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A와 B의 사이-152화 (157/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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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후회를 하든 말든 어차피 출연은 결정된 일이기 때문에 이제는 무를 수도 없었다. 녹화 날짜가 빠르게 잡혔고, 그사이에 나는 컴백 앨범 녹음도 하고 연습도 하다가 스타 플렌들리 최근 방송도 몇 개 봤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금방 지나 녹화 날이 되었다.

“미리 드린 대본은 좀 읽어 보셨어요?”

“네, 봤어요.”

“주영 선배님이 대본 이외의 질문도 몇 개 할 텐데, 그냥 성향이 그런 거니까 너무 당황하지는 마세요. 대본을 보셔도 대본대로 잘 안 하시거든요.”

녹화 시작 전에 두 명의 mc 중 한 명인 들찬이 웃으며 말했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X-mas라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인데, 입담도 좋고 솔직해서 최근에 예능 쪽으로 두각을 드러내다가 고정 mc까지 맡게 된 걸로 알고 있다.

“말씀 편하게 하세요, 선배님. 제가 한참 후배인데.”

“아, 그럴까?”

“네, 막 대하셔도 돼요.”

막 대할 마음은 별로 없어서 그냥 어색하게 웃고 있는데, 잠시 자리를 비웠던 정우진이 들어왔다.

“어디 갔다 와?”

“잠시 통화 좀 하러요. 뭐 하고 계셨어요?”

“그냥 얘기 중이었는데.”

“아, 주영 선배님이 대본대로 잘 안 하시거든요. 그래서 혹시나 당황하지 마시라고 그 얘기 중이었어요.”

들찬이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우진이 내 옆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선배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서주 선배님도 말씀 편하게 하시기로 했거든요. 그쵸?”

“응.”

내 대답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갑자기 날 왜 저런 표정으로 보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나도 덩달아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들찬이 고개를 갸웃하는 걸 보며 나는 말을 돌렸다.

“아, 오늘 아침에 강이한테 들었는데 같은 헬스장 다닌다며?”

“네! 들으셨어요? 안 그래도 저도 어제 강이 형 만났는데 선배님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형 잘 부탁드린다고. 그래서 제가 걱정은 붙들어 매라고 했죠. 저만 믿으세요.”

덩치만 컸고, 생전 어린애 같던 김강이 형이라는 소리를 들으니 어색하기도 하면서 웃겼다. 제 가슴을 탕탕 치면서 능글맞게 말하는 들찬을 보며 웃고 있는데, 대기실로 사십 대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스타 프렌들리의 메인 mc인 서주영이었다.

“아이고, 안녕하세요.”

서주영이 활짝 미소 지으며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한 뒤 다시 착석한 우리는 가볍게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커피도 마시다가 녹화를 시작했다.

정우진 걱정을 많이 했는데, 조금 전 들찬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날 쳐다본 것 이외에 딱히 특이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표정이 좀 굳어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저 정도면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 내가 누굴 걱정할 처지는 아닌데……. 녹화 들어가려고 하니 긴장이 됐는지 목이 말라서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어떻게 알고 정우진이 뚜껑을 딴 물병을 내게 건넸다.

그걸 받아 벌컥벌컥 마시는데, 정우진이 내 쪽으로 고개를 숙여 귓속말로 물었다.

“언제 친해졌어요?”

입 안에 물이 있어서 고개를 돌려 의문의 표정으로 정우진을 쳐다봤다. 그러자 정우진이 고개를 틀어 다시 내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을 원래 그렇게 막 불러요?”

뭔 소리를 하는 거지? 입 안에 있는 물을 삼키고 뭐라고 하려는데, 정우진 옆에 앉은 서주영이 우리를 보더니 웃었다.

“두 분 뭘 그렇게 속닥거리고 계세요?”

“아, 하하.”

나는 가볍게 정우진을 밀어내며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많이 긴장되나 봐요.”

“긴장된다는 얘기를 그렇게 귓속말로 하세요?”

“그러니까요. 말도 크게 못 하겠나 봐요.”

등 뒤로 식은땀이 삐죽 흐르는 걸 느끼며 나는 계속 웃기만 했다. 힐끗 정우진을 보니 대답을 요구하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살짝 손을 뒤로 빼서 정우진의 허리 부근을 뾰족하게 만든 주먹으로 퍽퍽 쳤다.

스태프가 우리에게 마이크를 채워 주고, 들찬이 내 옆에 앉자 드디어 녹화가 시작됐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녹화는 스튜디오에서 진행됐다. 정우진과 내 양옆으로 서주영과 들찬이 앉고, 우리 앞으로는 카메라가 잔뜩 있었다.

“스타 프렌들리, 스프레드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와아아!”

들찬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팔을 풍차처럼 돌리면서 야단법석을 떨어 댔다. 그 충격적인 광경에 당황해서 주춤하자, 서주영이 들찬의 등을 때리며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앉으세요, 빨리. 뭐 하는 거예요, 놀라시잖아.”

“아니, 저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많이 놀라셨죠? 죄송해요. 저희 애가 좀 금방 불타오르는 편이라서요.”

들찬은 가볍게 숨을 고르며 잔뜩 뛰어놀다가 잡힌 대형 개처럼 자리에 앉았다. 그걸 보니 뒤늦게 웃음이 터졌다.

“아, 네. 보통은 좀 단계적으로 서서히 불타오르지 않나요?”

“보통은 그런데, 들찬 씨는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이라 급발진을 잘해요. 녹화 중에 놀라실 때가 많을 테니까 미리 마음의 준비를 좀 해 두시는 걸 추천해요.”

“네, 알겠습니다.”

스태프들까지 다들 한바탕 웃다가 서주영이 자세를 고치고, 카메라를 가볍게 가리키며 말했다.

“자, 그러면 시청자분들께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그 말에 나와 정우진의 눈이 마주쳤다. 왠지 먼저 하라는 듯한 눈빛이라 고개를 돌려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어나더 원입니다.”

“안녕하세요, 배틀 브라더스 세가온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 정우진이 뒤따라 소개를 했다. 그러자 mc들이 다시 박수를 치며 인사했다.

“아, 그런데 들어가기에 앞서서 제가 궁금한 게 있어요. 두 분 섭외하는데 저희 스태프들이 정말 큰 난항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서주영이 초장부터 대본에 없던 질문을 했다.

“맞아요. 저도 들었어요. 제가 알기로는 원래 섭외가 불발됐었다고…….”

들찬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말끝을 흐리며 우리를 쳐다봤다. 그 말에 뭐라고 하려는데 정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제가 해외 스케줄 갔다가 부상을 당해서…….”

“아, 저도 그거 기사 봤어요. 많이 다치신 거예요? 지금은 괜찮으신 거 맞죠? 어딜 다치셨던 거예요?”

“그냥 손가락 좀……. 지금은 괜찮아요.”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하지 말자고 해서 안 한 거라, 나도 얼른 덧붙였다.

“그리고 저도 앨범 준비 때문에……. 서로 시간이 잘 안 맞았는데, 이번에 어떻게 맞게 돼서 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아, 앨범 준비라면……. 혹시 컴백하시는 거예요?”

컴백 앨범 이야기는 사전에 받았던 질문지에 있던 내용이라 준비했던 대로 대답했다.

“네, 지금 저희 회사 분들이랑 멤버들끼리 열심히 준비 중이고…….”

외웠던 내용을 읊는 거라 그럴까? 내가 생각해도 좀 딱딱하게 말한 것 같았지만, 그럴 때마다 옆에서 추임새를 넣어 주는 들찬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외에도 근황이라든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옆으로 샐 때도 있었지만, 분위기가 워낙 편하고 재미있어서 금세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두 분을 이렇게 모셔 놓고 저희가 오남자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죠.”

“맞아요, 저도 그거 완전 좋아했어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본방 사수했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오남자가 올해 하반기 예능 최고 시청률 찍은 걸로 알고 있는데, 맞죠?”

들찬의 물음에 서주영이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하반기가 아니라 제가 알기로는 올해 최고 시청률일걸요?”

“헐, 대박! 진짜요? 하반기가 아니라 그냥 올해? 와우.”

“시청률 제일 높았던 게 마지막 편인데, 그게 아마 20프로 넘은 걸로 알고 있는데.”

“1편 시청률이 6프로 대였나? 그랬는데 2편부터 확 올랐잖아요. 알고 계시죠? 너튜브 같은 곳에 클립도 엄청 뜨고, 신조어 같은 것도 생겼잖아요. 선멍 이런 거. 밥멍이라고 밥 먹을 때 멍하게 있는 거 많이들 찍더라고요.”

잊고 있던 선멍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나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서주영은 박수를 치면서 웃다가 정우진에게 물었다.

“가온 씨, 혹시 그 뒤로도 선멍 자주 하시나요?”

“네, 조금 전에도 했어요.”

“정말요? 원 씨는요?”

아니, 저렇게 말해도 되나? 당황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면서 몇 번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겨우 대답을 찾았다.

“저는……. 밥멍을 많이 해요.”

“아, 밥멍 하니까 생각난 건데 오남자에서 선배님 드시는 것도 엄청 화제였잖아요. 그때 방송하면서 꽤 많이 드신 걸로 알고 있는데, 팬분들은 그거 보고 우리 서주 왜 굶기냐고 엄청 뭐라고 하시더라고요.”

다행히 주제가 금방 넘어가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웃었다.

“아마 평소에 제가 많이 먹다 보니까……. 방송할 때도 많이 먹기는 했는데.”

“어나더 멤버분들이 다들 엄청난 대식가시라면서요?”

“네, 특히 강이랑 노을이가 무지 먹어요. 저랑 진혁이가 좀 비슷하게 먹고…….”

내 말에 서주영이 정우진을 보며 물었다.

“반대로 가온 씨는 엄청 과식했다고 또 팬분들이 걱정하셨어요. 패스트푸드나 인스턴트 음식 같은 거 원래 잘 안 드신다면서요?”

“자주 먹지는 않고 그냥 가끔 먹어요.”

“싫어하세요?”

“싫어하는 건 아니에요.”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근데 생각해 보니까 저번에 술 마실 때 정우진한테 그런 거 왕창 먹였던 거 같은데…….

정우진이 대답하는 동안 고개를 끄덕이며 아주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데, 들찬이 허리를 살짝 숙여 뭔가를 의자 밑에서 꺼내며 말했다.

“제가……. 좀 찾아본 게 있는데…….”

들찬이 꺼낸 건 얼마 전 정우진과 함께 술을 마실 때 찍혔던 사진이었다. 멀리서 줌을 당긴 건지 살짝 흐리긴 했지만, 정우진이 내 등 뒤에 매달려 있는 그 사진이 아닌가.

“하.”

그걸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손으로 눈을 덮으며 허리를 숙였다.

“며칠 전에 이런 기사가 떴어요.”

“이게 뭐예요?”

“선배님, 모르세요? 이거 완전 난리 났었잖아요. 선배님 두 분이서 같이 술 드시다가 찍힌 거 같은데……. 그쵸?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저희가 아주 살짝만 들어 볼 수 있을까요?”

들찬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고 상체를 세우자 정우진이 갑자기 대놓고 손으로 제 입을 가린 채 내게 귓속말을 했다.

“저거 말해도 돼요?”

“전부 다는 말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서주영이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두 분 뭐 하세요?”

그러자 들찬도 덩달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까요. 두 분이 오남자에서도 자주 귓속말을 하시더라고요. 마이크 때문에 어차피 다 들리는데……. 저기, 이거 다 들려요.”

들찬이 내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더니 귓속말로 말했다. 분명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나도 내가 왜 자꾸 이러는지 모르겠다. 정우진도 예능 경험이 별로 없다 보니 자주 잊는 것 같았다.

“아니, 아까도 녹화 전에 두 분이서 귓속말을 하고 계시더라고.”

“정말요? 아까도요?”

서주영의 말에 들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딱히 할 말도 없고 뭐라고 덧붙여 봤자 괜히 그림만 이상할 것 같아서 뒷목을 긁으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 다 들리죠? 야, 다 들린대.”

“네, 다음에는 더 작게 말할게요.”

“아니, 작게 말해도 다 들려. 그냥 귓속말을 하지 말라고.”

“그럼 뭐 물어보고 싶을 땐 어떡해요?”

“녹화 끝나고 물어보면 되잖아.”

“당장 대답해야 하는 건요?”

순간 울컥했지만 나는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앞을 봤다.

“그 사진이 어떻게 된 거냐면…….”

“하하! 아니, 지금……. 하하하.”

서주영이 옆에 있던 정우진을 힐끔 보더니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덩달아 들찬도 불퉁한 정우진의 표정을 보며 웃었지만, 나는 꿋꿋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저희가 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아. 원래 술을 자주 마시지는 않아요. 거의 제대로 술자리를 가진 건 이게 처음이고……. 아무튼 술 마시다가 뭐 좀 다른 게 먹고 싶어서 편의점에 간 거거든요. 그때 아마 제 기억으로는 우유랑…….”

“아니, 아니. 그거 말고. 업은 건 어떻게 된 거예요?”

“아, 그건……. 비밀이에요.”

“네? 비밀이요?”

놀란 눈으로 되묻는 서주영과 들찬을 보며 다시 뭐라고 하려다가 나는 눈을 질끈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비밀이라고 말하면 더 이상하지 않나? 당황한 나는 급하게 말을 바꿨다.

“아, 사실 비밀이 아니라 가위바위보 져서 제가 업은 거예요.”

“예?”

“제가 가위바위보해서 져 가지고…….”

“아니, 무슨 소리를 하세요! 지금 지어내신 거 아니에요? 아니, 누가 봐도 지금 막 지어낸 거네!”

서주영이 큰 소리로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삿대질을 했다. 그러자 들찬이 웃으며 서주영을 말렸다.

“선배님, 그래도 그렇게 삿대질하시면……. 물론 저도 거짓말 같기는 한데!”

“…….”

나는 사색이 된 얼굴로 박장대소하는 둘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힐끔 정우진을 쳐다봤다. 정우진도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던 건지, 순간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본 정우진이 입술을 꾹 다물더니 의자를 뒤로 돌려 카메라를 등진 채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스태프들이 웃는 소리까지 나기 시작했고, 스튜디오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원 씨! 서주 씨! 진짜 뭐가 있었던 거예요? 왜 그렇게 수상하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도대체!”

“아니……. 잠시만요. 웃지 마세요, 제가 말실수한 건 맞아요. 근데 진짜 생각하시는 그런 게 아니라…….”

“저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네?”

“저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데요?”

“…….”

차마 내 입으로는 그 생각을 말할 수 없어서 입을 다물자 서주영이 다시 푸흐흡 하면서 터졌다.

“파하하하학!”

그러자 들찬이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다시 웃기 시작했다. 파도타기처럼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웃음에 너무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정우진을 툭툭 건드렸다. 그러자 혼자만 딴청을 부리고 있던 정우진이 다시 똑바로 앉더니 정색하며 눈물을 닦고 있는 서주영에게 말했다.

“이건 저희 사생활이니까 더 이상 질문하지 마세요.”

“흐흐흑…….”

들찬은 웃다 못해 이제는 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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