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5/190)

130

대답을 하지 않으면 영영 놔줄 것 같지 않은 눈치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몇 번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더 힘을 줘 뿌리치듯 손을 떼어 내려고 했는데, 또 실패했다. 보통 이렇게까지 힘을 주면 좀 놔줄 법도 한데, 정말 끈질기기 그지없었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결국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손 좀 놔.”

“먼저 열 안 나냐고 물어봤잖아요. 그래서 확인해 보라고 하는 건데, 왜 아무 대답도 안 해요? 아까 저 찾은 적 있냐고 물어본 것도 대답 안 해 주고.”

“그래, 열 내렸다. 됐냐?”

입술을 삐죽삐죽하는 정우진에게 인상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말하자 그제야 세게 잡고 있던 손이 풀렸다. 손목이 아플 정도로 잡혀 있었던 터라 허공에 몇 번 털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정우진이 눈을 크게 떴다.

“어디 가요?”

“집에.”

“네? 갑자기 집이요? 혹시 화났어요? 제가 손 세게 잡아서? 아니면 계속 곤란한 거 물어봐서?”

“아니, 그건 아니고……. 아무튼 내일 다시 얘기하자.”

저게 재해인지, 인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재앙인 건 확실했다. 의자에서 일어난 정우진이 황급히 내 뒤를 쫓는 게 느껴졌지만, 더 이상 이곳에 있다가는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아 못 본 척 등을 돌렸다.

“선배님, 잠깐만요. 잠시, 앗!”

얼른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그때, 작은 비명과 함께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거실 한복판에 자빠져 있는 게 보였다.

“아…….”

급하게 따라오다가 발이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 건지, 꿈틀거리며 신음을 뱉던 정우진이 조금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나를 올려다봤다.

“…….”

“…….”

툭 치면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정우진은 일으켜 세워 달라는 것처럼 꼼짝도 하질 않고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모습이 마치 내 뒤를 쫓다가 넘어지기 일쑤였던 어린 시절의 유진이 같아서 결국 참고 있던 화가 터져 버렸다.

“너 도대체 왜 이러냐?”

일부러 이러고 있는 게 분명해서.

“좀 티라도 안 나게 하든가, 지나가던 쥐새끼도 네가 개수작 부리는 거 다 알겠다!”

“제가 무슨 수작을 부렸다고 그러세요?”

내가 언성을 높이자 정우진도 억울했는지 뻔뻔하게 똑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자빠져 있는 건 여전해서 마치 내가 괴롭히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니, 누가 약을 그렇게 처먹냐고! 등치 산만 한 다 큰 성인 남자가, 도대체 누가! 어? 누가 눈을 질끈 감고 어깨를 움츠리면서 알약을 그렇게 처먹어! 네가 뭐 다섯 살 먹은 애기냐?”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성인 남자는 그럼 약을 어떻게 삼켜야 하는데요? 그런 게 뭐 법전에라도 나와 있어요? 성인 남자는 눈 절대 감지 말고 부릅뜬 상태로 어깨 똑바로 펴고 약 먹으라고? 그냥 선배님이 저를 애기처럼 생각하니까 애기처럼 보이는 거 아니에요?”

“무슨 개소리야, 씨발! 내가 널 그렇게 보는 게 아니라, 네가 나이에 안 맞게 자꾸 그딴 행동을 하니까 짜증 나서 하는 소리지!”

약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내 손을 잡고 제 얼굴이나 목덜미에 억지로 문지르게 한 것도 그렇고, 방금 이딴 식으로 내 뒤를 쫓아오다가 넘어져서 불쌍한 척을 하는 것도 그렇고…….

포스트잇을 잔뜩 붙여 놓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뭐, 땅이 위로 가면 어쩌고저쩌고 이 지랄하면서 지붕…….

“지붕은 씨발, 염병…….”

내 앞에서 얼쩡거리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눈을 가린 뒤 자기가 누구인지 맞혀 보라고 하는 것만 같은 행동이었다.

황당하다 못해 어이가 없어서 잠시 머리를 짚고 있는 사이, 정우진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때를 노렸다는 듯 나를 지나쳐 중문 앞에 섰다. 그 모습이 마치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 같았다.

순식간에 퇴로를 빼앗겨 더는 물러설 곳이 없어져 버렸다. 혹시 넘어진 게 이걸 노렸던 걸까? 그냥 모른 척하고 나가 버렸어야 했는데.

“갑자기 어딜 간다고 그러세요? 밥도 다 안 먹었는데.”

“너 일부러 넘어진 거지?”

“아니요? 너무 급하게 따라가다가 발에 걸려서 진짜 넘어진 거예요. 지금 무릎 아파 죽겠어요. 보실래요? 멍들었을지도 몰라요.”

“멍 안 들었으면 어쩔래?”

도끼눈을 뜨고 묻자 정우진이 살그머니 다리 한쪽을 내 앞으로 내밀더니 재수 없는 표정으로 수줍게 말했다.

“확인해 보세요.”

“…….”

진짜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나는 그만 잠시 넋을 잃고 말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화들짝 정신을 차린 나는 계속 말을 섞었다가는 나만 불리해질 것 같아서 잠깐이나마 대피할 곳을 찾았다. 밖으로 나갈 수가 없으니, 임시방편으로 가장 가까운 욕실 안으로 들어가 쾅, 문을 닫았다.

문까지 잠그고 나니, 정우진이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혹시 몰라 문고리를 꽉 잡고 있자 정우진이 노크를 했다.

“갑자기 거기에는 왜 들어가세요?”

“…….”

“씻으실 거예요?”

“…….”

“선배님, 주무세요?”

“…….”

“왜 아무런 대답을 안 하세요?”

“…….”

목소리에는 걱정이 가득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었다.

정말 좆 됐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떡하면 좋지? 방법이 있나?

씨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좀 진정되면 나오세요.”

초조한 마음에 식은땀을 흘리며 속으로 쌍욕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난리가 나서 사고도 제대로 되지 않는 나와 달리, 정우진의 목소리는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꽉 잡고 있던 문고리를 천천히 놓은 뒤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급하게 들어오느라 불도 안 켰는데, 내가 어두울까 걱정이 됐던 건지 정우진이 친절하게 불까지 켜 줬다.

“…….”

핵폭탄 같은 개수작에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가 없었다. 눈앞이 어질어질해서 잠깐 눈을 질끈 감고 있다가 변기 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정우진이 문 앞에서 저러거나 말거나 그냥 힘으로 밀어붙여서 밀치고 나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그건 불가능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우진에게 힘을 쓰라니, 그럴 바에 차라리 창문을 깨고 밖으로 뛰어내리는 게 훨씬 나았다.

“씨발…….”

막막하니 나오는 게 욕밖에 없었다.

일단 이 집에서 나가든 말든,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내가 계속 이렇게 등신 팔푼이 새끼처럼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이유가…….

정우진이 내게 고백했을 때, 거절하면 다시는 나를 보지 않겠다고 했었다. 물론 그 말은 하루도 지켜지지 않았지만, 사실 나는 결국 영영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렇다고 내가 정우진을 받아 줄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정우진이 유진이라는 걸 알았는데, 내가 과연 영영 보지 않겠다는 그 말에 그러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

지금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정우진은 아마 계속 저렇게 정신 나간 새끼처럼 개수작을 부릴 텐데……. 보고 있으면 황당해서 눈앞이 하얘지는 저런 짓거리를 계속할 텐데……. 그럴 바엔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하지 말고, 좀 알 듯 말 듯 그렇게 하면 혼자 최면이라도 걸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정신 승리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새벽에 찾아와서 멤버들이 있는데도 펑펑 울면서 징징대는 걸 보면 얼굴도 엄청 두꺼운 게 확실했다.

“…….”

진짜…….

진짜로, 큰일 났다…….

“씨발…….”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다가 자연스럽게 나온 욕지거리를 듣기라도 했는지 문 너머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님.”

“…….”

“생각이 많으면 한 번 따뜻한 물로 씻어 보세요. 저는 씻다 보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생각도 좀 정리가 되고 그러던데…….”

뭔 소리를 할까 싶어 들어 봤는데 상상도 못 한 개소리에 머리가 띵해졌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잠깐 숨을 고른 뒤에 힘없이 입을 열었다.

“야, 너 혹시…….”

“네?”

“어릴 때 내가 너 데리고 여기저기 다녔잖아. 그런 걸 사랑이라고 착각한 거 아닐까? 오랫동안 만나지도 못했으니까, 뭔가 그런……. 보정 같은 것도 들어갔을 거고…….”

오랫동안 생각하다 보면 옛 추억들은 미화가 되기 마련이었다.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으니 그 마음도 더 애틋해지는 게 당연했다. 혹시 그런 걸 사랑이라고 착각한 게 아닐까 싶어 물었는데, 정우진은 단호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팬심으로 그런 것도 아니고요. 선배님이 오빠인 거 알고 좋아진 거지, 그 전에는 어나더인지 뭔지 그런 건 관심도 없었어요. 있는지도 몰랐고.”

“…….”

어나더인지 뭔지라니…….

잠깐 상처를 받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흔든 뒤에 다시 혹시나 싶은 가정을 해 봤다.

“내가 너 엄청 챙겨 줬잖아.”

“네.”

“막 업어 주고……. 먹을 것도 많이 주고. 너 머리 감는 법도 잘 몰라서 내가 가르쳐 줬잖아. 젓가락질하는 것도 알려 주고. 따지고 보면 내가 널 거의 키운 거나 다름없지.”

“……그렇기는 해요.”

대답이 조금 늦기는 했지만, 어쨌든 정우진도 내 말에 동의했다.

“네가 나한테 갖는 감정이……. 사랑이기는 한데, 이게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니라 약간……. 뭔가 부모를 공경하는 그런 마음 같은 게 아닐까? 그럴 수도 있잖아. 내가 널 얼마나 정성스럽게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키웠는데.”

찬찬히 설득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황당하다는 듯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제가 선배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효심이라고요?”

“……그럴 수도 있지 않겠냐? 아니, 너 아까 그랬잖아. 이제는 네가 날 업어 주겠다고 그러고, 잠들기 전에는 막 생선 가시도 발라 주겠다고 그러고…….”

그런 건 보통 늙은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닐까?

그냥 되는대로 내뱉고 있었는데 뭔가 말을 하다 보니까 그럴듯하기도 했다. 내 말에 내가 설득을 당해서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고 있는데, 잠시 말이 없던 정우진이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선배님은 부모님이랑 키스하는 상상을 해요?”

“…….”

“저는 지금까지 한 팔만 번 정도 했어요.”

“…….”

“어쩌면 넘을지도 몰라요.”

“…….”

“듣고 있어요?”

“……어, 그래…….”

많이도 했네, 이 불효자 새끼…….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