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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정우진도 지금 이 상황이 그때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래서 갑자기 우는 건가? 하지만 내가 별말도 안 했는데 이렇게 갑자기 울고 있으니까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근데 너 왜 우냐?”
“선배님이 화난 거 같아서요.”
정우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며 훌쩍거렸다. 저렇게 울 정도로 내가 아는 게 싫었으면 차라리 거짓말을 하든가 그러면 됐을 텐데……. 시치미를 떼지도 않고 인정을 한 것도 웃겼다.
“화 안 났어. 그냥 좀 황당해서 그래. 이렇게 쉽게 말을 할 거면 미리 나한테 얘기라도 좀 해 주지. 그럼 나도 안 놀랐을 거 아니야.”
행동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왜 내게 아무런 말도 없이 이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때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강수민의 따까리 취급을 받으면서 쫓아다닌 것과 마찬가지였다.
강수민이 문제인가? 그 새끼만 연관이 되면 이런 문제가 생겼다.
“그러지 말라고 할까 봐…….”
그때 정우진이 변명하듯 내 눈치를 보며 웅얼거렸다.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이 그득 고여 있었다.
그럼 어렸을 때도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할까 봐 나한테 말도 없이 그랬냐고 묻고 싶었는데, 지금은 그것보다 일단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해 봐야 할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갔다.
“네가 강수민한테 돈 주고 빚 갚아 주는 거?”
“네…….”
“당연히 나한테 그래도 되냐고 물어봤으면 미쳤냐고 했겠지.”
“그러니까요…….”
정우진이 눈을 몇 번 깜빡거리자 눈물방울이 뺨 위로 도르륵 굴러 떨어져 턱 끝에 맺혔다. 그걸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도대체 네가 강수민한테 돈을 왜 주는데?”
“그거 주면 다시는 선배님 앞에 안 나타난다고 해서…….”
“…….”
겨우,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예상치도 못한 말에 뒷골이 당기더니 숨이 턱 막혔다. 한 번 숨을 삼키지 않으면 목소리가 높아질 것만 같아서 나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에 입을 열었다.
“내가 알게 되면 좋아할 줄 알았어?”
화를 삭인다고 했지만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있었다. 정우진도 느낀 건지 나를 보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너도 아닌 거 아니까 나한테 비밀로 한 거잖아.”
“아니에요, 딱히 비밀은 아니었어요.”
“비밀이 아니었다고?”
뭔 소린가 싶어서 미간을 구기며 묻자, 정우진이 내 눈을 피해 눈알을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그냥……. 안 물어보셨으니까, 말을 안 한 거지……. 막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이라든지 그런 건 아니었어요. 당연히 물어보셨으면 말을 해 드리려고 했고.”
“안 물어봐서 말을 안 했다고? 네가 말을 안 하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너 강수민한테도 나한테 말하지 말라고 그런 거 아니야? 걔가 나 보니까 도망가던데?”
정우진이 말하는 논리가 너무 희한해서 당최 무슨 소린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가 답답하다는 듯 묻자 정우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어디서 봤는데요?”
“그게 중요하니?”
황당해서 한숨을 내쉬며 묻자 정우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 그 모습이 심통이 난 것처럼 보여서 나는 혹시나 하고 물었다.
“이사시킨 것도 네가 가라고 그런 거지? 나한테 말도 하지 말고, 내 눈에 띄지도 말라고 그랬어? 그리고 너는 그 새끼가 하는 말을 믿어? 너 돈이 그렇게 많아? 쓸 데가 없어?”
“네…….”
“뭐?”
화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을 하다 보니까 열불이 치솟아 점점 말이 빨라졌다. 그런데 정우진이 풀이 팍 죽어서 하는 대답에 순간 얼이 빠졌다.
“돈 쓸 데가 없다고?”
“별로 큰 금액도 아니고……. 돈만 주면 사라져 준다는데, 그 정도면 그냥 거저먹는 거 아니에요?”
“…….”
오히려 되묻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다시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래, 생각해 보면 정우진은 돈이 많을 것이다. 정우진의 입장에서는 강수민에게 준 돈이 정말 푼돈일 수도 있겠지만, 금액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아니, 돈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걔한테 돈을 준 게 문제라고. 돈을 적게 줬든, 많이 줬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갖다 버리려고 한 돈을 걔한테 줬다고 해도,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내 말이 이해가 안 돼?”
“네.”
“이해가 안 된다고?”
“네…….”
“…….”
또 말문이 막혔다.
표정을 보니까 정말 모르는 눈치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고개를 숙인 채 눈만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데, 그 눈에 온갖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불안함, 슬픔, 억울함, 분노, 어리둥절함 등등……. 딱 꼬집어 이거라고 정의를 내릴 수가 없었다.
이걸 왜 못 알아듣는 거지? 글을 모르는 사람한테 마치 이름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 가르쳐야 하는 것처럼 막막했다. 도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나는 잠시 입을 다물고 가만히 정우진을 보다가 도저히 방법이 떠오르질 않아서 짧게 말했다.
“외워.”
“네?”
“모르겠으면 그냥 외워.”
“……뭘요?”
“강수민한테 돈은 주면 안 돼.”
다섯 살짜리 어린애에게 가르치듯 말했는데도 정우진은 고집을 부렸다.
“그럼 선배님은 계속 그 새끼랑 엮일 거예요?”
“안 엮여. 안 엮이고 있었는데 네가 걔한테 등신 새끼처럼 이것도 주고, 저것도 주고 다 퍼 줬잖아. 아니,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네가 도대체 그 새끼한테 돈을 왜 줘? 돈 쓸 데가 없다고? 장난하냐? 그럴 거면 차라리 기부를 해.”
“저 매년 기부는 잘 하고 있어요.”
“잘했다, 그래! 아주 모범적인 시민이네!”
자꾸 헛소리를 해서 결국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놀란 거북이처럼 어깨를 움츠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속이 꽉 막힌 게 체한 지 십팔 년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화 안 나셨다면서요…….”
정우진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한 모습으로 작게 말했다. 그 말에 다시 고함을 지르려다가 가슴에 참을 인을 십팔 번 새기고 입을 열었다.
“화 안 났어. 황당해서 그런 거지.”
“선배님, 제가 돈이……. 그냥 적당히 많은 게 아니라, 진짜 엄청 많거든요? 다른 것도 아니고 겨우 돈 몇 푼으로 그런 떨거지 하나 해치울 수 있는 거라면 정말 그냥 거저먹는 거라고 생각해요, 전…….”
“…….”
또다시 시작된 돈 자랑에 나는 눈을 감고 속으로 심호흡을 십팔 번 했다.
“그리고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적게 들었고…….”
“얼마나 줬는데?”
“아직 안 줬어요. 여권이랑 비자 문제 때문에 일단 집이랑 차만 주고, 생활비랑…….”
“하…….”
별거 아니라는 듯 하는 말에 내가 갑자기 헐떡거리기 시작하자 정우진이 놀란 얼굴로 내 손을 잡았다.
“괜찮으세요? 숨 쉬기 힘들어요?”
“그래서?”
“네?”
“그래서……. 뭐, 여권이랑 비자……. 그래, 여권……. 외국에서 살기로 했다는 거지? 강수민이 외국 나가면 돈은 그때 주고?”
내가 힘겹게 묻자 정우진이 내 손을 꽉 붙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가 계속 힘들어 보였는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등을 토닥거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병 주고 약 주기란 말인가?
“아, 치워!”
내가 발작하듯 소리를 지르자 정우진이 또 화들짝 놀라면서 울상을 지었다.
“넌 돈도 안 아깝냐?”
“네, 하나도 안 아까워요. 전 재산을 다 달라고 했어도 저는 줬을 거예요. 돈은 다시 벌면 되잖아요. 아니면 건물 팔아도 되고, 정 급하면 일단 대출받아서 갚아도 되는 거고…….”
“…….”
자기 딴에는 열심히 설명해 주고 있었지만, 나는 왜 정우진이 하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열이 뻗치는 걸까? 정우진의 말을 듣다 보면 그런 거 같기는 한데,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이건 아니었다.
“나는.”
“네…….”
내가 크게 숨을 내쉬며 입을 열자 정우진이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가 그냥 걔한테 돈을 주는 게 싫다고. 네 걸 왜 줘? 도대체 왜? 걔가 뭐가 예뻐서?”
“……그럼 저 아는 사람한테 대신 주라고 할까요? 그 사람한테는 제가 돈 주고…….”
“우진아, 너 혹시 아이큐가 어떻게 돼?”
“네? 저 152요.”
“…….”
그걸 또 물어본다고 대답을 쳐 하고 앉아 있다.
어이가 십팔 번째 가출을 해서 잠깐 정신을 다잡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럼 그냥 주지 말까요? 저는……. 돈이 제일 좋은 거 같아서 그런 거고……. 다른 방법을 쓰면 좀 번거롭기도 하고, 시간도 걸릴 것 같고…….”
“그냥 연락하지 말라고 하고 연락을 안 받으면 되는데, 그게 뭐가 번거로워? 내가 뭐 죄지었어? 아니면 네가 죄지은 거라도 있어? 도대체 뭐가 무서워서 그 새끼한테 돈까지 쥐여 주면서 눈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그래? 그냥 말로 하면 되잖아, 말로. 어? 말로 내 눈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말하면 되잖아. 돈을 왜 주냐고.”
답답해서 주먹으로 소파를 퍽퍽 치면서 말하자 정우진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말귀를 못 알아들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 귀싸대기라도 때려!”
“그래도 될까요?”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묻는 말에 나는 뒤늦게 이성을 되찾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안 되지.”
아이돌이 다른 것도 아니고 폭력 사건에 휘말렸다가는 끝장이었다.
“저도 왠지 안 될 거 같아서 그런 거예요.”
억울하다는 듯 덧붙이는 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러자 정우진이 고민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몇 번 눈을 깜빡이다가 내게 다급히 물었다.
“선배님, 혹시 모아 둔 돈 얼마나 있으세요?”
“……그건 왜?”
내가 인상을 쓰며 묻자 정우진이 묘안임을 의심치 않는 표정으로 손뼉을 쳤다.
“선배님이 걔한테 돈 주면 안 돼요? 그리고 선배님은 앞으로 제 돈을 쓰시면 되잖아요.”
“그냥 입을 다물어.”
“왜요? 좋은 방법 아니에요?”
“입 다물라고.”
나는 별안간, 지나친 황당함은 평정심과 구분이 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걸 해탈이라고 하는 걸까? 무슨 말을 지껄이든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자 폭풍우 치는 바다 같던 마음이 숲속의 호수처럼 고요해졌다.
“돈은 일단 그렇고, 어쩌다가 강수민이랑 네가 그런 대화를 하게 된 건데?”
“오두막집 남자들 촬영할 때, 제가 우연히 선배님 핸드폰을 보게 됐는데, 그때 문자 온 걸 우연히 봤거든요.”
유난히 ‘우연’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게 이상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번호는 알고 있었는데, 방송 나가고 다음 날 회사로 연락이 왔더라고. 선배님 학교 폭력 관련해서 터뜨리겠다고…….”
“뭐? 학교 폭력?”
이건 또 무슨 전개지? 그리고 나는 강수민이랑 같이 학교를 다녔던 적도 없는데, 갑자기 웬 뜬금없이 학교 폭력?
“조사하다 보니까 전후 사정을 알게 됐고, 강수민이랑 가해자가 아는 사이라는 것도 파악했어요. 당시에 피해자였던 사람도 만나서 오히려 선배님한테 도움 받은 게 맞다는 녹취록도 다 땄고…….”
“잠깐만.”
“네?”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도대체…….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사라니? 무슨 조사? 그리고 가해자, 피해자는 또 무슨 소리고, 녹취록을 땄다는 건 뭔 말이야?
난생처음 듣는 말에 이마를 짚고 물었다.
“조사를 왜 해? 그냥 나한테 물어보면 되는걸. 그리고 왜 이런 걸 나한테 말도 없이 네 마음대로……. 아니, 근데 네가 이걸 왜 해결을 해? 회사에서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이걸 도대체 네가 왜…….”
생각이 정리가 되질 않아서 그런 건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내가 두서없이 횡설수설 말하자 정우진이 진정하라는 듯 내 손등 위에 제 손을 겹쳤다. 그러더니 차근차근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일단 조사를 한 거예요. 괜히 선배님한테 먼저 물어봤다가 안 좋은 기억이 나면 기분만 나빠질 테니까,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먼저 조사를 하고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거면 제가 알아서 하면 되니까요. 그럼 스트레스도 안 받고…….”
안 좋은 기억이라니? 나는 설마설마하고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내가 학교 폭력의 가해자였다는 걸 믿었다는 거야? 그러다가 조사하는 와중에 아닌 걸 알았고?”
“믿었다기보다는,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그랬던 거예요.”
“…….”
그게 그 말 아닌가? 물론 그런 제보가 들어왔으니까 혹시나 하는 의심을 하는 것도 당연하긴 했지만, 그래도 학폭이라니? 도대체 정우진이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넌 내가 학교 다닐 때 같은 반 친구들이나 패고 다니는 그런 사람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는 거잖아.”
어쩐지 서운한 것 같기도 하고, 짜증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기분이 묘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나를 보며 정우진이 말했다.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뭐? 내가 인간 말종 양아치 새끼일 수도 있다고?”
“네? 아니, 그렇게까진 말 안 했는데……. 그냥 별로 상관없지 않아요? 때렸든 말든,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았겠죠.”
“……?”
뭔 소리지?
아까부터 정우진이 무슨 의미로 말하고 있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질 않았다.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그런 건가? 영문을 알 수가 없어서 정우진을 보며 눈만 깜빡거리다가 어쨌든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난 아무 사람이나 때리고 그러지 않아.”
“알아요. 학교 폭력이라고 주장했던 사람을 때린 것도, 그 사람이 다른 사람 괴롭혀서 그런 거잖아요. 다 들었어요.”
“…….”
뭔가 정우진이 나를 변호해 주듯 말하고 있었지만 그 말이 귀에 들리질 않았다.
얘 좀 어디가 이상한 거 아닌가? 왜 이렇게 말이 안 통하는 거 같지? 술 마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