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51/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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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는 술도 없고, 안주로 먹을 만한 것도 마땅히 없어서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근처 편의점으로 갔다. 맥주를 마실까 하다가 소주 세 병과 과자, 만두, 어묵탕, 컵라면, 핫바 같은 걸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어묵탕과 핫바는 껍질을 조금 뜯어서 전자레인지에 넣으려고 했는데, 정우진이 작은 냄비를 가지고 왔다.

“그건 왜?”

“어묵탕 끓여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냥 전자레인지 넣고 돌리면 돼. 너 이거 한 번도 안 먹어 봤어?”

내가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정우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자레인지 돌리는 것보다 냄비에 끓이는 게 낫지 않아요? 환경 호르몬 같은 거 나오면 어떡해요?”

“다 그런 거 안 나오게 만든 거야. 그리고 이거 쥐꼬리만 한 걸 냄비에 끓이면 국물 다 졸아들겠다. 아, 이거 두 개 살걸.”

“제가 나가서 다시 사 올까요?”

“아니, 됐어.”

정우진 앞에서는 무슨 말을 못 하겠다. 근데 쟤는 이런 것도 한번 안 먹어 보고 도대체 뭘 먹고 산 거지…….

“삼각김밥은 먹어 봤어?”

“보긴 봤어요.”

“누가 먹는 걸 보긴 봤다고?”

“네.”

전자레인지 안에서 돌아가는 어묵탕과 핫바를 가만히 보다가 정우진을 돌아봤다. 정우진은 행주 같은 걸로 싱크대와 식탁을 닦고, 밖에 나와 있는 소금과 후추 통 같은 걸 급하게 치우고 있었다.

그걸 보니 조금 전, 내 눈치를 보며 담요를 접었던 게 떠올라 물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청소를 해?”

“지저분해 보이잖아요.”

“지저분하긴 뭐가 지저분해, 새집 같구만. 그냥 좀 가만히 앉아 있어.”

분주하게 움직이는 정우진을 보며 말했지만 내 말에는 대꾸도 하질 않았다. 내가 식탁 위에 술과 안주를 세팅하는 동안, 정우진은 결국 청소기까지 한 번 돌린 다음에 내 맞은편에 앉았다.

“학교 다닐 때 군것질 같은 거 안 했어?”

“잘 안 했어요. 별로 맛있어 보이지도 않고…….”

어릴 때 햄버거나 바나나우유, 군것질거리를 좋아했던 건 그냥 처음 먹어 보는 거라서 그랬던 걸까? 하긴, 저번에 만둣국 먹을 때도 만두 세 개만 넣어 달라고 한 걸 보면, 애초에 먹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소주잔에 소주를 따르다가 문득 말도 없이 나와 걱정하고 있을 애들이 떠올라서 핸드폰을 꺼냈다. 오늘 좀 늦게 들어갈 거 같고, 자장면 시킨 건 너희들끼리 먹으라고 문자를 보내고 있는데, 잠깐 사라졌던 정우진이 옷을 가지고 내 앞으로 왔다.

“선배님,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드세요.”

“편한 옷?”

얼떨결에 옷을 받아 펼쳐 보니, 위아래 세트로 된 짙은 남색의 잠옷이었다. 큼지막한 하트 무늬가 곳곳에 박혀 있는 걸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별로 안 불편한데.”

“그래도 청바지보다는 이게 더 편하지 않아요?”

그건 맞는 말이긴 했다. 확실히 불편한 건 아니었지만 엄청나게 편한 차림은 또 아닌 것 같아서 옷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두리번거리다가 안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정우진이 가스레인지 앞에서 뭘 만들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 갈아입은 건지, 그사이에 벌써 정우진도 잠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위아래로 나와 똑같은 잠옷이라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더 다가오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정우진이 나를 보며 물었다.

“계란프라이 하려고 하는데 몇 개 할까요?”

“……네 마음대로 해.”

“프라이 말고 계란말이로 할까요?”

이미 갈아입었는데 다시 벗고 내 옷을 입을 수도 없고, 정우진에게 굳이 당장 그거 벗으라고 할 수도 없어서 그냥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뜯어 둔 과자를 한꺼번에 잔뜩 잡아 입에 욱여넣고 최대한 정우진 쪽을 보지 않으려고 애썼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질 않자 정우진은 계란프라이도 하고 계란말이도 만들었다. 그리고 또 뭘 하려고 하기에 결국 손을 들어 손짓했다.

“그만하고 그냥 와. 자꾸 뭘 그렇게 만들어?”

이럴 거면 굳이 편의점에 나갔다 오지 않아도 될 뻔했다. 그냥 간단하게 먹으려고 했는데……. 근데 또 생각해 보니까 난 지금 완전 빈속이었다. 오늘 하루 종일 뭘 제대로 먹은 기억이 없었다.

정우진이 만든 따뜻한 계란말이를 먹으니 갑자기 식욕이 돌아서 젓가락질을 몇 번 하니까 금세 반이나 넘게 사라졌다. 좀 진정해야 할 것 같아서 젓가락을 내리려는데, 정우진은 이미 두 번째 계란말이를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스레인지 쪽으로 가서 프라이팬 하나를 더 꺼내 옆에서 계란프라이를 했다.

“그래도 달걀은 있어서 다행이에요.”

“이러다가 한 판 다 먹겠다.”

“한 판은 안 되고 한 열 몇 개 있는 거 같은데……. 나가서 한 판 사 올까요?”

“됐어. 근데 너도 밥 안 먹었어?”

내 물음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계란프라이와 계란말이를 커다란 쟁반에 가득 찰 만큼 만들어 식탁으로 가져온 우리는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냉장고에 진미채도 있어서 그것도 꺼내 놓고 마지막으로 컵라면에 물을 부으니 완벽했다.

“아, 갑자기 계란 파티가 됐네.”

“집에 먹을 것 좀 잔뜩 사 놔야겠어요. 선배님이 언제 갑자기 찾아올 줄 모르니까…….”

웃으며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로 말도 없이 다짜고짜 찾아올 일은 없어.”

“그냥 갑자기 오셔도 돼요.”

“됐어……. 오늘은 좀 놀라서 그런 거지. 아무튼 너는 술 마시기 싫으면 마시지 마.”

“저도 마시고 싶어요.”

잔을 들자 정우진도 냉큼 들어 내 잔에 자기 잔을 소리 나게 부딪쳤다. 한 입에 술을 털어 넣자 쓴맛이 입 안을 때리면서 부르르 몸이 떨렸다. 계란을 먹었는데도 뜨거운 술이 식도를 타고 위에 퍼지는 느낌이 그대로 났다.

“윽, 왜 이렇게 써.”

“술은 원래 쓴 거 아니에요?”

“별로 안 쓴 날도 있어.”

“알코올인데 어떻게 안 쓰지?”

정우진은 인상도 찌푸리지 않고 술을 물마시듯 한 다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정우진이 빈 잔에 술을 채워 주자마자 다시 연달아 술을 마셨다.

“왜 그렇게 급하게 드세요? 또 집에 일찍 들어가야 돼요?”

그런 건 아니지만……. 그냥 갑자기 내 속마음을 말하려니까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말하기 싫은 건 아니지만, 솔직하게 속에 있는 이야기를 한 적이 별로 없어서 민망하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그런 상태라서 차라리 취해 버리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병나발을 불어 버리고 싶었지만, 정우진은 내 행동을 따라 하려는 경향이 있어서 그럴 수는 없었다. 애들 앞에서 물도 함부로 못 마신다더니, 지금 내 꼴이 딱 그 짝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세 잔째 연거푸 소주를 마시니, 살짝 알딸딸해지는 거 같기도 했다. 원래 이 정도로 술을 못 마시는 편은 아닌데, 빈속이기도 했고 급하게 마셔서 금방 취기가 도는 것 같았다.

“이것도 드세요.”

마음이 복잡해서 별말이 없는 나를 보며 정우진이 내 입 안으로 안주를 하나씩 넣어 줬다. 계란말이도 받아먹고, 숟가락에 차곡차곡 쌓아 올린 라면도 받아먹으며 도대체 어떻게 운을 떼야 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마땅히 마음에 드는 게 없어서 그냥 대놓고 말했다.

“야, 너는…….”

“우진이라고 불러 주세요.”

“우진아, 너는 약간 문제가 있어.”

“네? 갑자기요?”

정우진이 놀란 토끼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걸 보니 한숨이 나왔다.

“무슨 문제요?”

궁금하다는 듯 묻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다시 크게 숨을 마셨다가 길게 한숨을 뱉었다.

“너는 너무 말을 안 해.”

“무슨 말이요?”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말을 안 하잖아. 그냥 네가 알아서 해결하려고 하고……. 너는 그게 문제야.”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어렸을 때의 일을 제대로 사과하고, 사실 그때 화를 냈던 건 쪽팔려서 그랬던 거라고 확실하게 말하려고 했었다. 네가 뭘 잘못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말도 없이 너를 혼자 남겨 두게 된 것도 내 자의가 아니었다고.

하지만 이렇게 술을 마셨는데도 나는 등신 새끼처럼 자꾸만 딴소리를 했다.

“어렸을 때도 나한테 먼저 이야기를 했으면 좋았잖아. 강수민 이민도, 왜 나한테 먼저 말을 안 했냐고. 이게 결국은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그건 죄송해요.”

“…….”

한숨을 푹푹 쉬면서 말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순순히 사과를 했다. 이러니까 또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멀뚱멀뚱 정우진을 보다가 술을 한 잔 마신 다음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혹시 또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제일 먼저 말하라고. 누가 괴롭히거나……. 어? 누가 돈 달라고 하거나 그러면.”

“앞으로 돈 쓸 때마다 허락 받고 쓸게요. 근데 선배님,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니에요?”

“뭘 많이 마셔, 지금 세 잔밖에 안 마셨는데.”

“네 잔째예요.”

“어쨌든.”

“네.”

지금 이 상황에서 세 잔을 마셨든 네 잔을 마셨든 그게 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술을 마실 때 몇 잔 마시는지 일일이 다 세고 마시는 게 더 이상했다.

“근데 선배님도 저한테 말을 안 해 주시잖아요.”

그때 정우진이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탁자에 팔을 올려 정우진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내가 뭐?”

“맨날 다른 생각하고…….”

“무슨 생각?”

“항상 혼자 심각한 표정으로 다른 생각하시잖아요. 왜 그러냐고 물어보면 대답도 안 해 주고. 결과적으로 강수민 문제는 저 때문이기는 했지만, 그런 문제가 있다는 걸 저한테 말 안 해 주셨잖아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잘 이해가 되질 않아서 인상을 쓰고 있다가 말했다.

“그래서 널 찾아왔잖아.”

“제가 관련된 거 알고 나서 찾아오신 거잖아요. 그 전에는 이런 고민 있다는 거 저한테 말 안 하셨어요.”

“근데 이건 그냥 내 개인적인…….”

말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화가 난 것 같은 표정에 한숨을 내쉬며 나는 허리를 세우고 등을 의자 등받이에 바짝 붙였다.

“저도 개인적인 일이라 말 안 했던 거예요.”

삐친 건지 정우진이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하며 차갑게 말했다. 사실 저렇게 말해도 별로 무섭지는 않았지만, 이건 내가 말을 너무 이상하게 한 것 같아서 고분고분 잘못을 인정했다.

“개인적인 일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깜빡했어. 계속 바쁘기도 했고.”

“저도 깜빡했어요.”

“너 왜 자꾸 따라 하냐?”

“제 마음인데요?”

“어휴, 진짜 유치한 새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소주를 한 잔 마셨다. 처음처럼 이제 쓴맛도 별로 나지 않았다. 얼굴에 열이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에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자 정우진이 물었다.

“뭐 찾으세요?”

“냉수나 한 사발 마시련다.”

“얼음물이요? 제가 드릴게요, 앉아 계세요.”

그 말에 다시 자리에 얌전히 앉자 정우진이 얼음물을 가져와 내게 건넸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니 조금은 머리가 정리되는 것 같아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제 나도 어지간한 건 다 말할 테니까 너도 이런 건 나한테 먼저 얘기를 해.”

“네, 저도 어지간하지 않은 거 말고는 다 말씀드릴게요.”

“…….”

도대체 쟤는 왜 이렇게 유치할까? 몸만 컸지, 속 알맹이는 유진이보다 더 어린 것 같았다. 내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저는 선배님이 하시는 대로 할 거예요. 저한테 다 말 안 해 주면, 저도 다 말 안 할 거예요.”

“네가 무슨 조교니?”

“무슨 조교요?”

“본 조교는 여러분이 하기에 따라 천사가 될 수도, 악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일부러 목소리를 굵게 내며 말하자 정우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걸 보니 쟤는 조교가 뭔지도 모르나 싶었다. 어디 동굴 깊은 곳에서 살다가 나온 건지…….

그때 정우진이 혼자 골똘히 뭔가를 생각하다가 나를 보며 엄격한 표정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선배님이 하기에 따라 착한 우진이가 될 수도, 나쁜 우진이가 될 수도 있어요.”

착한 우진이, 나쁜 우진이라는 말이 너무 웃겨서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웃었다. 한참 웃다가 보니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내가 크게 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살피는 게 보였다.

그걸 보며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다 말했다.

“늘 착한 우진이었어.”

“……네?”

“너는 나쁜 우진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

옛날부터 정우진은 변한 게 없었는데, 늘 내 마음만 이랬다가 저랬다가 흔들렸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 법석, 지랄 염병, 굿 보고 떡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아, 이건 아닌가.

잠깐 다른 곳으로 빠져서 가볍게 머리를 흔드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정우진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괜히 시비를 걸었다.

“네가 뭘 알겠냐, 남자의 마음을…….”

“저도 남자예요.”

“네가 뭘 알겠냐, 형의 마음을…….”

“…….”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무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정우진에게 말로 이기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 쉽지 않은 일을 내가 해냈다. 술에 취한 상태로도…….

아직 취한 건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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