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1화 (156/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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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진이 같이 들어가 준다고 하는 걸 겨우 말려서 집으로 보낸 뒤, 나는 벌써 20분째 현관문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문고리만 노려봤다. 계속 여기에 이러고 있을 수도 없어서 심호흡을 하며 정말 들어가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정우진에게 문자가 왔다.

[애기 집에 도착했어요^.^]

“…….”

그걸 보는 순간 다시 온몸에서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진짜 어떡하지? 그냥 뛰어내릴까?

“하……. 하하…….”

실성한 것처럼 웃고 있는데, 현관문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화들짝 놀라 나도 모르게 도망가려고 하는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메로나랑……. 으악!”

뭐라고 중얼거리면서 나오던 유노을이 나를 보는 순간 비명을 질렀다. 덩달아 놀랐지만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방금 도착한 사람처럼 굴었다.

“뭐야? 무슨 메로나?”

“편의점……. 언제 왔어? 왜 거기에 그러고 있는 건데? 놀랐잖아.”

“뭘 그러고 있어? 방금 왔는데. 아무튼 나 씻고 연습실 간다.”

“갑자기? 그럼…….”

나는 유노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으로 쑥 들어가 애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옷을 벗으며 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급하게 입을 옷을 챙긴 뒤 곧장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형! 밥 먹었어?”

욕실 문을 닫자마자 김강이 큰 소리로 물었다. 나는 안에서 숨을 죽이고 있다가 대답했다.

“어, 먹었어! 나 씻고 바로 연습실 갈 거야!”

사실 오기 전에 씻었지만 한 번 더 씻었다. 머리도 감고 세수도 하고, 유노을이 평소에 쓰던 팩까지 얼굴에 바르고 최대한 오랫동안 샤워를 한 후, 밖으로 나오자 애들이 거실에 나란히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게 보였다.

“왜 이렇게 오래 씻어?”

“내 마음인데? 나 바로 연습실 갈 거야.”

“연습실에 뭐 두고 왔어? 왜 자꾸 그 말만 해? 우리도 같이 가려고 기다리고 있잖아.”

“그럼 먼저 가 있어. 나 옷만 입고 바로 갈게.”

제발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며 말했지만, 우리 애들은 의리 빼면 시체인지라 역시나 내 말은 듣지도 않았다.

“됐어, 그냥 같이 가게 옷 입고 나와.”

“그래, 그럼…….”

멋쩍은 표정으로 방에 들어가 준비를 했다. 평소엔 대충 털어 말렸던 머리도 먼지가 날릴 정도로 바싹 말리고 얼굴에 로션도 여러 겹으로 바르고 있는데, 이진혁이 방문을 열고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다 했어?”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즐기는 게 맞지 않을까?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이런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닐 텐데. 술 마시면 누구나 실수 한 번쯤은 하잖아. 나 정도면 양호한 거 아닌가? 그냥 문자 몇 통 보낸 게 전부인데, 이게 그렇게 민망한 일인가?

물론 민망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을까 말까 고민할 정도는 절대 아니었다. 어쩌면 애들은 아무런 관심도 없고 생각도 나지 않는데, 나 혼자 이렇게 난리 염병을 떨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그래, 나만 당당하면 뭐가 문제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며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자 애들이 현관문 앞에서 신발을 신고 있는 게 보였다. 나도 당당하게 걸어가 신발을 신으려고 하는데, 김강이 바닥에 앉아 유노을에게 솥뚜껑만 한 발을 내밀었다.

“애기 신발 신겨 줘.”

“오구오구, 우리 애기 신발 신겨 주까?”

“웅.”

“…….”

예고도 없이 시작된 연기에 귀를 막을 새도 없었다. 눈앞에서 펼쳐진 참극에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나는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머리부터 떨어지다가 정우진처럼 나를 받아 줄 사람이 없다는 걸 깨닫고 손으로 살짝 바닥을 짚은 뒤 안전하게 넘어졌다.

“나 오늘 일할 기분이 아니니까 그냥 너희끼리 가라…….”

참담한 심정으로 중얼거렸지만, 이진혁이 내 팔뚝을 잡아 억지로 일으켜 세우더니 냉정하게 말했다.

“안 돼, 오늘 할 거 많아.”

“나 정말 죽고 싶다, 진혁아.”

“견뎌. 정신력으로 이겨 내.”

“못 하겠다고, 진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우는소리를 내고 있는데, 이진혁이 기어이 나를 끝까지 일으켜 세워 신발까지 신겼다.

“애기, 오늘 떡볶이 먹고 싶어.”

“애기가 매워서 떡볶이를 어케 머거?”

“애기는 매운 거 조아.”

저 씨벌 새끼들……. 두 애기들의 발연기에 눈물을 찔끔 흘리고 있는데 이진혁이 내 등을 두드렸다.

“애기야, 힘내자.”

“…….”

죽는 것밖에는 답이 없어 보였다.

***

저놈의 애기라는 소리를 언제까지 들어야 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일정이 워낙 빡빡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보니 장난을 칠 겨를도 없었다.

이번 컴백곡은 이진혁이 작사 작곡한 노래이기 때문에 녹음할 때 자연스럽게 프로듀싱에도 참여했다. 컨셉 회의에서는 유노을이 발표한 안이 채택되기도 해서 많은 부분을 자체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여러 사람들이 도움을 주기는 했지만, 오랜만이기도 했고 사실상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컴백이니 만큼 이번 앨범에 사활을 걸고 하는 분위기였다.

김강은 워낙 피지컬이 좋아서 그런지 원래도 화보 작업을 많이 했었다. 우리가 가장 일이 없을 때 김강이 간간이 화보 찍고 런웨이에 서서 번 돈으로 생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고 일이 엄청 많은 건 또 아니지만, 예전부터 지금까지 끊이질 않고 조금씩 들어왔기 때문에 앨범 준비를 하는 지금도 같이 병행하는 중이었다.

그러는 사이, 나는 정우진과 동반 예능 출연 제의가 수차례 들어왔지만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앨범 준비 때문에 바빠서 그런 건 절대 아니었고, 오두막집 남자들이 방송될 때 봤던 정우진의 행동들 때문이었다.

표정이나 몸짓, 말투 같은 걸 보면 예민하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이상함을 느낄 정도라고 생각했다. 정우진은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고, 주의를 줘도 금방 표정이 풀어지고는 해서 함께 방송하는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정말 혹시라도 이상함을 느낀 누군가가 마음먹고 파고든다면 루머는 걷잡을 수 없이 퍼질 테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정우진과 나는 지금처럼 편안하게 만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이런저런 걱정들 때문에 예능 출연은 전부 고사하고 있는 상태였다. 다행히 정우진도 내가 싫다는 걸 두 번은 권유하지 않아서 본의 아니게 나만 날백수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생활하는 중이었다.

“…….”

숙소에서 청소기를 돌리다가 진지하게 생각을 해 봤다.

지금 내가 이렇게 일을 가리는 게 맞는 걸까? 사실 나는 지금 닥치는 대로 일해야 하는 게 맞는 상황이었다. 정우진을 동반하지 않은 개인 스케줄도 몇 개 있기는 했지만, 이제는 그런 것도 점점 떨어지는 추세였다.

근데 진짜……. 정우진이 방송은 신경도 쓰지 않고 나만 보면서 실실 웃고 있을까 봐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생방송이 아닌 녹화 방송이라고 해도 우릴 보고 있는 스태프들도 많을 테고, 같이 출연하는 다른 연예인들도 분명 있을 텐데…….

이 바닥은 비밀이 없어서 정말 한 명에게라도 들킨다면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따지면 조심을 해야 하는 게 맞았지만, 한 번 떠나간 기회라는 건 다시 돌아오지 않아서 이게 정말 고민이었다. 언제 다시 이렇게 주목 받을지 모르는데……. 어쩌면 이게 내 연예인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고.

“…….”

게다가 애들을 보기에도 미안했다. 사실 연애가 금지된 상황에서 몰래 연애를 하고 있는 건데, 그거 때문에 일도 안 한다고? 들킬까 봐?

“진짜 미쳤네.”

다시 생각해 보니까 정말 정신 나간 짓이 아닐 수가 없었다. 내가 정우진을 단속하든 어쩌든 해서 지금은 일을 하는 게 맞았다. 나는 들고 있던 청소기를 내던지고 핸드폰을 찾아 곧장 정우진에게 전화했다.

-네, 선배님.

“뭐 하고 있었어? 지금 통화 괜찮아?”

-당연하죠. 저 지금 뭐 좀 듣고 있었어요.

뭘 듣고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 일단 넘어갔다.

“네가 저번에 말했던 토크 예능 있잖아. 그거 거절했어?”

-스타 프렌들리요? 왜요?

“그거 그냥 나갈까?”

-저는 상관없는데, 안 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 물음에 나는 내가 방금 했던 생각을 정우진에게 말했다. 말을 하다가 새삼 깨달은 건데, 나는 원래 이런 개인적인 이야기나 속에 있는 마음을 남들에게 말하는 걸 정말 어려워했는데, 정우진에게는 왜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건지 약간 의아하기는 했다.

-혹시 일 안 한다고 눈치 주거나 그래요?

“뭐? 아니, 절대 아니지. 그럴 애들은 아니야. 그리고 지금 앨범 준비 중이라서 사실 거기에만 집중해도 되긴 하는데……. 그냥 또 언제 이렇게 섭외 제의가 올까 싶기도 하고.”

솔직하게 말하자 조금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던 정우진이 다행히 풀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같이할까요? 아직 거절은 안 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근데 녹화 날짜가 좀 급하긴 해서 만약 한다고 하면 이번 주 안으로 스케줄 잡힐 거 같아요.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긴 했지만, 어차피 할 것도 별로 없고 놀아서 뭐 하나 싶어서 그냥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급하게 예능 출연을 결정하자마자 기사가 떴고, 나는 정우진을 만나 마치 세뇌를 시키듯 신신당부했다.

“티 내면 절대 안 돼.”

“당연하죠. 저도 그 정도 생각은 있어요.”

“당연하다고 말은 하지만,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다 티가 난다고.”

오두막집 남자들 방송분을 보지 않은 건지, 정우진은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걸 보니 갈 길이 먼 듯해 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우리 그냥 별로 안 친한 척을 해 볼까?”

“그럼 불화설 같은 거 나오지 않을까요?”

“그치, 그건 그렇지……. 그럼 그냥 무조건 평범한 친구인 척하자. 알았지?”

내 말에 정우진이 멀뚱멀뚱 날 보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에휴, 네 표정 보니까 앞길이 험난하다, 험난해.”

“…….”

어벙한 표정의 정우진을 보니 이게 맞는 결정인지 뒤늦게 후회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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