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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하지만 곧 들려오는 얼빠진 목소리에, 꿈속에 있는 것만 같던 정신이 현실로 돌아왔다. 뒤늦게 내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도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사실 아직까지도 내가 게이인지 아닌지 확실하지 않았지만, 뭔가 시도라도 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나는 양성애자일지도 몰랐다. 정말 내가 남자를 싫어했다면 이런 시도조차 불가능했을 테니까.
게다가 정우진의 말처럼 만나 보면 무언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만나기 전에는 원래 상상만으로 타인을 재단하기 때문에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이상형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까 만나 보면 뭔가 다를지도 모르고, 그렇게 차라리 빨리 콩깍지에서 벗어나면 정우진도 더 이상 떼를 쓰지 않을 거고…….
아무도 추궁하지 않았고, 아무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는데 나 혼자 괜히 찔려서 스스로에게 변명을 하고 있는데, 넋이 나가 있던 정우진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는지 벌벌 떨리는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러더니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지, 진짜요?”
“…….”
그 한마디에, 나는 정말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어 버렸다. 정말 이게 맞는 걸까…….
순간 흐려지는 내 눈빛을 포착한 건지 내 입술이 달싹거리는 순간 정우진이 범인을 발견한 탐정처럼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잠깐만요!”
“…….”
커다란 고함에 화들짝 놀라자 정우진이 다급히 말했다.
“무르기 없기예요.”
“그게 아니라…….”
“잠깐!”
“아니…….”
“한 번 말하면 끝이에요!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
아니, 무슨……. 이게 게임도 아니고…….
소리 내지 않고 입술만 벌려도 펄쩍 뛰면서 난리법석을 떠는 통에 나는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어, 어떡……. 어떡하지?”
“…….”
“제가……. 아니, 제가 이다음부터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
한 발자국 정도 되는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며 정신을 못 차리던 정우진이 기쁜 건지, 놀란 건지, 두려운 건지, 뭔지……. 아무튼 이상한 표정으로 벌벌 떨면서 물었다.
“그, 그럼 일단 저희 오늘부터 1일인 거예요?”
“…….”
그 소름 끼치도록 유치한 말에 나는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1일이 맞는 말이기는 한데, 꼭 저렇게 처음 연애하는 중학생처럼 굴어야 하는 걸까? 물론 나도 이렇게 다 커서 누굴 정식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기는 했지만…….
솜털이 쭈뼛 서는 걸 느끼며 천천히 눈을 뜨자 정우진이 부담스러운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으응.”
“하…….”
내 말에 정우진이 다시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감격한 눈으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이 마치 신의 기적을 목도한 신자인 것만 같아서 자연스럽게 거부감이 들었지만, 곧 방울방울 떨어지는 눈물에 다시 어이가 없어졌다.
“왜 또 울어?”
아니, 도대체 왜…….
계속 울면서 주절주절 떠드는 게 보기 싫어서 원하는 대로 해 줬더니 또 울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손등으로 눈을 벅벅 문지르기만 하는 게 너무 어리숙해 보여 정우진도 연애가 처음인 건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런 걸 보니까 또 이렇게 구는 게 약간 이해가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사실 나도 이제부터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별안간 정우진이 달려들었다.
“억.”
말 그대로 정말 와락, 달려들어서 날 끌어안았다. 어찌나 기세가 대단한지 정우진의 어깨에 턱을 정통으로 박아 버려서 입술 안쪽 살과 이가 얼얼할 정도였다. 목이 졸리는 것만 같은 압박감에 반사적으로 정우진을 밀어내려고 하는데, 축축한 게 목덜미에 닿았다.
“윽…….”
그게 뭔지 깨닫기도 전에 등줄기에 소름이 끼쳤다. 내가 얕게 부르르 떨자 정우진이 내 등을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줬다. 목덜미에 비벼지고 있는 게 정우진의 젖은 얼굴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지만, 그래도 느낌이 이상한 건 여전했다.
“혹시 꿈일까 봐 너무 무서워요…….”
“꿈 아니야…….”
이걸 떼어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주 안자니 그것도 별로 내키지가 않아서 양팔을 옆으로 벌린 어정쩡한 자세로 힘겹게 대답하자 정우진이 훌쩍거렸다.
“내일 돼서 역시 안 되겠으니까 취소해야겠다고 그러시면 절대 안 돼요.”
“안 그래.”
“어떡해, 진짜…….”
“…….”
어깨부터 시작해서 목덜미, 이젠 귀 뒤쪽까지……. 정우진은 내 살을 아주 자기 수건으로 쓰고 있었다. 젖은 눈가나 이마, 코, 입술까지 닿는 게 선명하게 느껴져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울고 있는 애를 또 나무라기가 좀 그랬다.
하지만 점점 숨소리가 귀에 닿는 것 같은 느낌에 결국 참지 못하고 정우진의 어깨를 밀어 버렸다.
“그만 좀 울어.”
“눈물이 안 멈추는데 어떡해요.”
“웃긴 생각이라도 좀 해 보든가. 지붕, 이런 거.”
“그게 뭐가 웃겨요. 그냥 선배님이 그런 거 좋아하시니까 인터넷 찾아서 써 본 거지.”
“…….”
정우진이 뺑뺑 울면서 이상한 헛소리를 했다. 내가 그런 걸 좋아하긴 뭘 좋아해? 이 새끼가 왜 갑자기 시비를 걸지? 이게 사귀는 게 맞나? 황당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귀는 거 취소 안 한다고.”
“그거 때문에만 우는 게 아니라, 그냥……. 흑…….”
“그리고 나 지붕, 그런 개그 안 좋아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좋아하시잖아요. 근데 진짜 너무……. 저 진짜 잘할게요. 앞으로 제가 재미있는 거 많이 찾아서 알려 드릴게요. 새가 피곤하면 조강지처, 막 이런 거……. 흑, 그리고 선배님이 좋아하는 것도 많이 하고, 맛있는 것도 제가 많이 만들어 드릴게요. 또, 업어 주고……. 가시도……. 그리고 저 돈도 되게 많고……. 하, 진짜 말도 안 돼.”
정우진은 또 자기 혼자 주절주절 두서없이 떠들면서 울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조강지처 어쩌고저쩌고, 이런 되지도 않는 말장난을 하는 걸 보니 황당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뒤로도 정우진은 자기가 돈이 얼마나 많고, 미래 계획은 어떻고 등등 이런 얘기를 하면서 자기 자랑을 엄청 해 댔다. 너무 서럽게 울면서 말하기에 도중에 끊지도 못하고, 그 길고 지루한 얘기를 결국 끝까지 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말하는 동안에 좀 진정이 됐는지 눈물은 그친 게 천만다행이었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그럼 이제 다른 사람이 선배님한테 막 좋다고 그래도 그 사람이랑 안 만날 거죠?”
얼마나 울었는지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정우진이 이상한 질문을 했다. 너무 이해하기가 힘든 물음이라 고개를 갸웃하다가 물었다.
“만난다는 게 무슨 뜻인데?”
“한 번만 만나 달라고 하거나……. 사귀자고 하거나……. 그런 총체적인 것들이요. 밥을 같이 먹는다고 하거나, 영화 보자고 하거나, 커피 마시자고 하거나, 술 마시자고 하거나…….”
다급히 하는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누가 나한테 너 좋아한다고 고백하고, 밥 한 끼 먹자고 하면 그 사람이랑 만날 거냐고 물어보는 거야?”
“네…….”
“…….”
정우진이 불안한 눈으로 내 눈치를 보며 작게 대답했다. 그걸 보며 나는 정우진이 도대체 나를 얼마나 개쓰레기 같은 놈으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게 아니면 날 바보라고 생각하는 건가?
사귀자고 한 사람한테 묻는 첫 질문이 고작 저런 거라는 게 도무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질 않았다. 도대체 왜 저런 걸 물어보는 건지 여러 방향으로 생각을 해 보다가 혹시나 싶어 물었다.
“그런 걸 왜 물어보는데? 혹시 넌 누가 너 좋다 그러면서 밥 한 번 먹자고 하면 나한테 비밀로 하고 만나려고?”
“네? 미쳤어요? 절대 안 그럴 건데요? 누가 저한테 그러면 입을 찢어 버리고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경찰에 자수한다는 걸 신고라고 잘못 말한 걸까? 아무튼 과민 반응하며 발작하는 걸 보니 정우진의 연애 가치관도 나와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도 당연히 안 만나지……. 그런 당연한 걸 왜 그렇게 눈치까지 보면서 물어보는데? 내가 그렇게 인간 말종처럼 보이냐?”
“아니요, 그래도 혹시나 하고……. 그럼 누가 막 울면서 매달려도 절대 안 만나신다는 거죠? 막 당장 안 만나 주면 죽겠다고 협박해도?”
“…….”
울면서 매달려도 절대 안 만나는 거냐고 묻는 말에 나는 어쩐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혹시 얘가 자기가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고 찔려서 이러는 건가? 만약 그래서 그런 거라면, 울면서 매달려도 안 됐다면 혹시 죽겠다고 협박을 했을 거라는 뜻인가?
왠지 찝찝한 느낌이 들어 이상한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점점 울상으로 변해 갔다. 저러다가 또 울 것 같아서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왜 늦게 대답하세요?”
불안한 눈으로 묻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고민하다가 물었다.
“너 혹시 울다가 안 됐으면 죽겠다고 협박이라도 할 생각이었어?”
내 물음에 정우진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떻게 알았어요?”
“…….”
등신인가, 진짜…….
협박까지 할 생각이었다는 걸 알게 됐는데도 기분이 더럽기는커녕 황당하기만 했다. 너무 허술하고 어설퍼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렁그렁한 저 눈 때문일까? 보고 있자니 그냥 세상 물정 모르는 웬 어린애가 운동장에서 동전 주운 걸로 집 살 거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착잡해 보이는 내 표정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정우진이 다급하게 자기 어필을 하기 시작했다.
“저 진짜 잘할게요. 그리고 혹시 필요한 거 있으시면 저한테 꼭 말씀해 주세요. 저 진짜 돈 엄청 많거든요? 제가 꼭 선배님한테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또 선배님 이상형을 말씀해 주시면 제가 다 맞출게요. 생각해 보시고 다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내가 얘랑 사귀는 건지, 스폰을 받는 건지, 면접을 보는 건지…….
아니면 이게 정우진 나름대로의 표현 방법인 건지…….
듣다 보니까 점점 기분이 안 좋아지는 것 같기도 했지만,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빠르고 효과적으로 알려 주려고 이러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저는 선배님이 시키는 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만약 하늘에 별을 따오라고 하면, 제가 어떻게 해서든 개인 우주선을 구매할 방법을 찾아서…….”
“우진아.”
흥분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는 정우진을 진정시키기 위해, 일단 차분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내 부름에 거의 광신도처럼 떠들던 정우진의 말소리가 뚝 그쳤다. 새하얀 얼굴이 점점 붉어지는 걸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장기 자랑은 나중에 하고 일단 밥이나 마저 먹자.”
내 말에 정우진은 그제야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닫기라도 한 건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혼자만 떠들었죠…….”
“아니, 떠들고 뭐 그런 건 상관없는데……. 아무튼 밥이나 먹자.”
“네, 근데 선배님. 저는…….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제가…….”
밥부터 먹고 다시 좀 생각해 보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옷깃을 잡았다. 너무 자그마한 힘이라 옷이 당겨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은 귀까지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제가 얼마나 좋은…….”
“……?”
“좋은……. 신랑감인지 알려 드리고 싶어서…….”
“…….”
수줍은 듯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내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해졌다.
신랑감이라니? 잘못 들었나? 뭔 소리지?
시선을 내리깔고 몸을 배배 꼬고 있던 정우진이 슬쩍 나를 보더니 내 표정이 이상하다는 걸 확인하기라도 했는지 멈칫했다. 그러더니 살짝 고개를 갸웃하곤 내 눈치를 보며 말을 바꿨다.
“……신붓감?”
“…….”
“좋은 신붓감인지, 알려 드리고 싶어서…….”
“…….”
아니, 씨발. 그거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