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41/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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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녹음을 끝마친 뒤에 앨범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예상보다 늦게 끝났다. 나는 정우진과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기 때문에 애들은 먼저 보내고, 지하 주차장까지 내려가며 전화를 했다.

“어, 나 방금 끝났어.”

-저 곧 도착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알았어. 천천히 와.”

과속한다는 얘기를 꽤 자주했던 것 같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하자 정우진이 웃으며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승강기 옆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자, 문득 조금 전에 박준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정우진이 자기 손가락을 부러뜨렸다던…….

“…….”

내가 유진이라고 부르던 장면 때문에 그랬던 거겠지? 빨리 한국에 들어와서 나를 만날 셈으로……. 근데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인 사람이 할 사고방식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정우진은 좀 특이한 면이 많았다. 손가락을 제외하고서라도 가끔 울면서 하는 말들도 그렇고……. 그냥 화가 나서 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아무리 화가 나도 누굴 찢어 죽인다느니 그런 소리는 잘 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게임 채팅도 아니고……. 게다가 이것도 당시에는 그냥 넘어간 일인데, 푸른 수염의 비밀 방 같던 거기도 다시 떠올려 보면 좀 과한 면이 있었다. 좋아하면 당연히 그런 식으로 꾸며 놓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걸 넘어서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고 할까…….

근거는 없었지만 계속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건 내가 정우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런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익숙한 차가 내 쪽으로 오고 있는 게 보였다. 정확히 내 앞에 차가 멈춰 서자 창문이 열리면서 정우진이 고개를 숙여 나를 올려다봤다.

“선배님.”

“…….”

웃는 얼굴은 늘 그랬던 것처럼 지나치게 무해하고 티끌 하나도 없이 순수해 보였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찜찜했던 마음이 씻은 듯 사라지는 게 조금 황당할 정도로 신기했다.

귀신에 홀린 거 같다고나 할까……. 아니, 이 경우에는 귀신에 홀린 게 아니라 저 얼굴에 홀렸다고 하는 게 정확했다.

“안 피곤하세요?”

“괜찮아. 너 배 안 고파?”

“네, 아직 괜찮아요. 선배님은요?”

차에 타서 안전벨트를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나를 보며 물었다. 움직임을 멈추고 힐끗 고개를 돌리자 새카만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질 않자 정우진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웃었다.

“왜요?”

나는 말을 할까 말까 짧은 시간 동안 고민하다가 일단 밥부터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내 상태가 좀 이상하다고 여긴 건지 정우진이 몇 번 더 물어봤지만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굳이 급하게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정우진의 집으로 가 저녁을 먹고 잡담도 나누다가 밤늦게 나왔다. 자고 가라는 말은 여전했지만, 왠지 저 말뜻에 다른 것도 포함이 되어 있는 것 같아 쉽게 그러겠다고 할 수가 없었다.

사귀기로 한 다음에는 숨 쉬듯 하던 개수작도 부리지 않아서 어쩌면 정말 말 그대로 숙면을 취하라는 뜻일 수도 있겠지만……. 만약, 정말 만약 정우진이 다른 시도를 할 수도 있으니 내가 조심을 하는 게 맞았다.

물론 우리 사이에 이제 못 할 것도 없겠지만, 아직 내 마음은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도 모르게 정우진이랑 키스하는 상상을 해 봤다. 하려고 해서 한 게 아니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갑자기 떠오른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상상을 해 보려고 해도 그 모습이 잘 그려지지가 않았다. 뽀뽀든 키스든 그보다 더한 것이든, 뭐든……. 그런 쪽으로 생각을 해 보려고 하면 할수록 놀이터에서 밤이든 낮이든 마냥 소꿉놀이를 하는 모습밖에는 그려지지 않았다.

역시 나는 게이가 아니었던 건가…….

근데 그런 스킨십만 아니면 또 정우진이랑 만나서 같이 밥을 먹고 영화를 본다든지 그러는 건 또 재미있고……. 어떤 날은 좋았다가 어떤 날은 불편했다가, 또 어떤 날은 편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랬다가 저랬다가 왔다 갔다 지랄 염병을 떠는 중이라서 나도 내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씨발, 이걸 사귀기 전에 확실히 해 놨어야 했는데, 정우진이 자꾸 울면서 이상한 소리를 하는 바람에 홀린 듯이 만나 보자는 말이 불쑥 나와서…….

“선배님.”

요즘 내 인생 최대의 고민거리가 생겨 시도 때도 없이 생각에 잠겼다. 또 멍하게 있었던 모양인지 정우진이 숙소 아래쪽에 주차를 한 뒤 나를 불렀다.

“아, 다 왔네.”

창밖을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말하자 정우진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혹시 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아니, 그냥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말을 흐리다가 가기 전에 그 손가락 사건에 대해 자세히 물으려던 참에 정우진이 내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급작스럽게 맞닿은 온기에 화들짝 놀랐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자연스럽게 물었다.

“왜?”

“힘든 일 있으면 저한테 꼭 말해 주세요.”

“힘든 일 없어. 요즘 앨범 준비 중이라 그냥 걱정이 좀 많아졌나 봐.”

“제가 뭐 도와 드릴 건 없을까요?”

걱정이 가득한 눈빛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울렁거리고 속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닿은 손에서부터 팔, 목덜미, 뺨까지 이어지듯 소름이 돋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어쩐지 등 뒤로 식은땀이 날 것 같아서 나는 다시 최대한 자연스럽게 정우진의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없어. 혹시 생기면 말해 줄게. 그리고 도와준다니까 생각난 건데, 진짜 조심해야 돼.”

갑작스러운 내 경고에 정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뭘 조심해요?”

“자꾸 티 내고 그러면 혹시 들킬 수도 있고……. 애들도 다 알고 있던데, 혹시 네가 말한 거 아니지?”

내 말에 정우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애들이요?”

“진혁이랑 유노을이랑 강이한테 우리…….”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까 정우진한테 아무 상의도 없이 우리 사이를 애들한테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미리 상의를 하고 말했어야 했는데.

박준오랑 이야기한 것 때문에 마음이 급해서 거기까지 미처 생각지 못했다. 박준오처럼 애들도 우리 사이를 눈치챈 건 아닌지, 그걸 확인하기 급급해서…….

내가 별안간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자 정우진이 다시 내 손등에 제 손을 겹쳤다.

“우리 사귀는 거요? 원래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뭐?”

하지만 곧이어 나오는 정우진의 물음에 나는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원래 알고 있다고? 왜?”

“네?”

“……?”

내 물음에 정우진도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잠시 그렇게 서로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먼저 침묵을 깬 건 정우진이었다.

“저는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왜?”

“왜냐니…….”

뭘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제야 나는 정우진과 애들의 반응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설마 그렇게 티가 났던 건가? 도대체 어디서? 어떤 부분에서? 최근에는 다른 사람이 있는 곳에서 대놓고 만난 적도 없는데. 아니면 정우진이 술 마시고 우리 집에 와서 운 것 때문에 그러나? 만나기만 하면 밤늦게 들어와서? 맨날 문자 보내고 전화해서?

“…….”

되짚어 보니, 티를 많이 내긴 한 거 같아서 민망해졌다. 얼굴 쪽으로 열이 오르려고 하던 찰나에 정우진이 웃으며 말했다.

“아무튼 저도 많이 조심할게요.”

“…….”

그 말에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어차피 애들한테는 알릴 생각이었던지라 그건 별로 상관없었다. 다른 사람만 모르면……. 아니, 박준오도 알고 있으니까 걔도…….

“아, 맞다. 아까…….”

아까 박준오를 만났는데 걔도 뭔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고 말하려는데, 정우진이 갑자기 내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얽어 깍지를 꼈다.

“네?”

내가 말을 하다 멈추자 정우진이 또 순진무구한 얼굴로 되물었다. 별로 강한 힘도 아니라서 뿌리칠 수도 있었지만, 소스라치게 놀랐다는 티를 내기가 껄끄러웠다. 그래서 그냥 넘어가려고 하는데, 깍지 낀 손가락이 마치 지렁이가 꿈틀거리듯 간헐적으로 움직이면서 손가락 사이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차 안에서 아주 작게, 살갗이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야.”

내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부르자 정우진이 깍지 낀 손을 빤히 보며 대답했다.

“네?”

“……진짜 조심해야 된다고. 아까 박준오 만났는데 걔도 뭔가……. 좀 아는 눈치였고……. 아무튼 진짜, 좀…….”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말하고 있는데, 정우진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얼굴을 보니 내 말도 듣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손가락을 살살 움직이는 것도 여전해서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아까부터 손은 왜 자꾸 만져?”

“만질 때마다 움찔움찔하는 게 좋아서요.”

“내 손이 네 장난감이냐? 그만 좀 만져, 진짜 쳐 죽여 버리기 전에.”

욕을 처먹고도 기분이 좋은 건지 정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빵 터지듯 웃었다.

“선배님 그거 아세요?”

“모르는데요?”

“당황하면 입이 엄청 험해지네. 저번에도 그러더니.”

“반말 까지 마세요. 이 버르장머리 없는 새끼야.”

“또 당황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정우진이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웃기 시작했다. 그게 꼭 나를 놀리는 것만 같아서 심장이 요동을 치며 빠르게 뛰었다.

“사귀는데 반말 좀 하면 어때요?”

“싫다고.”

“그럼 뽀뽀는 해도 돼요?”

“…….”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게 아니면 도대체 어떤 원리로 반말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뽀뽀로 넘어간단 말인가? 내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일까, 말문이 막히고 기가 막혀서 그대로 굳어 있는데, 그런 내 상태를 보던 정우진이 또다시 웃었다.

“…….”

그걸 보며 반사적으로 웃지 말라고 욕을 하려다가 멈칫했다. 여기서 욕을 하게 되면 아까 당황할 때 입이 험해진다는 말에 동의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자니 왠지 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오기가 생겼다.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고작 뽀뽀 때문에 당황한 것도 아닌데……. 그냥 좀 놀라서 그런 건데, 정우진이 이상한 오해를 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팔을 뻗어 다짜고짜 정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웃고 있던 정우진이 놀라서 눈을 크게 뜨는 게 보였다. 멱살을 잡을 때까지만 해도 그까짓 뽀뽀는 그냥 해 버릴 생각이었는데, 막상 눈이 마주치니 쉽사리 행동으로 옮길 수가 없었다.

정우진도 뭔가 눈치를 챈 건지, 잔뜩 긴장한 얼굴로 숨을 삼키는 게 보였다. 그 꼴을 보고 있으려니 갑자기 또 열이 뻗쳐서 그대로 박치기를 해 버렸다.

“악!”

정우진이 놀라서 눈을 질끈 감으며 작게 비명을 질렀다. 이마에 고통이 느껴지자 어느 정도 이성을 되찾음과 동시에, 내가 얼마나 정신병자 같은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쪽팔려서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기에 나는 머저리처럼 말도 없이 차에서 내려 오르막길을 미친 듯이 뛰어 올라갔다.

하지만 몇 걸음 가기도 전에 정우진에게 붙잡혀 버리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알았어요, 미안해요. 그건 며칠 더 있다가 해요.”

아니, 이런 개씨발…….

보통 이런 상황이면 안 잡는 게 예의 아니냐?

나는 죽고 싶은 심정으로 얼굴을 양손으로 가렸다. 차라리 뽀뽀를 했어도 이것보다는 덜 민망했을 텐데.

진짜 울고 싶었다. 씨발…….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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