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숙소에 도착하자 정우진이 잠시만 기다려 보라고 하더니, 후다닥 내려 내 쪽으로 와 차 문을 열어 줬다.
“…….”
마치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된 것만 같은 느낌이었지만, 칭찬을 바라듯 눈을 빛내고 있는 정우진을 보니 뭐라고 말하기가 힘들었다.
“고마워……. 근데 차 문 정도는 내가 열 수 있으니까 다음부터는 이러지 마.”
“그냥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예요.”
“어, 근데 내가 불편해…….”
한숨을 내쉬며 어정쩡한 자세로 차에서 내리자 정우진이 잠시 입술을 달싹거리더니 아쉽다는 듯 말했다.
“네, 그럼 안 할게요. 대신 차에 탔을 때 안전벨트는 제가 해 드려도 돼요?”
“그것도 내가 할 수 있어.”
“그렇긴 한데……. 그럼 선배님도 제 안전벨트 직접 해 주시면 되잖아요.”
“그냥 서로 각자 하자.”
굳이 왜 번거롭게 그래야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오르막길을 오르며 그런 말을 하자 정우진이 내 옆에서 날 따라 걸으며 혼잣말처럼 투덜거렸다.
“아무것도 못 하게 하구…….”
어깨도, 눈꼬리도, 입꼬리도, 아주 그냥 보란 듯이 온몸을 축축 늘어뜨리며 정우진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한숨을 푹 쉬면서 어깨를 다시 한번 아래로 툭 떨구는 걸 보곤 피식 웃으며 물었다.
“넌 원래 그렇게 누굴 만나면 하나부터 열까지 네가 다 챙겨 줘?”
“저 사귀는 거 선배님이 처음이에요.”
“아…….”
혹시 연애를 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걸로 배운 걸까? 아니면 처음이라 들떠서 그런 걸까? 사실 나는 사귀자고 하기는 했지만, 그 전이랑 후가 뭐가 다른지 아직까지는 잘 실감이 나지 않는 상태라 정우진의 변화가 조금 버겁기는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그냥 약간 당황스럽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그런 상태였다……. 사실 나도 내 상태가 어떤지 가늠이 잘 되지 않았다.
“선배님은요?”
“뭐가?”
“다른 사람 만난 적 있죠?”
그 물음에 별생각 없이 답하려다가 멈칫했다. 근데 원래 전 애인 얘기는 잘 안 하지 않나? 아니, 물론 따지고 보면 내가 먼저 이 주제로 대화를 시작한 거긴 한데…….
정우진이 대답을 기다리듯 빤히 나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몇 번 째예요? 언제 사귀었어요? 데뷔하고 난 다음에도 만난 적 있어요?”
속사포로 물어오는 질문에 나는 제대로 생각도 하지 못하고 대답하기 바빴다.
“근데 그냥 어릴 때라……. 중학교 다닐 때 한 번, 고등학교 다닐 때 두 번? 데뷔하고 난 다음에는 못 만났지. 우리 계약서에 연애 금지 조항이 있거든.”
말을 끝내자 빌라 입구 앞에 도착했다. 이제 너도 빨리 들어가서 쉬라고 하려는데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사귀게 된 거예요?”
이런 곳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왠지 제대로 대답을 안 해 주고 돌려보내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자꾸 이런 걸 묻는 건지도 알 것 같아서 나는 이제 잘 기억도 나지 않는 학창 시절의 일을 떠올리며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중학생일 때는 가위바위보에 져서 사귀었고……. 한 3일?”
“네? 가위바위보요?”
표정을 굳힌 채 잔뜩 긴장하고 있던 정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그때 애들끼리 뭐 그런 놀이가 유행해서……. 아무튼 한 3일 사귀었고, 고등학교 다닐 땐 그냥 좋아한다고 하길래…….”
“네? 선배님은 좋아한다고 하면 그냥 다 만나 줘요?”
정우진이 가위바위보 얘기를 할 때보다 더 놀라다 못해 기겁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좀 그렇기는 했지만……. 사실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만나지 말아야 할 특별한 이유도 없어서 그냥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하기는 했었다. 그런데 보통 대부분 그 나이 때의 애들은 그렇지 않나?
“근데 바빠서 그냥 흐지부지됐어. 그때 아르바이트도 많이 하고 있었고…….”
고등학생일 때가 내 인생에서 거의 절정이나 다름없던 시기였다. 아이돌이 됐을 때보다 더 바쁘게 살았으니 말 다 했지, 뭐……. 야간 아르바이트에 새벽 아르바이트도 해서 학교를 못 갔던 날도 제법 많았었다.
지금 되돌아 보면 그땐 어떻게 그렇게 살았나 싶었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일만 했으니……. 젊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아르바이트요?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정우진이 어딘지 모르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조금 전과는 표정이 딴판이었다. 살짝 찌푸려진 하얀 미간을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그냥 엄청 많이. 아무튼 이제 너도 가서 쉬어.”
“저 아까 많이 쉬어서 괜찮아요.”
“그래도 시간이 늦었잖아. 얘기는 나중에 해도 되고.”
내 말에 정우진이 한숨을 푹 내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같이 살면 이렇게 헤어질 일도 없고, 밤새도록 같이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참 좋을 텐데.”
“…….”
혼잣말이기는 했지만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 것 같았다. 이제는 이런 말을 들어도 황당하기보다는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사귄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신랑이니 신부니, 그런 소리를 하는 것도 그렇고 이제는 같이 살고 싶다는 얘기까지 하다니……. 정신 똑바로 안 차리면 이러다가 또 말릴 듯싶어 정우진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내며 말했다.
“얼른 가. 운전 조심하고.”
“네……. 가는 길에 전화해도 돼요?”
“아니, 운전하면서 전화하지 말고 차라리 집에 가서 문자를 해.”
“그럼 과속해서 5분 안에 도착해 볼게요.”
농담이 아닌 듯한 말에 결국 한 발자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 여기에 서서 또 한참 실랑이를 할 것 같아서…….
“알았어, 그럼 그냥 집에 가면서 전화해.”
“네, 그럼 제가 금방 전화 드릴게요…….”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표정으로 정우진이 무거운 발을 질질 끌고 마치 감염당한 좀비처럼 느릿느릿 움직였다. 한 발자국 움직이고 뒤돌아보고, 또 한 발자국 움직이다 뒤를 돌아보느라 정우진은 거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저 손 한 번만 잡아 보면 안 돼요? 그럼 마음 편히 갈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때 정우진이 다시 한달음에 내 곁으로 다가오더니 말했다. 얼른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말없이 먼저 손을 덥석 잡자 정우진이 화들짝 놀라며 숨을 들이켰다. 좀 전에는 내 목덜미에 수건처럼 얼굴을 벅벅 비볐으면서, 고작 손 한 번 잡은 걸로 왜 이렇게 놀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손 아프면 병원 가고. 자기 전에 해열제 하나 더 먹어.”
체온이 좀 높은 거 같아서 덧붙이자 정우진이 머뭇거리다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뻔뻔하게 따박따박 말대꾸하거나 민망한 소리도 잘하면서 가끔 이렇게 별것도 아닌 걸로 부끄러워하는 게 신기했다.
“저 그럼 가 볼게요.”
“그래, 가.”
그렇게 말하고 손을 빼려는데 정우진이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놔주질 않아서 나도 조금 힘을 더 줘 당기려는데 별안간 정우진이 고개를 숙이더니 내 손가락에 입을 댔다.
“전화 드릴게요!”
“…….”
몇 초 정도 입술을 꾹 누르고 있던 정우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가며 소리쳤다. 후다닥 움직이는 발뒤꿈치에서 연기가 나고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황당한 얼굴로 그 자리에 굳어 있는데, 벌써 차가 주차되어 있는 곳까지 간 정우진이 양손을 위로 올려 소낙비가 떨어지는 날 차에서 흔들리는 와이퍼처럼 팔을 흔들고 있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 저러는 거지? 불안하지도 않은 건지, 내가 손을 흔들어 주지 않으면 저기서 평생 저러고 있을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나도 한쪽 팔을 들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정우진이 활짝 웃으며 드디어 차에 탔다.
“…….”
차가 골목길을 빠져나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있다가 조금 전 정우진이 입술을 눌렀던 손을 내려다봤다. 찰나였지만 살갗에 닿았던 감촉이 여전히 선명해서 괜히 손톱을 세워 그곳을 벅벅 긁었지만 간지러운 건 여전했다.
***
정우진은 건강상의 이유로 모든 스케줄을 취소하고 휴식기에 들어갔다. 반면 나는 숙소 이사 문제도 그렇고, 앨범 준비에 조금씩 들어오는 방송 스케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만나지 못하는 날도 있었지만, 전화나 문자 같은 건 그래도 꼬박꼬박 주고받는 중이었다.
[선배님 오시면 드리려고 연습 중이에요.]
정우진이 예쁘게 플레이팅이 된 음식 사진 한 장과 문자를 보냈다. 오늘 저녁에 맛있는 걸 만들어 준다고 해서 집에 가기로 했는데, 그때 해 줄 음식인가 보다.
하얗고 두꺼운 도자기 접시에 먹음직스러운 빛깔의 스테이크와 구운 야채, 소스 같은 것들이 적당히 어우러져 굉장히 맛있어 보였다.
[이걸 벌써 만들었어?]
[혹시 실수할 수도 있으니까 한 번 더 연습해 봤어요.]
[실수 좀 하면 어때. 그냥 같이 먹는 건데.]
[(*☌ᴗ☌)。*゚ 인별에도 사진 올렸어요.]
요즘 정우진은 자기가 만든 음식 사진을 SNS에 자주 업로드했다. 사진 찍는 것도 좋아한다고 하더니, 찍는 것마다 광고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의외로 이런 쪽으로 소질이 있는 걸까?
인별에 들어가 정우진이 여러 각도로 찍어 올린 사진을 구경하고 있는데, 문득 다시 강수민이 떠올랐다. 요즘 계속 이런 식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불안해져서 차라리 이럴 바엔 먼저 한번 연락을 해 볼까 싶기도 했다.
정우진이 올린 음식 사진에 좋아요를 누른 뒤, 강수민의 인별을 찾아 들어가 봤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문외한인 내가 봐도 억대를 호가할 것처럼 비싸 보이는 외제 차였다.
“…….”
당연히 그냥 어디서 찾은 사진을 올린 건 줄 알았는데, 몇 장 더 보니 그게 아니었다. 차 보닛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찍은 사진, 차 안에서 커피를 들고 찍은 사진, 핸들을 잡고 운전하고 있는 손 등등…….
거기다가 써 놓은 글들까지 보니 자기 차가 확실해 보였다.
시장 떡복이 먹고 싶어서 아무 생각 없이 왔는데,
다음에 올때는 차 두고 와야겠다..^^
“…….”
새벽에 잠 안올때 차 끌고 야경 좋은 곳에서 맥주 한잔.
이럴려고 돈버는 거지.
“…….”
나에게 주는 선물.
행복하자, 수민아.
carpe diem.
“…….”
몇 개를 더 보니 차뿐만이 아니었다. 굉장히 비싸 보이는 고가의 시계와 사진 구석탱이에 현금 다발과 브랜드 이름이 새겨진 박스에 담긴 명품 가방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