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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130/190)

125화

씻고 나와서 노곤해진 건지, 누가 봐도 얼굴에 졸림이 가득했는데 정우진은 벌칙 게임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기를 쓰면서 버티고 있었다.

“강이라고 해서 가 봤는데 엄청 작은 거예요. 폭도 작아서 그냥 몇 발자국 걸으면 끝나고……. 다리도 엄청 짧고……. 아, 몇 발자국은 그냥 제가 약간 오버한 거예요. 사실 몇 발자국까지는 아니었어요. 아무튼 그 다리 위에 아이스크림 노점상 같은 게 있는 거예요.”

이불을 덮고 내 쪽으로 돌아누운 채 정우진이 어눌한 발음으로 끊임없이 말했다. 나는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딸기 맛 아이스크림도 있고 초코 맛도 있고……. 근데 선배님 초코 우유 좋아하시잖아요. 그래서 제가 초코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먹었거든요? 제가 원래 군것질을 잘 안 하는데, 진짜……. 진짜, 진짜, 엄청 맛있는 거예요. 너무 달지도 않고, 초코 맛도 엄청 진하고, 시럽 같은 맛도 아니고……. 살짝 쌉쌀하기도 하고, 아무튼 진짜 너무 맛있었어요.”

도대체 다리 위에서 파는 초코아이스크림이 맛있단 소리를 몇십 분이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초코칩 같은 건 없었고, 그냥 쫀득쫀득한 초코 맛 아이스크림만 딱 있었는데……. 빵이나 크래커 같은 과자에 발라 먹어도 되게 맛있을 것 같았어요. 분명 선배님도 좋아하실 것 같아서, 할 수만 있었으면 냉동고 같은 곳에 담아서 가지고 오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되니까 너무 아쉬웠어요.”

그 말에 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거리자 정우진이 이젠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눈으로 나를 보며 웃었다.

“다음에 같이 가서 먹을래요?”

초코 맛 아이스크림 하나 먹겠다고 비행기까지 타야 하는 건가 싶었지만, 나는 빨리 정우진을 재우고 싶은 마음에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래, 다음에 기회 되면.”

“어떻게 하면 기회가 와요?”

“……그냥……. 어쩌다가 우연히 너랑 내가 거기에서 만나면?”

말을 해 놓고 보니까 그냥 너랑 같이 아이스크림 안 먹겠다는 뜻인 것 같아서 좀 당황했는데, 정우진이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흠…….”

설마 우연히 만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하고 있는 걸까? 정말 진지한 표정이라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근데 너 안 자냐?”

“아직 잠이 안 와요.”

“우진아, 너는 언제부터 그렇게 거짓말을 잘하게 됐니?”

“저 한 고등학생일 때부터?”

생각도 하지 않고 뻔뻔하게 대답하는 걸 보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자 정우진도 날 따라 웃었다.

“고등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거짓말을 잘하게 돼?”

“그냥……. 선배님은 고등학교 다닐 때 어땠어요?”

“나? 나는 그냥 뭐……. 평범했지. 딱히 공부를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았고, 유별나게 친구가 많거나 적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엄청 평범한 학생?”

“인기 많았어요?”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사실 나에게는 학창 시절의 추억이라고 할 만한 게 딱히 없어서 대답하기가 곤란했다. 중학생일 때부터 나이를 속이고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하고, 불법이 아니라면 푼돈을 주는 하찮은 일이라도 시켜만 주면 뭐든 했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그냥 잠만 자기 바빴다.

점심시간이 되면 그때야 일어나서 두 그릇씩 먹고…….

“아, 급식 진짜 맛있었는데.”

갑자기 든 생각에 내가 동문서답을 하자 정우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급식이요?”

“그땐 학교에서 나오는 케첩 맛밖에 안 나는 스파게티가 왜 그렇게 맛있었을까? 미니 돈가스 같은 것도 지금 먹으면 별로 특별할 게 없는 냉동 돈가스였는데, 엄청 맛있었고…….”

내 말에 정우진이 자기도 뭔가 생각이 났는지 입을 열었다.

“학교 다닐 때 먹는 건 평소에 먹는 거랑 좀 다른가 봐요. 저도 원래 잼 바른 빵 같은 거 안 좋아하는데, 모닝 빵이랑 일회용 딸기잼 아세요? 구부리면 톡 하고 가운데 살짝 벌어지면서 잼 나오는 거요. 그런 것도 안 좋아하는데, 학교 다닐 땐 되게 맛있게 먹었던 거 같아요.”

“아, 그거 알지. 그거랑 크림 스프 꼭 같이 나오지 않았냐? 우리 학교에서는 거의 세트였는데.”

“저희 학교에서도 같이 나왔어요. 딸기 잼 발라서 스프에 빵 찍어 먹고 그랬는데.”

왠지 정우진이 그랬다니까 잘 상상이 가질 않았다. 뭔가 내 안의 정우진은 음식도 깨작거리고, 잘 먹지도 않는 그런 사람인데……. 근데 또 유진이라고 생각하면 스프 바닥까지 핥아 먹을 것 같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메뉴를 못 봐서 그날 뭐가 나오는지 몰랐는데……. 맑은 감잣국 같은 게……, 음. 나온 거예요. 그래서 먹었는데 감자가 아니라 토란이었고…….”

“진짜 개빡쳤겠다…….”

갑자기 이입이 돼서 질색하는 표정으로 말하자 정우진이 어깨를 들썩거리면서 웃었다. 말하는 것도 그렇고, 이젠 아예 눈도 못 뜨는 걸 보니 당장 잠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선배님은 어떤 게 나올 때 제일 싫었어요?”

“난 딱히 가리는 게 없어서……. 그냥 다 좋았던 거 같은데. 아, 무슨 생선 튀김 같은 게 나왔는데 너무 비려서 그건 좀……. 타르타르소스에 찍어 먹는 그런 생선 튀김이 아니라, 생선을 그냥 토막 내서 튀긴 건지, 뼈도 그대로 있었고……. 아무튼 진짜 별로였어.”

“가시 바르는 거 싫어하세요?”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나?”

“그럼 다음부터는……. 제가 발라 드릴게요, 가시…….”

속으로 한 십 초 정도만 더 세면 완전히 잠들 것 같았다. 슬쩍 옆을 보니 모로 누운 정우진이 눈을 감고 깊고 느리게 숨을 쉬고 있는 게 보였다. 누가 봐도 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

“…….”

말없이 1분이 더 지났다.

혹시 몰라 5분 정도 더 기다린 뒤 아주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오는데, 정우진이 나를 붙잡았다.

“어디 가세요?”

“뭐야, 너 안 잤어?”

“그냥 눈만 감고 있었던 거예요. 이름 세 번 부르라고 했잖아요.”

“……아, 진짜 까다롭네.”

쌍꺼풀이 짙어진 걸 보니 정말 잠이 들었던 건 확실한데, 내가 움직여서 깬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자 정우진이 베개에 얼굴을 몇 번 비비다가 혼잣말을 했다.

“왜 하필 오늘 이렇게 졸린 거지? 하필 오늘 같은 날…….”

“졸리면 자면 되지, 오늘이 왜?”

“선배님이랑 이런 얘길 또 언제 해요?”

“내일 하면 되잖아.”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우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내일도 했는데 시간이 모자라면 어떡해요.”

“그럼 모레도 하면 되지.”

“모레도 모자라면요?”

“…….”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저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고작 학교 급식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게 뭐 그렇게 어렵다고 저렇게 졸린 데도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계속 말하면 되잖아.”

“일주일 뒤에도, 한 달 뒤에도? 일 년 뒤에도?”

“…….”

“그러면 그 일주일 동안……. 한 달, 일 년 동안 또 그사이에 할 말이 생기잖아요. 그럼 그 말은 또 언제 해요?”

작은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하다가 끊임없이 계속 흘러나왔다. 그제야 나는 정우진이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깨달았다.

“어릴 때…….”

입술만 달싹거리면서 머뭇거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웅얼거렸다.

“갑자기 없어져서……. 제가 싫어져서 떠난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하지 말라는 거 계속하고, 눈치도 없이 따라다니고 그랬으니까…….”

“…….”

“그래서 내가 크게 잘못을 해서 그런 거구나, 그렇게 생각했어요. 근데 조금씩 시간이 지나고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게 아닌 거 같은 거예요. 이사라는 게 어린애 혼자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담담하게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내가 숨을 제대로 쉬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가장 먼저 내가 정우진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싫어서 간 게 아니라, 그냥 어쩔 수 없이 이사 가게 된 거죠?”

그 질문에 나는 숨을 한 번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당연하지……. 그땐 나도 그렇게 갑자기 가게 될 줄 몰랐어. 그냥 새벽부터 갑자기 용달차에 태워져서……. 그리고 그때 화를 냈던 것도,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변명을 하듯 다급히 말하고 있는데, 옆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새하얀 베개에 눈물 자국이 나 있는 게 보였다.

“다행이다.”

“…….”

“진짜 다행이다…….”

“…….”

울다가 웃으면서 계속 중얼거리던 정우진은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베개가 축축해서 차가울 텐데,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은지 잘만 잤다. 그래도 혹시 몰라 정우진이 바라던 대로 이름을 세 번 불러 보기로 했다.

“정우진.”

“…….”

“우진아.”

“…….”

“유진아.”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정말 잠이 들었나 보다. 나는 자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돌려 멀뚱멀뚱 앞만 바라봤다. 딱히 뭔가를 보는 건 아니고, 그냥 시선만 앞에 둔 채 쓰라리다 못해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가슴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시작했다.

싫은 게 문제가 아니라…….

내가 조금만 덜 좋아했더라면, 뭔가 다르게 말할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왜 말을 안 들어! 왜!’

‘네가 여길 왜 오냐고!’

그때의 나는 우월감에 젖은, 자존심만 센 어린애였다.

내 것의 물건이 있는 것처럼, 사람도 내 것이 될 수 있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온전히 가졌다고 착각했던 것이었다.

‘거기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내 것이니까 내가 하는 말만 듣고, 내가 주는 것만 먹고, 언제나 나만 기다려야 하는…….

마치 높은 담장 안의 목줄 묶인 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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