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8/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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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진의 헛소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결국 다시 화장실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자 정우진이 문을 두드리며 잘못했다고 시끄럽게 구는 통에 오래 있을 수도 없었다.

“자꾸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네……. 근데 이상한 소리는 아니었는데…….”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겨우 식탁에 다시 앉을 수 있었다. 정우진은 할 말이 많은 듯 자꾸 꿍얼거렸지만, 조금 전처럼 적극적으로 입을 털지는 않았다.

“아니, 근데 이거 진짜 웃기는 놈이네. 사귀기 전에는 누가 지랑 결혼해 달라 그랬냐, 그냥 만나 달라고만 했지 그러더니, 사귄 지 뭐 얼마나 됐다고 신랑감, 신붓감 이런 소리를 해?”

생각하다 보니까 황당해서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팽개치며 말하자, 정우진이 불쌍한 척을 하며 뻔뻔하게 말했다.

“그냥 말도 못 해요? 말은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어이가 없어서 그래. 만나 보자고 한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왜 벌써 그런 소리를 하냐고.”

“그럼 얼마나 더 있다가 말해야 하는데요? 그 기간이 정해져 있어요? 일주일? 한 달? 일 년? 만약 정해져 있는 거라면 저도 그 날짜 지나면 다시 청혼할게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주먹에 힘이 들어갔지만, 사귄 첫날에 애인을 때릴 수는 없어 참을 수밖에 없었다.

“너는 진짜.”

“귀여워요?”

“아니, 입을 좀 다물, 하……. 야, 너 아까 징징 울던 것도 다 악어의 눈물이었던 거지?”

조금 전, 서럽게 울던 놈이 지금은 헤헤 웃으면서 잘만 말하는 걸 보니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아니에요, 진짜…… 저 사실 지금도 눈물 참고 있는 거예요. 자꾸 울면 선배님 곤란하실까 봐…….”

이 새끼는 진짜 이중인격이라도 되는 건지, 말을 하자마자 금세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해서 양손을 흔들면서 다급히 말했다.

“울지 마, 울지 마! 좀!”

“안 울어요……. 근데 진짜 저 지금 심장이 엄청 두근거리고 있어요. 너무 좋기도 하고 감격스럽고, 이 모든 게 그냥 다 꿈만 같고…….”

“알았어, 밥 먹어. 밥부터 먹자. 울지 좀 말고.”

“네.”

정우진이 훌쩍거리면서 젓가락으로 식어 빠진 배추 한 쪼가리를 집어 입에 넣었다. 그걸 잠깐 보다가 나도 마저 먹으려는데, 뭔가 이상했다. 조금 전 정우진이 다친 손이 아프다고 젓가락까지 놓쳤는데, 지금은 반대쪽 손으로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나를 본 정우진이 아, 하고 말했다.

“저 사실 양손잡이에요.”

“…….”

“……그래도 아픈 건 진짜였어요.”

“…….”

역시 개수작이 맞긴 했는데, 이걸 또 순순히 말해 주니까 할 말이 없어졌다.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그냥 관뒀다.

“병원 잘 가. 귀찮다고 내버려 두지 말고.”

“네.”

근데 손은 어쩌다가 다친 건지 아직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런 거냐고 몇 번 물어봤는데, 그때마다 묘하게 말을 돌리는 것 같아서 더는 추궁할 수도 없었다. 하려면 할 수야 있겠지만,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 같아서 이것도 그냥 넘어갔다.

“제가 해도 되는데…….”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옆에서 자꾸 정신 사납게 굴었다.

“손 다쳤으니까 괜히 이런 거 하려고 하지 말고, 밥도 그냥 나가서 먹거나 시켜 먹어. 병원에서 조심하라는 말 없었어?”

“조심하라고 하기는 했어요. 최대한 이쪽 손은 쓰지 말라고도 했고요.”

“그러니까.”

“최대한 안 쓰도록 노력해 볼게요.”

대답은 잘 했지만 워낙 말을 안 듣는다는 걸 알아서 별로 믿음이 가지는 않았다. 손이 나을 때까지라도 사사건건 참견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이제 가실 거예요?”

“그래야지. 시간도 많이 늦었고. 너도 쉬어야 하잖아.”

“저는 아까 다 쉬었는데……. 근데 이거 정말 꿈 아니겠죠?”

나는 아직도 꿈 타령을 하고 있는 정우진을 신기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수건에 손을 닦았다.

“아직도 실감이 잘 안 나서 그러는데, 하루만 더 자고 가시면 안 돼요? 자고 일어났을 때 선배님이 옆에 계시면 안심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자고 일어나면 전화해. 꿈 아니라고 말해 줄 테니까.”

“그건 얼굴을 못 보잖아요.”

“영상 통화 걸어.”

“온기를 느낄 수가 없잖아요.”

반박하듯 말하는 정우진을 잠시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쯤 되니 과연 어디까지 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러 고심하는 척하다가 또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내 겉옷이라도 두고 갈까? 그거 보면 굳이 온기가 없어도 꿈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지 않을까?”

“선배님 옷은 저희 집에도 많아서 그거 가지고는 안 돼요.”

이 집에 내 옷이 왜 많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일단 다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럼 내가 포스트잇에 우리 사귀는 거 맞다고 글씨라도 써 놓을게. 내일 일어나서 그거 보면 되겠네.”

“…….”

“옆에 내 사인이랑 지장도 찍으면 더 확실해지겠지?”

“…….”

시위라도 하듯 정우진이 뚱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지만 못 본 척하며 포스트잇과 펜을 찾았다. 웃음이 나오려는 걸 꾹 참고 일부러 보란 듯이 정우진의 앞에서 글씨를 썼다.

정우진 강서주 사귀는 거 맞음

그리고 그 밑에는 내 사인도 하고, 엄지에 펜의 잉크를 잔뜩 묻혀 마르기 전에 지장도 찍었다.

“이제 됐지?”

웃으며 포스트잇을 건네자 정우진이 성의 없는 손짓으로 종이를 받았다. 당연히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면서 징징거릴 줄 알았는데, 어쩐지 포스트잇을 바라보고 있는 표정이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나중에는 왠지 감동까지 받은 듯한 얼굴이라 당황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갑자기 그 밑에다가 똑같이 제 사인을 하고 엄지에 펜을 냅다 문지르더니 지장을 찍었다. 그리고 그걸 한참 보다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어린애처럼 헷, 하고 웃었다.

“…….”

분명 놀릴 생각으로 한 행동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좋아하니까 괜히 멋쩍어져서 뒷목만 벅벅 긁다가 말했다.

“아, 아무튼 난 이제 가 볼 테니까 내일 연락해.”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됐어, 손도 아픈데 운전도 하지 마.”

“안 다친 손으로 하면 돼요. 잠시만요.”

다시 말리려고 해 봤지만 이러다가 또 자고 가라고 떼를 쓸까 봐 그냥 놔두기로 했다. 겉옷을 챙겨 입고 핸드폰까지 주머니에 넣으니 정우진이 마스크와 모자까지 꼼꼼하게 갖추고 다가왔다.

“내일 일어나자마자 전화해도 되죠?”

“몇 시에 일어나는데?”

“선배님은요?”

“나는 한 여섯 시에서 여덟 시 사이? 피곤하면 더 잘 때도 있긴 한데, 보통은 그사이에 일어나.”

현관문을 나와 지하로 내려가는 승강기 안에서 정우진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내게 다시 물었다.

“선배님, 저 핸드폰에 선배님 이름 저장 뭐라고 할까요?”

“네 마음대로 해.”

“혹시 자기야 이런 걸로 해도 돼요?”

“…….”

예고도 없이 뒤통수를 때리는 말에 갑자기 숨이 턱 막혀 왔다.

“아니, 그건 좀……. 혹시 누가 볼 수도 있고…….”

“핸드폰 잠금 걸어 놔서 아무도 못 봐요.”

“그래도 해킹 같은 거 당할 수도 있잖아.”

“아……. 아, 선배님! 그럼 저희끼리만 부르는 애칭 같은 거 만들까요? 남들이 봤을 땐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만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비밀 호칭 같은 거……. 어떡해, 진짜 너무 좋아.”

“…….”

차에 탈 때까지 정우진이 혼자 요란 법석을 떨면서 처음 연애해 보는 만화 캐릭터처럼 굴었다.

나도 연애 경험이 별로 없기는 했지만 딱히 저런 로망 같은 것도 없고……. 이런 걸 성향 차이라고 하는 걸까? 내 주변에는 저렇게 티를 내면서 연애를 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정우진이 좀 신기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게 뭐 이상한 행동도 아니고, 누구나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하고 싶어 하는 대로 내버려 두기로 했다. 솔직히 옆에서 보고 있으면 어지간히 재미있기도 했고.

“저 선배님이 주신 포스트잇 코팅해서 목에 걸고 다녀도 돼요?”

“야, 인마. 그건 당연히 안 되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정우진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내가 당황한 표정으로 단호히 말하자 정우진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그럼 아쉬운 대로 안 보이는 곳에 타투 새기는 건 어때요?”

대안으로 제시한 방법이 더 심각했다. 도대체가 이게 장난인지 진심인지 알 수가 없어서 운전을 하고 있는 정우진의 옆모습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주차장을 벗어난 정우진이 힐끗 나를 보더니 웃었다.

“등허리나……. 그런 곳에 하면 안 보이잖아요. 이거 그대로 가지고 가서 포스트잇째로 글씨랑 같이 새기면 되지 않을까요?”

“그럴 거면 차라리 이마에 해.”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정우진이 별안간 정색을 했다.

“허락만 해 주시면 정말 할 수 있어요.”

“진짜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우진아.”

“왜요? 이름 정도는 괜찮지 않아요?”

“이마 정중앙에 굴림체로 하겠다면 허락해 줄게.”

내가 피식 웃으며 말하자 정우진이 눈을 크게 떴다. 역시 정우진도 굴림체로 문신을 하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선배님, 너무 귀여운 거 같아요.”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말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살면서 멋있다는 것도 아니고, 귀엽다는 말은 정말 별로 들어 본 적이 없어서 어색하기도 하고 너무 소름이 끼쳤다. 내가 질색하는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웃었다.

“고작 글씨체 같은 걸로 제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게 너무 귀여운 거 같아요.”

“…….”

이상한 헛소리를 하면서 계속 웃는 정우진을 보고 있으려니 너무 괴로워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소름이 돋아난 주먹으로 한 대만 때릴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데, 다행히 정우진도 맞고 싶지는 않았는지 말을 돌렸다.

“선배님은 핸드폰에 제 번호 뭐라고 저장해 두셨어요?”

“비비 세가온.”

“뭐라고 바꾸실 거예요?”

“안 바꿀 건데?”

내가 정색을 하고 말하자 정우진의 표정이 폭삭 일그러졌다.

“왜요? 타투 안 새길 테니까 바꿔 주세요.”

“그건 당연히 하면 안 되는 거고.”

“왜 당연하다고 말씀하세요? 좋아하니까 평생 새겨 두고 싶은 제 마음을 모르시겠어요? 그럼 진짜 깨알만 하게 손가락 안쪽에 이름 새기는 것도 안 돼요? 아무도 눈치 못 채게 할게요. 네?”

자꾸 헛소리를 하는 정우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주머니에 넣어 뒀던 핸드폰을 꺼냈다. 비비 세가온이라고 저장되어 있는 걸 찾기 위해 연락처를 뒤지다가 문득 잊고 있던 이름을 발견했다.

‘강수민.’

“…….”

그러고 보니까 얜 지금 뭘 하며 살고 있으려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강수민의 그간 행적들을 보면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오두막집 남자들 촬영을 할 때까지만 해도 온갖 저주를 다 퍼붓더니…….

근데, 왜 갑자기 이렇게 조용해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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