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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힘없이 정우진의 손길에 이끌려 다시 차 안으로 수납되었다. 이대로 땅으로 꺼져 버리고 싶었다. 아니면 하늘로 솟아도 괜찮았다. 뭐가 됐든 그냥 혼자 있기만 한다면 죽어도 좋을 듯싶었다.
하지만 이대로 정우진을 뿌리치고 집으로 간다고 해도 거긴 애들이 있었다.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있어도 그곳엔 유노을이 있을 테고, 그렇다고 화장실에 들어가 밤을 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어딜 가든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내가 쥐새끼였다면 쥐구멍에라도 숨을 텐데…….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상태로 잡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고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정우진이 운전석에 앉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웃고 있었다면 턱주가리라도 날려 버렸을 텐데, 정우진은 그저 멀뚱멀뚱 날 보고 있기만 했다. 그러자 또 내가 너무 등신 새끼 같아져서 앞으로 엎드려 시야를 차단했다.
풀숲에 대가리만 처넣고 안전하게 숨은 줄 아는 짐승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야.”
“네?”
내가 작게 부르자 정우진이 대답했다. 나는 온 진심을 담아 간절히 입을 열었다.
“차는 여기에 두고 넌 그냥 택시 타고 집에 가면 안 되냐? 나 오늘 여기에서 좀 자야 될 거 같은데.”
“여기 주차 금지 구역이라면서요.”
“그냥 벌금 좀 내면 되지.”
“위험해서 안 돼요. 아니면 저도 여기에서 같이 하룻밤 보내도 되는 거면, 그렇게 해요.”
그 말에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정우진도 별말은 하지 않아서 잠깐 그러고 있다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지금은 여기에 더 있어 봤자 나만 불리할 것 같았다. 왜냐면 지금 내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황하기도 했고 쪽팔리기도 했고, 어쨌든 정우진을 볼 낯이 없어서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도 없었다.
“그럼 난 가 볼…….”
그래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칵 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났다. 심장이 철렁거려서 사색이 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바라봤다. 정우진은 나를 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선배님.”
“…….”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어요.”
“뭔데, 그게…….”
쓸데없이 비장한 표정이라 긴장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기다릴 수 있어요.”
“…….”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서 눈만 껌뻑거리자 정우진이 덧붙였다.
“며칠 뒤에 해도 되는지만 알려 주세요.”
“뭘?”
“뽀뽀요.”
“…….”
나는 다시 머리가 띵해지는 걸 느꼈다. 내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진은 진지한 얼굴로 계속 개소리를 했다.
“일주일 뒤인지, 열흘 뒤인지, 그것도 아니면 한 달 뒤인지……. 기간에 맞춰서 단계별로 차근차근 하는 것도 저는 좋아요.”
“우진아.”
“네?”
“나는 단계별로 차근차근 하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이 염병할 새끼야…….”
이게 무슨 게임도 아니고…….
저렇게 생각을 해 주니 차라리 고맙기는 한데, 그렇다고 저리 또 대놓고 물어보니까 이건 이거대로 황당했다. 내가 자괴감 섞인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정우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럼 바로 키스로 넘어가도 될까요?”
“그건 안 돼.”
“단계별로 안 해도 된다면서요?”
“생각이 바뀌었어.”
한 입으로 두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갑자기요?”
정우진이 불만스러운 어조로 되물었지만 그것도 잠시, 뭔가 상상이라도 했는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곧 생일 선물을 받을 어린애처럼 웃었다.
“그럼 몇 월 며칠인지만 말해 주세요.”
“…….”
웃음은 순수했지만 그 모습이 어쩐지 천하에 다시없을 변태로 보여서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 버렸다. 내가 좀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그제야 웃었다.
“아, 진짜 너무 좋다.”
“뭐가 좋아, 이 새끼야. 아까부터 너는 욕만 먹고 있는데.”
핸들에 엎드려서 나를 보며 웃는 걸 보니 또 가슴이 술렁거려서 괜히 투덜거렸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바보가 되는 것 같을까? 꼭 초등학생이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너는 내가 도망가면 붙잡지 좀 마. 그냥 내버려 두라고. 어련히 알아서 연락을 안 하겠니?”
“갑자기 멱살 잡아서 박치기하고 도망가는데 어떻게 안 잡아요?”
“그걸 또 왜 그렇게 자세하게 말하는 건데, 이 배려심도 없는 새끼야.”
다른 사람의 입으로 내가 했던 정신 나간 짓을 들으니 두 배로 소름이 끼쳤다. 술 마시고 탁자 위에 올라가서 발라드 부르면서 개다리 춤을 췄다는 말을 들어도 이것보다는 덜 민망할 것 같았다.
“아무튼 저한테서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박치기는 계속해도 되니까.”
“박치기 소리 좀 그만해.”
“이마에 박다가 좀 적응이 되면 눈썹 박치기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도 괜찮아지면 눈 박치기도 하다가 코 박치기, 마지막에는 입술 박치기…….”
정우진은 박치기에 꽂혀서 박치기 강의를 해 대고 있었다. 낯이 뜨거워서 입을 꾹 다문 채 숨을 고르고 있는데, 정우진이 또 웃었다. 왜 자꾸 처웃냐는 듯한 눈으로 빤히 쳐다보자 정우진이 말했다.
“그냥 선배님이랑 차 안에서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거 자체가 너무 좋아요.”
“좋긴 뭐가 좋아.”
“이렇게 그냥 아무 말이나 하면서 웃고 그러는 시간들이요. 물론 뽀뽀하면 더 좋기는 하겠지만, 그냥 이렇게 있는 것도 저는 꿈만 같아요.”
“…….”
저렇게 말하니까 말문이 막혔다. 정말 대단히 약은 놈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무튼 뽀뽀 언제 해도 되는지 알려 주시면 제가 날짜 맞춰서 준비해 볼게요.”
“뭔 준비?”
“그런 게 있어요.”
정우진은 또 변태처럼 웃었는데 꼬락서니를 보니까 내가 질색하는 걸 보려고 일부러 저러는 거 같았다. 하지만 나는 정우진이 좋아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서 질색하지도 않고 계속 무표정을 고수했다.
“…….”
“…….”
그런 나를 가만히 보던 정우진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내 멱살을 잡았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내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졌다. 얼굴 위로 어둡게 그림자가 지면서 점점 가까워지자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눈이 감겼다.
빳빳한 털 같은 게 눈가를 찔러서 퍼뜩 눈을 뜨자 정우진이 코앞에서 보였다. 거리가 너무 가까운 탓에 정우진의 속눈썹이 자꾸만 내 눈가를 찔렀던 것이다.
숨을 쉬는 것도 잊을 만큼 놀란 상태로 눈을 부릅뜨자 맞댄 이마를 몇 번 문지르던 정우진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눈썹 박치기…….”
“…….”
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그만큼 나는 지금 기겁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내 마음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정우진은 몇 번 더 내 눈썹에 제 눈썹을 비비적거리다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운 것처럼 붉어진 눈가로 웃는 걸 보니 체한 것처럼 명치 쪽이 꽉 조여들었다.
***
[제가 심심해서 타로를 봤거든요? 근데 이날이 딱 좋대요.]
무슨 이삿날 받아 오는 것도 아니고, 정우진이 달력에 빨간색 펜으로 동그라미를 친 걸 사진 찍어 내게 보냈다. 뭐라고 답장을 보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냥 어이가 없어서 가만히 있는데 다시 문자가 왔다.
[너무 빠르면 이 날짜도 괜찮아요.]
다른 날짜의 동그라미는 파란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처음에만 좀 이러고 말 줄 알았는데 계속 집요하게 구니까 오히려 더 좆 됐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냥 뭐가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후루룩 해 버리면 차라리 나을 텐데, 이렇게 날짜도 정하고 자리까지 만들어 판을 깔아 둔 상태에서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꼭 벌칙 게임 같아서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만 좀 해ㅡㅡ]
한숨을 내쉬며 문자를 보내자 곧장 답장이 왔다.
[그럼 오늘 저녁에 할까요?]
[내가 좋은 날짜를 한번 생각해 볼게.]
[ㅋㅋㅋㅋㅋㅋ]
처웃는 걸 보니 역시 이런 상황 자체를 즐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얜 도대체 성격이 왜 이럴까? 성격 하니까 생각났는데 눈썹 박치기인지 나발인지 어처구니없는 행동 때문에 당황해서 손가락을 왜 그랬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하여튼 여러 가지 상황을 종합해 봤을 때 정우진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순진한 척하면서 웃는 것도 다 계략인 게 틀림없었다.
“뭐 좋은 일 있어?”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매니저 형이 룸 미러로 나를 힐끗 보더니 물었다.
“네?”
박준오 후임으로 들어온 매니저 형은 이쪽에서 일도 오래 했고, 경력도 많아서 여러 가지로 우리를 많이 챙겨 줬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안 건지 필요한 걸 가져다주고 성격도 좋아서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아니요, 그냥 웃긴 걸 좀 봐 가지고…….”
못 볼 걸 몰래 보다가 들킨 사람처럼 내가 당황하자 매니저 형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물어보진 않았다. 괜히 찔려서 그런 걸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잠시 창밖을 보며 숨을 고르고 있는데 신호에 걸려 차가 멈췄다.
오늘 날씨가 추워서 그런지 걸어 다니는 사람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을 무장한 상태였다. 별생각 없이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는데, 낯익은 사람이 보였다.
“어.”
나도 모르게 소리를 내며 창문을 아래로 내렸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긴가민가하긴 한데 강수민인 것 같았다. 얼핏 봐도 윤기가 촤르르 흐르는 비싸 보이는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커피를 든 채 어디론가 느릿느릿 걸어가던 강수민과 눈이 마주쳤다.
“…….”
“…….”
나를 발견한 강수민이 멈칫하더니 선글라스를 이마 위로 올려 자세히 보려는 듯 고개를 앞으로 쭉 뺐다. 많이 놀란 건지 그 상태로 가만히 나를 보던 강수민의 얼굴에 점점 당혹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날 봤는데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아니고, 욕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당황하다니……. 확실히 저 새끼가 무슨 짓을 저지른 게 틀림없었다. 인별에 찍어 올린 사진도 그렇고, 저렇게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것도 그렇고…….
스멀스멀 불길함이 일어 손을 들어 부르려는데, 강수민은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휙 몸을 돌려 그대로 도망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