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해가 뜨지도 않은 시간에 일어나 좀비처럼 거실로 기어 나오니, 애들이 다 동태눈깔을 하고 주방에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막 씻고 나온 건지 김강이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식빵에 뭘 발라 먹고 있었다.
“형도 먹을래?”
“아니…….”
낮게 가라앉아서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하다가 어제 정우진에게 받은 비타민이 떠올라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선물 받은 거라 혼자 아껴서 먹으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애들 상태를 보니 하나씩 줘야 할 것 같았다.
정우진이 준 거니까 효과는 좋겠지.
“이거 하나씩 먹어.”
“뭔데?”
“피로 회복제 같은 건데, 엄청 좋은 건가 봐.”
“나 이거 아는데.”
죽고 싶지는 않은 건지 유노을은 망설이지도 않고 피로 회복제를 그대로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이진혁은 영어로 된 성분표를 한참 보다가 먹었고, 김강은 계속 식빵에 잼만 발랐다.
식빵을 보니까 어릴 때 정우진이 저걸 엄청 좋아했던 게 떠올랐다. 식빵을 되게 자주 먹고 있던데……. 좋아서 먹었던 건지, 아니면 먹을 게 없어서 그거라도 먹은 건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다.
나중에 만나면 한 번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대충 씻고 나오자 애들의 눈빛이 아까보다는 좀 살아난 듯 보였다.
“그거 먹으니까 좀 괜찮아?”
“응, 좋아.”
이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유노을은 뭐라고 대답하려다가 내 옆으로 오더니 갑자기 어깨동무를 하며 작은 목소리로 귓속말을 했다.
“정우진이 줬어?”
어떻게 알았지? 근데 유노을이 정우진 얘기를 하니까 갑자기 어젯밤 들었던 선라이즈가 떠올랐다. 유노을이 사실은 재벌가라는…….
“…….”
이걸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질 않자 유노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아니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뭐야? 그게 무슨 반응이야? 내가 못 물어볼 거라도 물어봤어?”
그런 거 아니라고 하려는데, 장인처럼 식빵에 잼만 계속 바르고 있던 김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형, 그런 것 좀 물어보지 마. 안 그래도 서주 형 부끄러움도 잘 타는데.”
“내가 무슨 부끄러움을 타?”
“아니야, 미안.”
“뭔 소리야? 야! 식빵을 먹을 거면 먹고, 말 거면 말아! 뭘 아까부터 자꾸 잼만 바르고 있어!”
접시에 잼 바른 식빵 탑을 쌓고 있는 김강을 보며 버럭 고함을 지르자 가만히 있던 이진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형은 왜 애한테 소리를 질러?”
“아니, 아까부터 먹진 않고 자꾸 잼만 바르고 있으니까…….”
괜히 민망해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던 거라 헛기침을 하며 변명하고 있는데, 김강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잼 나이프를 들고 있는 손도 멈춘 상태라, 나는 만주 벌판 같은 김강의 너른 등을 토닥거리며 달랬다.
“아니야, 너 먹고 싶은 대로 먹어. 많이 발라 먹어.”
“형은 왜 나한테만 뭐라 그래?”
“내가 아직 잠이 덜 깨서 그래. 많이 먹어. 다 먹어, 너.”
나는 김강이 쌓아 둔 식빵을 얼른 하나 집어 그의 입에 퍽 쑤셔 넣었다. 처음에는 안 받아먹으려 하더니 이내 한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는 걸 보고 한숨을 내쉬며 나갈 채비를 했다.
“형, 다 했어?”
“어, 매니저 형 오셨대?”
“지금 주차장에 도착했대.”
옷을 대충 입고 나오자 김강이랑 유노을이 그사이에 식빵을 세 봉지나 먹어 치운 상태였다. 좀 남았으면 나도 먹으려고 했는데, 빵 부스러기 하나도 남지 않았다.
승강기를 타고 애들과 함께 내려가 차에 타자, 매니저 형과 낯선 사람이 보였다. 카메라를 들고 있어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일단 인사하며 눈치를 보자 운전석에 있던 매니저 형이 돌아보며 말했다.
“이거 뮤비 비하인드 찍는 거.”
“아, 지금부터 찍어요?”
“일단 오늘 하루 종일 찍긴 다 찍을 거야. 그중에서 편집할 거니까 그냥 평소처럼 편하게 해.”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문득 애들이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자 막대 사탕을 먹고 있던 김강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고, 이진혁은 면접을 보러 온 사람처럼 정자세로 앉아 허옇게 질려 있었다.
그나마 평소와 비슷한 게 유노을이었다.
“…….”
나도 카메라 울렁증이 좀 있기는 하지만,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는 이진혁을 보고 있자니 반대로 마음이 좀 편안해졌다.
어쨌든 정말 갈 길이 멀어 보였다…….
***
이진혁은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으러 숍에 들어온 뒤로 인사 말고는 한마디도 하질 않았다. 처음에는 좀 긴장을 한 것 같던 김강은 이내 카메라가 없는 것처럼 행동했고, 유노을은 마치 자기 브이로그를 찍는 것처럼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인터뷰하기도 했다.
“우리 어나더의 맏형, 비싼 피로 회복제를 가지고 다니는 남자, 밥 먹을 때 밥멍을 자주 하는 남자, 마스크만 끼면 아무도 자기를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하는 강서주 씨, 여기 보고 인사 좀 해 주세요.”
“…….”
나는 유노을이 불쑥 내미는 카메라를 보며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지금 날 먹이는 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숨을 한 번 삼킨 나는 일단 고갯짓을 하고 말했다.
“안녕하세요.”
“지금 뭐 하고 계시죠?”
“머리요.”
“대답을 왜 그렇게 짧게 하시죠? 인터뷰하기 싫으신가요?”
“그건 아닙니다. 근데 인터뷰를 왜 그쪽이 하시죠?”
“그럼 그쪽이 하실래요?”
“형한테 그쪽이라니요?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혹시 꼰대세요?”
유노을이랑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는데, 김강이 슬쩍 오더니 물었다.
“사탕 먹을 사람?”
“저요.”
“난 됐어.”
유노을이 손을 번쩍 들었고,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김강이 미간을 구기고 내게 물었다.
“형, 아까 식빵도 안 먹더니 왜 사탕도 안 먹어? 어디 아픈 거 아니야?”
“우리 맏형은 피로 회복제 먹어서 배가 부르시대.”
“아……. 진혁이 형, 사탕 먹을래?”
아니, 왜 납득하고 가는 건데? 미련도 없이 등을 돌리는 김강을 황당한 눈으로 보다가 유노을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아까부터 자꾸 피로 회복제 얘기를 하는 걸 보니 날 열 받게 하려는 게 확실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웃으며 말했다.
“저기요.”
“네?”
“잠깐 카메라 좀 꺼 보실래요?”
“헐, 왜요?”
“아니, 할 말이 좀 있어서요.”
“죄송한데, 제 신변 보호를 위해서 그럴 수는 없겠어요.”
그때 김강에게서 받은 사탕을 까먹으며 이진혁이 우리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걸 보자마자 유노을과 나는 동시에 터져 버렸다.
“왜 웃어?”
이진혁이 덩달아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물었다. 유노을은 카메라를 이진혁 쪽으로 돌리더니 물었다.
“이제 좀 긴장이 풀리셨어요?”
“아……. 네.”
아, 유노을 저 멍청이, 진짜. 겨우 긴장을 푼 사람에게 긴장 풀렸냐고 물어보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질문은 없는데. 다시 눈에 띄게 긴장하기 시작한 이진혁을 보며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는데, 사탕을 한 주먹 가지고 오는 김강에게 유노을이 물었다.
“저희 리더 형님께서는 굉장히 섬세하셔서 큰일을 앞둘 때면 긴장을 많이 하시는 편이에요. 그렇죠?”
“그래도 지금은 많이 나아진 거 아니야? 우리 데뷔할 때 진혁이 형 토했잖아.”
“아니, 무슨 소리를 하세요? 토하기는 누가 토해요? 왜 이렇게 말을 지어 냅니까? 좀 긴장해서……. 그, 뭐냐. 그, 속이 좀 울렁거리기는 했는데 제가 뭐를 막……. 막 그렇게 뱉지는 않았어요!”
얼굴이 벌게진 이진혁이 버럭 고함을 지르자 유노을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번에도 많이 긴장하신 것 같은데, 토 주머니 같은 거라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바닥에 뱉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형, 급하면 여기다가 해.”
김강이 자기 티셔츠 자락을 잡아 둥글게 바구니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며 말했다. 그 살신성인의 모습에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강이밖에 없네. 형 생각도 해 주고.”
“나는?”
유노을이 대뜸 물어서 웃으며 말했다.
“그쪽은 일단 카메라부터 좀 꺼 보세요.”
“형, 여기다가 시늉이라도 해 봐. 연습 미리 해 놔야지.”
“연습은 무슨 연습이요? 토하는 연습을 하라고요? 제정신이세요?”
“연습만이 살길이라며?”
“아니, 그건 우리 이번 앨범! 하, 진짜……. 저리 가!”
“나도 빨리 노을이밖에 없다고 해 줘!”
오디오 겹치게 왁왁거리는 애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영상 편집을 할 사람이 불쌍해지기 시작했다.
***
이번 컴백곡인 4SEASON은 인생을 사계절에 빗댄 감성적인 곡으로, 각각 서로 맡은 계절이 있었다. 유노을이 봄, 김강이 여름, 내가 가을, 그리고 이진혁이 겨울이었다.
“너무 많이 비치는 거 아니야?”
가장 먼저 김강이 개인 촬영을 하는데 컨셉이 여름이라 그런지 흰색 면 티에 젖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당연히 살갗이 비쳐서 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하자 이진혁이 내 말에 동의했다.
“그러게, 어린애를 저렇게 다 적시고 벗기고…….”
쟤 설마 어제 새벽에 운동하던 게 이거 때문이었나?
본인은 근육 자랑할 생각에 신이 났는지 한쪽 팔을 올려 유노을에게 이두박근을 자랑하고 있었다.
“형, 내 알통 봐.”
“야, 왜 이렇게 단단해?”
“다 근육이니까. 매달려 볼래?”
유노을이 펄쩍 뛰면서 매달렸지만, 김강은 전봇대처럼 꿈쩍도 하질 않았다. 저걸 보고 있자니 터미네이터 같기도 하고, 단단해 보이는 게 돌하르방 같기도 하고…….
“촬영 시작할게요!”
스태프의 말에 김강이 촬영을 시작했고, 우리는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오늘 하루 안에 재킷 촬영과 프로필 사진, 뮤직비디오까지 다 찍어야 해서 굉장히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 핸드폰을 확인하자 정우진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오늘 촬영 힘내세요. 파이팅! 바빠도 굶지 마시고 너무 힘들면 쉬어 가면서 하세요. 혹시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 주시고요. 정말 아주 잠깐이라도 10초만 통화해도 되니까 심심하면 전화나 문자 해 주세요. 안 심심하고 그냥 보고 싶을 때 해도 돼요. 할 말 없이 숨소리만 듣고 싶을 때 해도 되고요. 혹시 저 보고 싶으면 말해 주세요. 그냥 몰래 가서 눈만 마주치고 집에 갈게요. ๑❤‿❤๑]
얜 이런 이모티콘을 어디서 찾아오는 걸까? 문득 궁금해져서 인터넷에 귀여운 이모티콘을 검색하다가 나도 적절한 걸 발견해서 답장을 보냈다.
[너도 밥 챙겨 먹어. ( ・ิ ͜ʖ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