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33/190)

128화

몸을 뒤척이자 부스럭하고 작게 이불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부드러운 베개에 얼굴을 몇 번 비비다가 반대로 돌아누워 편안한 자세로 몸에 힘을 뺐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들려고 하던 찰나에 눈을 떴다.

“…….”

앞에 뭐가 있는지 형체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아직 밤인가? 근데 여기가 어디지?

“…….”

집인 거 같지가 않아서 눈만 깜빡깜빡하다가 손을 뻗어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았다. 원래 잘 때 늘 두던 자리가 있는데, 아무리 더듬어도 잡히는 게 없어서 결국 상체를 일으켰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조금씩 뭐가 보이기 시작했다.

“음…….”

아직 잠이 덜 깬 머리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차근차근 생각을 하다가, 나는 곧 이곳이 정우진의 집이라는 걸 깨달았다. 분명 정우진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에 가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같이 잠들었나 보다.

그보다 정우진은 어딜 간 거지?

침대에서 일어나 발을 질질 끌면서 방 안의 불을 켰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문득 문 앞에 붙어 있는 노란색 포스트잇이 보였다.

일어나셨어요? 저 잠시 마트에 다녀올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포스트잇에 얼굴을 바짝 대고 멀뚱멀뚱 그걸 보다가 떼어 내 다시 한참을 들여다봤다. 뒷목을 긁적거리면서 문을 열고 나가자 이번에는 맞은편 벽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금방 갔다 올 테니까!!! 가지 마세요ㅠㅠ

나는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또 한참 그걸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아직 잠이 좀 덜 깨서 상황 파악이 빠르게 되지 않아 그런 것도 있지만, 정우진의 이런 행동들이 황당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벽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떼어 낸 뒤 손에 들고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아일랜드 식탁에 두고 물을 한 잔 마시려고 했는데, 주방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두 개나 발견했다.

아일랜드 식탁 위의 포스트잇에는,

배고파도 조금만 참으세요. 제가 맛있는 거 사서 갈게요.

라고 적혀 있었고, 냉장고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에는,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어요ㅠㅠ

라고 적혀 있었다.

“…….”

도대체 이걸 어디에 얼마나 붙여 둔 거야? 갑자기 궁금하기도 하고 좀 웃겨서 피식 웃다가 본격적으로 포스트잇을 찾아보기로 했다.

거실 소파, 테이블 위, 창문에 두 개, 커튼에 하나, 바닥 정중앙에 하나, 그리고 욕실 안 거울에도, 욕조 모서리, 작은 방의 문고리, 가스레인지 후드 위 등등…….

보물찾기를 하듯 샅샅이 뒤져서 정우진이 남긴 메모를 스무 개나 발견했다. 가장 마지막에 발견한 건 중문과 현관문 앞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이었다.

여긴 왜 왔어요?ㅠㅠ 빨리 돌아서 다시 들어가세요ㅠㅠ

결국 여기까지 오셨네요... 문 열면 보안업체에 바로 연락 가니까 제발 열지 마세요... 제발요ㅠㅠ

어디 멀리 간 것도 아니고 고작 마트에 다녀오겠다는데, 집주인도 없는 집을 비워 두고 갈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내가 무조건 집에 갈 거라고 생각한 건지 정우진은 지나치게 필사적인 내용으로 메모를 여기저기 남겨 둔 게 웃겼다.

특히 현관문 앞에 붙어 있는 내용이 제일 웃겼다.

문 열면 정말 보안업체에 연락이 갈까? 궁금해서 한 번 열어 보고 싶었지만 만약 이게 사실이면 소란이 일어날 것 같아서 그냥 도로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벽 구석에 붙어 있는 포스트잇 하나를 더 발견했다.

“도대체 얼마나 붙여 둔 거야.”

설마 시간을 끌기 위해 이런 걸 여기저기 붙여 둔 걸까? 내가 포스트잇을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테니까 그걸 노리고? 그게 아니라면 굳이 이런 걸 이렇게 붙여 둘 이유가 없었다.

“치밀한 새끼…….”

아직 다 발견한 건지, 아닌지도 모르는 포스트잇을 모아 다시 한 번씩 보고 있는데 정말 아무 말이나 써 놓은 것도 있었다.

제가 웃긴 얘기 해 드릴까요? 땅이 위로 올라가면 뭐게요? 지붕~

“…….”

미친놈인가, 진짜…….

속으로 황당해하고 있었지만 자꾸 실실 웃음이 나오는 건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지붕~ 같은 거나 보면서 웃고 있는 내가 한심하기도 했지만, 도저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어서 혼자 계속 웃고 있는데 현관문에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포스트잇을 두고 얼른 현관문 쪽으로 가자 정우진이 뭘 바리바리 싸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아, 선배님. 일어나셨어요?”

날 보자마자 정우진이 화색을 띠며 웃었다.

“뭘 그렇게 사 왔어?”

“아, 이거 저녁 먹을 거랑…….”

“저녁?”

순간 놀라서 눈을 크게 뜨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포스트잇을 찾느라 시간을 확인하는 것도 잊었다. 밖이 어두운 걸 보면 제법 오래 잔 것 같은데, 나도 그동안 잠을 좀 설쳐서 피곤했나 보다.

“지금 몇 시야?”

“아, 핸드폰 못 찾으셨어요?”

“못 찾았냐고? 무슨 소리야?”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정우진이 닫힌 현관문을 힐끗 봤다가 다시 나를 보며 말했다.

“제가 포스트잇 붙여 둔 거 보셨죠?”

“봤지.”

“음……. 혹시 집에 가실까 봐 제가 핸드폰이랑 신발도 숨겨 두고 갔었거든요. 모르셨어요?”

“…….”

멀뚱멀뚱 정우진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정우진이 멋쩍은 표정으로 웃다가 신발장을 열어,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뭔가가 담겨 있는 비닐과 포장도 뜯지 않은 박스 여러 개를 치우자 가장 깊숙한 곳에서 내 운동화가 나왔다.

황당한 표정으로 그걸 보다가 다시 주섬주섬 꺼낸 걸 치우고 있는 정우진에게 물었다.

“핸드폰은 어디에 뒀는데?”

“그건 욕실에…….”

“욕실? 없던데?”

분명 욕실도 확인했는데 핸드폰을 발견하진 못했다. 물론 보물찾기를 하듯 꼼꼼히 확인하진 못했지만……. 정우진의 뒤를 따라가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욕실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수납장에 아, 하고 물었다.

“설마 저 안에 있어?”

“네, 이거 안 열어 보셨어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수납장을 열었다. 안에는 수많은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샴푸, 린스, 트리트먼트, 칫솔, 치약, 바디 워시 등등……. 조금 놀란 얼굴로 보다가 물었다.

“이건 왜 이렇게 붙여 놨어?”

“혹시 일어나서 씻을 때 헷갈릴 수도 있을까 봐요.”

포장도 뜯지 않은 칫솔 하나를 가져와 포스트잇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갑자기 샴푸 곽처럼 보이는 걸 꺼냈다. 그러더니 종이 박스를 열어 안으로 손을 넣어 핸드폰을 꺼내는 게 아닌가.

“설마 거기다가 숨겨 놨냐?”

“네.”

“…….”

저건 내가 수납장을 열어 봤어도 못 찾았을 것 같았다. 핸드폰을 건네받고 어이없다는 듯 웃자 정우진이 고개를 옆으로 젖히며 물었다.

“혹시 그거 보셨어요? 땅이 위로 올라가면?”

“지붕? 너 그런 건 도대체 왜 써 놨냐?”

“그냥 웃기라고……. 재미있었죠?”

“아니?”

내가 정색을 하자 정우진이 작게 웃으며 어깨를 들썩거렸다. 별것도 아닌데 뭐가 저렇게 좋은 건지, 그 모습이 꼭 나뭇잎이 굴러가는 걸 보며 웃는 어린애 같기도 했다.

“마트에서 뭐 사 왔는데?”

“아, 배고프시죠? 제가 금방 해 드릴게요. 밀푀유 나베 드셔 보셨어요? 끓이기만 하면 되는 거라 금방 만들 수 있어요.”

정우진이 후다닥 욕실에서 나가 마트에서 사 온 걸 정리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기웃거리다가 나도 같이 정리하며 저녁 준비를 했다.

나는 얇게 잘린 고기와 배추를 겹겹이 쌓고, 정우진은 육수를 준비했다. 그냥 그렇게 다 때려 넣고 끓이기만 하면 되는 거라 별로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버너를 가지고 와 식탁에 앉아 끓이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저 아까 잘 때 선배님이 처음 밤하늘 보여 줬던 날 꿈 꿨어요. 같이 자서 그랬나?”

“밤하늘? 아, 처음 나왔을 때인가?”

보글보글 끓고 있는 육수를 국자로 떴다가 부었다가 반복하며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때 진짜 엄청 놀랐었는데.”

“왜?”

“그냥……. 햄버거도 너무 맛있었고, 그렇게 멀리까지 간 것도 신기했고, 하늘도 너무 예쁘고……. 업어 준 것도 너무 좋았고.”

정우진이 양손으로 얼굴을 받친 채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분위기가 이상할 것 같아서 나는 필사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아니, 이미 아까 음식을 준비할 때부터 좀 이상한 것 같기는 했지만…….

“이제는 저도 많이 컸으니까 제가 업어 드릴게요.”

“안 업어 줘도 돼.”

“왜요?”

“난 잘 걸으니까.”

황당하다는 투로 대답하자 정우진이 웃었다. 아까부터 별것도 아닌 말에 자꾸 웃고 있었다. 내가 배추를 자르다가 별생각 없이 대각선으로 잘랐는데, 그것도 보고 웃기다고 혼자 옆에서 키득키득해서 주춤했던 게 떠올랐다.

“다리 아플 수도 있잖아요. 피곤할 수도 있고.”

“됐으니까 먹어. 다 익은 거 같은데.”

어차피 얇게 자른 소고기라 오래 끓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육수도 한 번 끓였던 걸 넣은 거라……. 앞접시에 대충 담아서 먼저 건네주자 정우진이 양손으로 그걸 받았다.

“저도 담아 드릴게요.”

“내가 그냥 알아서 퍼먹을게.”

이게 무슨 서로 술잔에 술 따라 주는 것도 아니고, 국자를 가지고 가려는 정우진의 손을 피해 얼른 내 접시에 배추와 고기를 담았다. 정우진이 잠깐 입술을 삐죽거리는 것 같았지만 못 본 척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등 뒤로 식은땀을 흘리며, 그냥 빨리 먹고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설프게 젓가락을 든 정우진이 고기를 집었다가 밑으로 떨어뜨리고 있는 게 보였다.

한 번도 아니고, 계속…….

“왜 그래?”

젓가락질을 처음 해 보는 사람처럼 어설픈 동작에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그때 정우진이 젓가락을 들고 있는 손을 파르르 떠는 게 보여 말꼬리를 흐렸다. 새끼손가락에 깁스가 되어 있는 손이었다.

“손가락 아파?”

“아까 짐 들고 오다가 좀 무리했나 봐요.”

“뭐? 아니, 그걸 왜 지금 말해?”

“아깐 괜찮았어요. 근데 많이 아픈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손만 살짝 떨리는 거라, 앗.”

말을 하면서 배추 한 조각을 집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지자 정우진이 화들짝 놀랐다. 배추가 그릇 안이 아니라 무릎 위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얼른 티슈를 뽑아 건네자 정우진이 그걸 받으며 불쌍한 척을 했다.

“고마워요.”

“……포크 없어?”

“네, 없어요.”

“숟가락은?”

“숟가락으로는 못 먹을 거 같은데……. 국물은 먹을 수 있기야 하겠지만.”

흘린 걸 다 닦은 정우진이 그렇게 말하며 다시 힘겹게 젓가락을 들었다. 조금 전보다 팔은 더욱 떨리고 있었다. 저 정도면 거의 경련이나 다름없었다.

“…….”

이제는 아예 배추 한 조각조차 집지도 못하고 헛손질을 하고 있었다. 배추나 고기를 집을 생각도 없이, 국물만 젓가락으로 휘저으며 달그락달그락하던 정우진이 힐끔힐끔 나를 쳐다봤다.

먹여 달라고 저러는 건가?

“…….”

무슨 개수작을 저렇게 다 티가 나게 부리는 거지? 물론 진짜 손이 아플 수도 있겠지만, 지진이라도 난 듯 발발발 떨고 있는 걸 보면 누가 봐도 연기라고 생각할 것이다. 무엇보다 자꾸 내 눈치를 보는 저 눈깔이 화룡점정이었다.

“앗.”

그때 정우진이 팔을 떨다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식탁 아래로 떨어뜨렸다.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젓가락을 주워 싱크대 안에 넣고 가위를 가지고 왔다. 그리고 접시 안의 내용물을 전부 잘게 자른 뒤, 정우진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 줬다.

“이러면 쉽게 먹을 수 있지?”

“……이거 너무 개밥 같지 않아요?”

“어차피 입에 들어가면 똑같아.”

“아니, 그래도……. 식감도 다를 것 같고……. 이게 무슨 죽도 아니고…….”

“입에 많이 넣고 씹으면 똑같다니까.”

내 말에 정우진이 힝, 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바람에 하마터면 욕을 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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