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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번 양보해서 나를 보고 당황한 건 그렇다 쳐도, 저렇게 귀신이라도 본 듯 도망쳤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었다. 앞으로 서로 남인 것처럼 살자고 마음먹었지만 이대로 두려니 도저히 신경이 쓰여서 그럴 수가 없었다.
매니저 형까지 데리고 갈 수가 없어 결국 혼자 택시를 타고 오랜만에 예전에 살던 집으로 갔다. 나는 근처 슈퍼에서 박카스 한 박스를 사서 낡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 제일 먼저 경비실을 찾았다.
하지만 순찰 중인 건지 경비 아저씨가 보이질 않아 하는 수 없이 일단 9층으로 올라갔다. 아까 밖에 있었으니 당연히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하고 강수민이 버릇처럼 열쇠를 두던 곳을 찾았는데, 늘 그곳에 있던 우유 주머니가 보이질 않았다.
“……?”
이건 또 예상을 못 했던 일이라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열쇠가 없으면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는데…….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쉰 뒤 핸드폰을 꺼내 강수민에게 아주 오랜만에 전화를 했다.
“…….”
하지만 신호음은 세 번이 울리기도 전에 끊어졌다.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도대체 뭔 짓거리를 하고 다니는 거야.”
짜증이 나서 혼잣말을 하며 다시 한숨을 내쉬는 순간, 현관문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혹시 다른 사람이랑 같이 살고 있는 건가? 혹시나 하고 나는 철문을 쾅쾅 두드렸다.
“누구세요?”
또 누굴 불러서 술이나 처마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는 내 생각보다 훨씬 나이 든 사람의 것이었다. 당황해서 주춤거리는 사이 천천히 문이 열리면서 난생처음 보는 할머니가 나왔다.
“누구세요?”
“아……. 안녕하세요. 저는……. 그, 혹시 여기에 강수민이라는 사람 없을까요?”
강수민 때문에 진흙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던 짜증이 순식간에 다 사라지는 것 같았다. 찡그리고 있던 표정을 풀고 공손히 묻자, 할머니가 잠시 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혹시 전에 살던 사람인가? 우리가 여기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거든요. 일주일도 안 되긴 했는데…….”
“아, 새로 이사 오셨어요?”
“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하는 할머니를 잠시 보다가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네. 알겠습니다. 예…….”
내가 가 보겠다는 듯 몇 걸음 뒤로 물러서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잠시 닫힌 문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
이사를 갔다고? 강수민이? 도대체 어디로? 왜? 돈은 어디서 났을까? 왜 날 보고 도망쳤던 거지? 조금 전에 만난 것도 그렇고, 인별에 올린 사진으로 행동반경을 추측해 보면 여기서 딱히 멀리 간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강수민한테 그 많은 돈이 갑자기 어디서 생긴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진짜 로또라도 맞은 건가? 도망가는 건 혹시라도 내가 빌붙기라도 할까 봐 피했던 걸까?
차라리 그런 거라면 다행일 텐데……. 강수민의 성격으로 봤을 땐 내가 빌붙는다고 돈을 줄 놈이 아니라서 그런 것 때문에 날 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미치겠네…….”
아파트 밖으로 나와 터덜터덜 단지 내를 걷고 있는데, 멀리 경비 아저씨가 보였다. 경비 아저씨도 나를 알아본 건지 조금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내가 꾸벅 인사를 하자 경비 아저씨가 웃었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
“아, 이거 드세요.”
“아이고, 이걸 나 주려고 사 온 거예요?”
봉지에 담긴 박카스 한 박스를 보자 경비 아저씨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아, 그리고 텔레비전에 나온 거 봤어요. 예능 찍은 거.”
“아, 그거 보셨어요?”
“아는 얼굴 나와서 봤지. 내 딸이랑 와이프도 엄청 재미있게 봤어요. 학생을 내가 어릴 때부터 봤다고 하니까 딸이 거짓말 치지 말라고……. 아, 맞다. 학생 아니지. 입에 붙어서 자꾸 학생이라고 하네.”
경비 아저씨는 아마 내가 삼십 대가 돼도 학생이라고 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쨌든 또 잘 봤다고 하니 좀 머쓱해져 어색하게 웃으며 뒷목을 만지작거리자 경비 아저씨가 말했다.
“혹시 사인 한 장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딸이 정말 팬인데……. 우리 와이프도 엄청 좋아하고.”
“당연히 되죠. 두 장 해 드릴게요.”
“아이고, 고마워요.”
어릴 때부터 알게 모르게 도움을 받은 적이 많아서 사인 같은 건 두 장이 아니라 이십 장, 백 장도 해 줄 수 있었다. 나는 경비실로 가 경비 아저씨가 주는 종이와 펜으로 사인을 큼지막하게 했다
“따님 이름이 어떻게 돼요?”
“박소율이에요.”
“이름 예쁘다. 몇 살이에요?”
“스물다섯이요.”
“오, 친구네.”
사인 아래쪽에는 작은 글씨로 이름을 넣어 간단한 인사와 안부의 말도 함께 적었다. 쓰다 보니 길어져 얼른 마무리를 하고 펜의 뚜껑을 닫으며 물었다.
“아, 근데 혹시 형 이사 가신 거 알고 계셨어요?”
내 물음에 경비 아저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안 그래도 그거 물어보려고 했는데, 별 얘기도 없이 쫓기는 사람처럼 갑자기 가길래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엄청 걱정했어요.”
“아…….”
“학생도 몰랐어요?”
“네, 저도 모르고 왔다가 올라가 봤더니 다른 분이 계시더라고요.”
혹시라도 살짝 기대했는데 역시 경비 아저씨도 모르는 일인가 보다. 이제는 강수민이 직접 내게 말해 주지 않는 이상 어디서 소식을 들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경비 아저씨와 몇 마디 더 한 뒤 인사를 하고 아파트를 나왔다. 전화는 앞으로도 계속 안 받을 것 같고…….
[확인하면 전화해.]
답장은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문자를 남겼다.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택시를 타러 가며 인별 쪽지도 보내 볼까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고소한 냄새가 나서 고개를 돌리니 붕어빵을 팔고 있는 작은 노점상이 보였다.
나는 곧장 정우진에게 전화를 했다.
-여보세요? 안 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통했네요.
“너 어디야?”
-지금 잠시 회사 와 있는데, 선배님은 어디세요?
“나 이제 가려고. 그럼 잠깐만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제가 데리러 갈까요?
“아니, 금방 가.”
-얼마나 걸려요?
“몰라, 근데 곧 가니까 기다려.”
-네, 기다릴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붕어빵 가게로 가서 말했다.
“붕어빵……. 음, 혹시 이만 원어치 되나요?”
“어서 오……. 예? 이만 원어치요?”
붕어빵을 기다리고 있던 손님도, 주인도 놀라 되물었다. 붕어빵 하나에 천 원이라 사실 삼만 원어치 정도는 사고 싶었는데, 좀 오래 걸릴 것 같아서 이것도 적게 부른 것이었다.
“네, 이만 원어치요.”
“아, 네. 되죠. 조금 기다리세요.”
“네, 천천히 해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붕어빵이 다 되길 기다리며 핸드폰을 보고 있는데, 먼저 와 있던 두 사람이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결국 시선이 마주치자 한 명이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어나더 원 아니세요?”
“아……. 맞아요. 안녕하세요?”
“어머, 안녕하세요!”
“헉, 안녕하세요! 저 완전 팬이에요! 오남자도 엄청 돌려 봤는데!”
그렇게 붕어빵을 기다리는 동안 팬이라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사인도 해 주다 보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붕어빵도 서비스로 두 개나 받아서 기쁜 마음으로 회사로 가 일단 애들이 있는 연습실로 향했다.
“야, 이거 먹고 해.”
내가 붕어빵 봉지를 잔뜩 들고 들어가자 애들이 우르르 내게 몰려왔다.
“뭐야? 붕어빵?”
“팥붕이야?”
“나 방금 붕어빵이랑 결혼하는 상상했는데, 타이밍 대박.”
처음부터 다섯 개는 다른 봉지에 따로 담아 달라고 해서 그건 빼돌리고 나머지만 애들에게 주었다.
“나 잠깐만 나갔다가 바로 올게.”
애들은 내가 어딜 가든가 말든가 붕어빵을 먹느라 정신이 없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정우진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네, 선배님. 오셨어요?
“어디야?”
-저 비상계단 쪽에 있어요. 4층.
“비상계단? 거긴 왜?”
의아하긴 했지만 일단 거기에 있다고 하니 나도 비상계단 쪽으로 갔다. 마침 내가 있는 곳도 4층이라 가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정우진이 몸을 세우며 활짝 웃었다.
“선배님.”
전화를 끊고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기에 왜 있어? 안 추워?”
“혹시 들킬지도 모르잖아요.”
“뭘? 아니……. 회사에서 그냥 대화는 할 수도 있지, 오히려 여기에서 이러고 둘이 만나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다시 웃다가 내 손에 있는 걸 보며 물었다.
“그건 뭐예요?”
“붕어빵. 너 먹어.”
종이 봉투째로 건네자 정우진이 두 손으로 받으며 안을 확인했다.
“이거 때문에 만나자고 하신 거예요?”
“어, 왜? 너 붕어빵 싫어해?”
“아니요……. 엄청 좋아해요.”
정우진이 붕어빵 하나를 꺼내 뭐에 홀린 것처럼 그걸 멍하게 보다가 이내 울상을 짓고 내게 시선을 돌렸다.
“잘 먹을게요.”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입술까지 삐죽 내밀었다.
“너무 좋아서요. 선배님도 하나 드세요.”
별것도 아닌 고작 붕어빵 다섯 개 받았다고 과하게 좋아하니까 뭐라고 반응하기가 애매했다. 정우진은 이런 면이 있었다. 진짜 아무것도 아닌 걸로 오버를 엄청나게 하는 거…….
우리는 그렇게 잠시 별말 없이 춥고 어두운 비상계단 구석에서 붕어빵을 먹었다. 정우진은 붕어빵 몸통 쪽을 잡고 입 부분부터 조금씩 먹고 있었다. 별로 먼 거리는 아니었지만 날씨가 춥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미지근하게 식고 눅눅해졌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선배님.”
“어?”
붕어빵을 반쯤 먹은 정우진이 눈썹을 팔(八)자 모양으로 늘어뜨렸다.
“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부탁? 갑자기?”
붕어빵 먹다 말고 갑자기 부탁은 무슨 부탁?
아무도 없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조용하고 목소리가 울려서 나도 모르게 속삭이듯 말했다. 정우진도 평소보다는 목소리 크기를 줄인 상태라 한 발자국 다가가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데?”
그러자 정우진도 내게 한 발자국 다가오며 숨을 삼켰다.
“눈 박치기 오늘 해도 될까요?”
“뭐?”
“눈썹은 했으니까 이제 눈이잖아요. 그거 지금 해도 돼요?”
“…….”
눈 박치기라는 말을 듣자마자 정우진이 차 안에서 눈썹 박치기랍시고 내 멱살을 잡고 비비적거리던 게 떠올랐다. 그때만큼 당황해서 내가 잠시 그대로 굳어 있자 정우진이 내게 손을 뻗었다.
또 멱살이 잡힐 것 같아서 나는 정우진의 손을 쳐 내며 계단을 한꺼번에 3개나 올라갔다.
“미쳤어?”
“왜요? 아무도 없잖아요.”
“아무도 없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고 그게 무슨 박치기야, 비비기지!”
내가 작은 소리로 고함을 지르자 정우진이 뻔뻔하게 다시 물었다.
“지금 눈 비비기해도 돼요?”
비비기를 박치기라고 해서 당황하는 게 아닌데! 답답한 마음에 내가 손으로 가슴을 퍽퍽 치자 정우진이 내가 그랬던 것처럼 한 걸음에 계단을 세 개나 올라와 내 옆에 섰다.
나는 정우진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번에는 계단 끝까지 올라가 버렸다.
“그냥 붕어빵 먹고 얌전히 가. 나 연습실 가 봐야 돼, 지금. 바로 가야 돼.”
“비비는데 시간도 별로 안 걸리잖아요. 그냥 잠깐만 비비고…….”
“저리 좀 가라고, 또라이 새끼야!”
“다섯 번 정도만 비빌게요.”
“싫어!”
자꾸만 내 옆으로 오려고 하는 정우진을 피해 나는 계단을 계속 뛰어 올라가며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