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6/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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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상대로 그런 상상을 했다는 것에 화가 나기보다는 그냥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여덟 번도 아니고 팔만 번이라는 숫자 때문일까? 숫자가 너무 커서 잘 와닿지도 않고, 그냥 이 모든 것들이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연극 같았다.

“제 마음은 제가 제일 잘 알아요.”

“그래, 그렇겠지…….”

“그러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마세요.”

“…….”

별로 의심을 한 건 아니었다. 그냥 혹시나 싶어서 한 말이지…….

“저번부터 자꾸 그런 말씀을 하시니까 제가 너무 헷갈리게 행동한 건 아닌가 싶어서 좀 걱정이에요.”

속으로 한숨만 내쉬며 욕실 타일만 빤히 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너무 과하면 독이 될까 봐 나름대로 잘 조절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봐요. 그럼 제가 지금부터는…….”

“아니, 그러지 마. 지금도 충분히 과하니까.”

과하다 못해 넘치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가 당황해서 다급히 말하자 문 너머로 억울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왜 자꾸 제 마음을 의심하세요? 제가 처신을 잘 못 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충분히 사랑한다는 티를 많이 냈어야 했는데, 제가 자꾸 선배님을 헷갈리게 하니까…….”

“아니라고!”

듣고 있기 괴로운 말이라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끊자 정우진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럼 제가 어떤 마음으로 이러고 있는지 아시는 거예요?”

“…….”

“역시 모르시는 거 같으니까 제가…….”

“야.”

“우진이라고 좀 불러 주시면 안 돼요? 자꾸 야, 라고 하니까 너무 남 같잖아요.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매니저한테는 엄청 다정하게 부르면서.”

정우진이 자꾸 저러니까 내가 이름을 못 부르는 거다. 비슷한 예로 유노을도 그랬다. 그냥 내가 편할 대로 부르다 보면 이름만 부를 때도 있고, 성도 붙여 부를 때도 있는데 저렇게 대놓고 이름만 부르라고 하면 왠지 그때부터 의식이 된다고 할까?

그냥 내 마음대로 부르게 내버려 두면 좋을 텐데, 자꾸 저렇게 주문을 하니까 그게 문제였다.

하여튼 짜증 나는 새끼…….

“선배님.”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정우진이 다시 날 불렀다.

“제가 싫으신 건 아니죠?”

“…….”

“막 얼굴만 봐도 토할 거 같고 소름 끼치고 죽여 버리고 싶은 건 아니지 않아요?”

“……갑자기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말하는 건데?”

살면서 여태껏 저런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 내가 황당하다는 듯 묻자 정우진이 작게 웃었다.

“그러면 한 번쯤은 만나 봐도 괜찮지 않아요?”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나는 남자를…….”

“저도 남자 안 좋아해요. 살면서 한 번도 상대의 성별이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끌려 본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을 보면서 두근거렸던 적도 없어요.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저도 남자를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어쩐지 대화가 제자리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계속 똑같은 말만 지껄이고 있는 정우진에게 화를 낼 수가 없었다.

정말 싫었다면, 거절했는데 왜 자꾸 껄떡거리느냐 욕이나 한 바가지 하고 아구창이라도 쳐 날려 버리면 끝날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러지 못하고 계속 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들어 주고 있는 이유는, 어쩌면 그렇게 엄청나게 싫은 건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

나는 정우진이라는 재앙을 피해 화장실에 숨어 변기 뚜껑 위에 앉은 채, 그동안 마주하지 못했던 내 마음을 어쩌면 처음으로 인정해 버렸다.

구구절절, 지리멸렬하게 이런저런 변명을 해 대고 있지만 사실이 그랬다.

“제가 뭐 결혼을 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평생 함께 살아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죽을 때까지 영원히 제 옆에 묶어 둘 거라고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만나다가 별로다 싶으면…….”

“…….”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도 될 문제고…….”

“…….”

듣고 보면 그것도 맞는 소리이기는 했다.

뭐, 내가 정우진을 잠깐 만난다고 당장 결혼을 해야 된다거나, 운명의 실 같은 게 엮여서 평생 함께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남들이 다 그러는 것처럼 한번 사귀었다가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원래 사귀기 전에는 다들 호감으로 시작하잖아요. 처음부터 뭐 천년의 사랑을 약속하면서 만나는 것도 아니고……. 사귀면서 서로 알아가는 거지.”

“…….”

그래, 이 말도 맞는 말이다.

“그러니까 제가 정말 역겨워서 당장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만 아니면 일단 한번 만나 보는 것도 좋은 생각 아닐까요?”

“…….”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한다.

정우진이랑 사귀다가 헤어지면 앞으로 우리는 다시 보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여기가 무슨 할리우드도 아니고, 나는 전 애인이랑 친구 먹는 짓 같은 건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겨우 만났는데……. 고작 그런 것 때문에 굳이 모험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애초에 나는 정우진을 연애 상대로 본 적도 없었고…….

물론 어릴 땐 좋아하긴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어린 시절이었다. 뭣도 모르고……. 이 세상에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우리 둘뿐이라고 생각했던 시절이라 의지하고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선배님은 제가 귀여워 보였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심각한 표정으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뜬금없이 물었다. 길게 생각할 것도 없이 입을 열었다.

“어.”

“거짓말 치지 마세요.”

“무슨 거짓말?”

“보면 다 알아요. 선배님이 제가 개수작 부리는 걸 한눈에 안 것처럼, 저도 다 알아볼 수 있어요.”

뭔 개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을 이었다.

“인상 찌푸리고 눈썹 꿈틀거리고 표정이 굳고 그런 사소한 것만 봐도 다 안다고요. 제 취미가 선배님 관찰하기예요. 제가 귀여워 보일 때마다 맨날 심각한 표정으로 욕하시잖아요. 당황하면서……. 인정하기 싫어서 그런 거 다 알아요.”

“…….”

“원래 처음에는 그런 별것도 아닌 사소한 것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사랑이 되는 거예요. 지금 당장 너무 사랑스럽고 깜찍해서 이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겠다는 생각으로 사귀는 게 아니라고요. 그러니까 상대가 귀여워 보이면 고작 그런 걸로도 사귈 이유로는 충분하다는 뜻이에요.”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멀뚱멀뚱 닫힌 문을 보다가 물었다.

“너 무슨……. 책 보고 읽고 있니?”

“말이라도 잘해야죠. 육탄전 같은 걸 할 수도 없는데…….”

정우진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리자 나도 모르게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육탄전 했잖아.”

“제가 언제요?”

“맨날 넘어지고 불쌍한 척하고……. 다친 척하고. 아까도 내 손 잡고 네 몸 문대게 만들었잖아. 그게 육탄전이지.”

이거 말고도 더 많았던 거 같은데, 막상 말을 하려니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원래 옥장판 파는 사기꾼 새끼 앞에서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 법이었다.

“그게 육탄전이에요? 저랑 생각하는 게 좀 다르시네요.”

“…….”

그 말에 황당해서 뭐라고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무서워서 네가 생각하는 육탄전이라는 건 뭐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겠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자꾸만 말리는 것 같아서 겨우 쥐어짜 내 입을 열었다.

“아무튼 좀 티라도 안 나게 하든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문득 문 너머로 긴 한숨 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뭐.”

시비를 거는 듯한 내 말투에 정우진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티가 안 나면 그게 수작이에요? 티를 내야 선배님이 알죠. 쟤가 날 좋아해서 지금 개수작을 부리고 있구나, 하고.”

“…….”

저 개놈 새끼……. 하여튼 사람 말문 막히게 하는 데에는 선수라니까.

애꿎은 문만 도끼눈을 뜨고 노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크게 한숨을 내쉬며 세면대에 물을 틀어 차가운 물로 손을 씻었다. 그런데도 별로 진정이 되는 것 같지 않아 결국 세수를 했다.

마음이 복잡해 뺨을 때리듯 거칠게 세수를 하자 온 사방으로 물이 다 튀었다. 한참 세수를 하다가 수건으로 얼굴을 벅벅 닦고 있는데,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기다릴 수 있어요.”

“…….”

“헤어지고 난 뒤로 계속 기다리기만 했는데……. 지금은 얼굴 보면서 대화도 할 수 있고, 전화도 할 수 있고, 같이 밥도 먹을 수 있잖아요. 내가 누구인지도 알고……. 그러니까 이 정도는 괜찮아요.”

“…….”

목소리에 수심이 가득해서 어쩐지 나까지 기분이 가라앉았다. 하지만 뒤이어 나오는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동안 선배님이 다른 사람이랑 스캔들이 난다거나, 누굴 만난다거나 사귄다거나 그러면 못 참겠지만…….”

“못 참으면 네가 뭐 어쩔 건데?”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으며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리질 않았다.

“…….”

“…….”

조금 더 기다리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뭐 어쩔 거냐고.”

“…….”

“……왜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 대답을 재촉해 봤지만 정우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나는 결국 문 쪽으로 다가가 문을 가볍게 주먹으로 쳤다.

“야.”

그래도 대답이 없어 하는 수 없이 문고리를 잡고 열었다. 천천히 문을 열자 바로 정우진이 문 바로 옆의 벽에 등을 기대고 무릎을 안은 채 앉아 있는 게 보였다.

“…….”

“…….”

내가 나왔는데도 정우진은 여전히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자세 그대로였다. 분명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정우진을 내려다보다가 멋쩍은 표정으로 무릎을 굽혀 얼추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야.”

“…….”

“정우진.”

“…….”

바로 옆에서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손을 뻗어 어깨를 잡아 살살 흔들자 귓가로 작게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혹시나 싶어 잔뜩 굳은 얼굴로 물었다.

“너 설마 우냐?”

내 물음에 그제야 정우진이 고개를 들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을 얼굴이 세수라도 한 것처럼 눈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커다란 눈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고 있는 진귀한 광경을 보며 당황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코맹맹이 소리로 말했다.

“저 그러면 너무 가슴 아파서 죽을지도 몰라요.”

“…….”

“상상만 해도 숨을 잘 못 쉬겠어요. 너무 아파서 그 사람이 누구든 목 졸라 죽여 버릴지도 몰라요. 저 지금 누가 심장을 꽉 쥐고 안 놔주는 거 같아요. 생각만 해도 이렇게 힘든데,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나면 전 어떻게 살아요? 차라리 죽을래요.”

“…….”

뭔가 중간에 이상한 말을 한 것 같았지만, 그런 것보다 끅끅 울면서 주절주절 말하는 그 모습이 뭔가 좀…….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적당한 단어가 떠오르질 않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정우진이 흘러넘치는 눈물을 주체하질 못하고 눈가를 비비며 고장 난 라디오처럼 두서없이 나불거렸다.

“혹시 다른……. 다른 사람 좋아지면, 꼭 저한테 말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아니, 미리 알면……. 그래도 어떻게 뭔가, 제가 할 수 있는 적당한……. 아니, 근데 꼭……. 꼭 그렇게 다른 사람을 좋아해야겠어요? 그 사람은 어차피 저보다 선배님을 더 좋아하지도 않을 텐데. 꼭 그렇게……. 저는, 제가 진짜로 엄청 좋아하거든요……. 진짜예요. 진짜 엄청이요, 진짜……. 진짜로 엄청나게 좋아하고…….”

“…….”

“진짜 많이…….”

“…….”

거짓말이라고 한 적도 없는데, 정우진은 마치 자신의 마음이 부족해 내가 받아 주지 않고 있는 것처럼 절실하게 그것을 증명하려 하고 있었다.

엉망이 된 모습으로 간절히 말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니, 촬영을 할 때 정우진이 밤하늘을 보며 울었던 날의 밤처럼…….

나는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그냥 한번 만나 볼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정우진의 말소리가 뚝 멈췄다. 마치 그대로 시간이 정지한 듯, 우는 소리도 헐떡거리던 숨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자세 그대로 잠시 굳어 있던 정우진이 놀란 토끼처럼 커다랗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

“…….”

멈춰 있는 세상에서 검은 바다 같은 눈만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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