫어졌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정우진의 뒷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싫어도 그냥 참아.”
밤새도록 상상했던 것처럼 입술에 입술을 꾹 누르니 꿈속에서처럼 숨결과 온기가 느껴졌다. 그건 혹시 예지몽이었던 걸까?
“너는 무슨…….”
너무 지나치게 부드러워서 견딜 수 없을 만큼 간지러웠다.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뜨자 코앞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무슨 입술이 이렇게 말랑말랑하냐? 황당하네…….”
좀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숨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