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자꾸 마트에 가자는 걸 무시하고, 죽 가게에 가서 전복죽 두 그릇을 사서 집으로 왔다. 뜨거울 때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오자마자 식탁에 포장을 풀어 숟가락을 쥐여 주니 몇 번 깨작거리다가 입에 맞았는지 잘 먹기 시작했다.
정우진이 잘 먹는 걸 확인한 뒤, 나도 전복죽을 먹었다. 그사이 조금 식기는 했지만 전복도 많고 고소해서 맛있었다. 아침을 먹는 도중에 정우진이 찾아와서 몇 숟가락 먹지도 못했더니, 죽 한 그릇이 금방 비워졌다.
죽을 먹으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빈말로도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는 없던 시간이었으니까…….
그 집에서는 어떻게 나오게 됐냐고 묻고 싶은 걸 참느라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렸다. 우리가 만났던 마지막 날,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기도 했다. 그땐 네가 잘못해서 내가 화를 냈던 게 아니라, 그냥 내 스스로가 너무…….
“선배님.”
생각에 잠겨 있느라 내가 빈 죽 그릇을 숟가락으로 닥닥 긁고 있는 것도 몰랐다.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놀라고 당황한 표정으로 자기 죽을 내게 내밀며 말했다.
“저 이제 배부른데 제 거 더 드실래요?”
“……아니……. 아니,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라…….”
어쩐지 안쓰러워하는 표정이라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내가 빈 그릇을 긁으면서 죽 더 달라고 시위라도 한 줄 아는 모양이었다.
“제가 나가서 좀 더 사 올까요? 근처라서 금방 갔다 올 수 있어요.”
“아니, 그게 아니라…….”
“배달시킬까요? 잠시만요, 저번에 핸드폰에 어플 깔아 놓은 게 있는데…….”
다급하게 의자에서 일어서려는 정우진의 손목을 붙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아니라, 그냥 뭐 좀 생각하느라 그런 거야.”
“무슨 생각이요?”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말에 나는 또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걸 물어보기가 힘들어서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건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냐고 물어보니 말문이 막히는 게 당연했다.
“그냥 제가 얼른 나가서…….”
“아니라고! 그냥 앉아서 네 거 먹어!”
하지만 정우진은 내가 아무 말도 못 하는 게 역시 배가 고파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지 비장한 표정으로 튀어 나가려 했다. 그런 정우진을 잡아 다시 의자에 앉힌 뒤 버럭 고함을 지르자, 정우진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숟가락을 들었다.
“그럼 이제 가실 거예요? 밥만 먹고 간다고 하셨잖아요.”
“너 잠드는 거 보고.”
“…….”
내 말에 정우진이 뭔가를 생각하듯 잠시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그 모습이 어릴 때와 똑같았다. 하고 싶은 말이 분명 있어 보이는데, 말하지는 않고 저렇게 빤히 쳐다보기만 해서 답답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그래서 매번 길게 대답해야만 하는 질문이 아니라,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걸로 답할 수 있는 것만 물어보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났다.
그땐 그냥 말하는 걸 싫어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주변에 대화할 사람도 없고 글을 가르쳐 줄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타인과 대화하는 게 무척 힘들었던 것 같았다.
“그럼 저 죽은 거의 한 시간 정도 먹을 거고, 잠드는 데는 열두 시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계속 같이 있어 주실 거예요?”
“…….”
유진이만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아플 정도로 뜨거워졌다가 시릴 만큼 차가워지기를 반복했다. 어떻게 한마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었는데, 그중 몇 가지 확실한 것은 후회와 연민이었다.
어쩌면 그동안 잊고 살았던 기억까지 파노라마처럼 눈앞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걸 느끼고 있는 순간, 정우진의 한마디에 찬물을 맞은 것 같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
“저 잠드는데 진짜 엄청 오래 걸린단 말이에요.”
“…….”
덧붙이는 말에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크고 길게 숨을 내뱉자 정우진이 떼를 쓰듯 말을 이었다.
“정말이에요. 선배님은 제가 잘 자는 것밖에 못 봤겠지만, 저 진짜 잠을 너무 못 자서 병원도 가고 약까지 먹은 지 꽤 됐어요.”
유진이랑 정우진이 진짜 동일 인물이 맞는 걸까? 어쩌다가 그 작고 조용하고 순진하고 순수하고 귀여웠던 애가 저렇게……. 그런 원초적인 고민에 휩싸여 있다가 약까지 먹는다는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수면제 같은 거?”
“네, 그리고 반신욕도 해 보고 자기 전에 따뜻한 것도 먹어 보고 아로마 같은 것도 써 봤는데 다 소용없었어요. 베개랑 침대도 다 바꾸고, 옷도 다른 걸로 많이 입어 보기도 했는데, 별로 효과도 없고…….”
숙면에 좋은 여러 가지 방법들을 이야기하면서 꽉 쥔 주먹으로 식탁을 콩콩 치는 정우진을 멀거니 보다가 물었다.
“운동 같은 것도 해 봤어? 몸이 피곤하면 힘들어서 금방 잠들잖아.”
“당연히 다 해 봤죠. 근데 그 상태로 잠은 안 들고 피곤하기만 해요.”
난 잠을 많이 자서 괴로우면 괴로웠지, 잠이 안 들어서 못 잤던 적은 인생에 단 한 번도 없어서 공감이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잠을 못 자면 얼마나 예민해지고 힘든지 알기 때문에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근데 또 나는 정우진이 침대 위를 사방팔방으로 굴러다니며 기절한 것처럼 자는 것밖에 못 봐서 그게 약간 애매하긴 했다. 분명 못 잔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래, 아무튼……. 일단 죽부터 먹어.”
“저 잠들 때까지 계속 같이 있어 주실 거예요?”
그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우진이 활짝 웃었다.
“…….”
그걸 보니 갑자기 또 가슴이, 롤러코스터를 타다가 밑으로 뚝 떨어질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티를 내지도 못하고 그냥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는 사이, 정우진도 전복죽을 얼추 다 먹었다.
“내가 치울 테니까 넌 씻고 나와.”
“괜찮아요. 제가 치울게요.”
정우진은 한 번 말해서 알아먹는 경우가 없었다. 대체로 기본 두세 번은 말을 해야 알아들었다. 자꾸 고집을 부리는 정우진을 욕실 안으로 처넣고 뒷정리까지 마쳤는데도 안에서는 계속 물소리가 들렸다.
할 것도 없어서 별 의미 없이 식탁만 빡빡 닦다가 집 구경을 좀 해 보기로 했다. 저번에 왔을 때와 크게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거실에 텔레비전은 여전히 없었고, 한결같이 크고 깨끗하고…….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집이라고나 할까?
별로 구경할 것도 없어서 안방에서 나와 거실 창밖이나 보려다가 닫혀 있는 방문 하나가 보였다. 여긴 무슨 방인가 싶어 그냥 별생각도 없이 문고리를 잡고 천천히 열다가 생각이 나 버렸다.
여긴 짐을 쌓아 두는 방이라 보여 주기 꺼려 했다는 걸…….
“…….”
하지만 문은 이미 열려 버렸고, 나는 방 안을 보고야 말았다.
“…….”
여러 각도로 찍힌 내 사진과 활동할 때의 포스터, 사인 같은 것들이 빼곡히 붙어 있는 벽과 뜬금없이 놓여 있는 커다란 텔레비전, 거대한 책장, 마치 전시회장에 온 것 같은 은은한 핀 조명과 진열대, 검은 마네킹에 입혀져 있는……. 그러니까 내가 활동할 때 입었던 옷이랑 비슷한 거 같은데…….
“…….”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눈알만 굴리면서 방 안을 보다가 나는 숨을 삼킨 뒤, 조용히 다시 문을 닫아 버렸다.
푸른 수염이 생각나기도 하고, 뭔가 봐서는 안 될 걸 본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팬이라고 하기도 했고……. 얼핏 봤던 사진 몇 개는 누가 봐도 파파라치 컷이었지만, 그냥 못 본 척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아서 살금살금 거실로 와 소파에 앉았다.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그냥 대충 봐도 엄청났던 그 방을 발견했다는 건 죽을 때까지 비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파에 푹 기대앉아 벌렁거리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고 있는데,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곧 샤워를 했는지 뽀얗고 발갛게 젖은 정우진이 목욕 가운을 입고 내게 다가왔다.
“저 다 씻었어요.”
“……?”
근데?
안 그래도 아까 놀란 가슴이 진정되지도 않았는데, 정우진이 이상한 말을 했다. 나도 눈이 있고 다 씻었다는 건 봐서 아는데, 다 씻어서 뭐 어쩌라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 그래……. 수고했어.”
할 말이 딱히 없어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우진이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계속 그러고 서 있는 걸 보다가 다시 말했다.
“머리 안 말려?”
“아, 말릴 거예요. 선배님은 안 씻으세요?”
“나? 난 안 씻을 건데?”
“안 주무세요?”
“나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너 자는 거 보고 갈 거라니까?”
아까부터 몇 번이나 말했던 건데, 안 들은 건지 못 들은 척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 말에 정우진은 입술을 몇 번 삐죽거리다가 머리를 말리러 갔다. 그사이 나는 다시 안방으로 들어가 침대 위의 이불을 정리했다. 사실 호텔 침대처럼 주름 하나 없이 말끔했지만 그냥 할 게 없어서 괜히 이불만 들췄다 덮었다 하기를 반복했다.
내가 그러고 있는 사이 머리카락을 다 말렸는지 정우진이 내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 가까이 다가오니 좋은 냄새가 훅 풍겼다.
“뭐 하세요?”
“머리 다 말렸어?”
“네.”
“빨리 누워.”
또 싫다느니 어쩌니 할까 봐 나는 억지로 정우진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까지 덮어 줬다.
“이제 좀 자.”
“저 잠들 때까지 집에 안 간다고 하셨죠?”
그렇긴 한데, 그 말이 안 자고 버티겠다는 소리로 들리는 건 내 착각일까? 그래 봤자 정우진은 눕기만 하면 무조건 10분 안에 잠이 들어서 별로 걱정되지는 않았다.
“그래, 너 자는 거 보고 갈게.”
“제 이름 세 번 불러도 아무런 말도 안 하면 그때 가세요. 눈만 감고 있는 걸 수도 있잖아요.”
“알았으니까 그만 말하고 빨리 자. 아, 맞다. 너 약 먹어야지. 해열제 어디 있어?”
“구급상자에…….”
일어나려는 정우진을 도로 눕히고, 구급상자의 위치만 물어 약과 물 한 컵을 떠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물컵과 약 한 알을 까서 건네자 정우진이 입술을 꾹 깨물고 내 눈치를 봤다. 표정이 왠지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아서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냥, 좋아서요…….”
“빨리 약 먹어.”
“으응.”
“…….”
내 말에 정우진이 대답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앓는 것 같기도 한 요상한 소리를 냈다. 순간 멈칫하는 사이 해열제 한 알을 입에 넣고 물을 마신 정우진이 눈을 질끈 감더니 입 안에 있는 걸 힘겹게 삼키는 게 보였다.
“……아니, 씨발…….”
“네?”
내가 별안간 욕을 하자 정우진이 놀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그렇게……. 티 나게 자꾸 그러니까 그냥 존나 어이가 없네…….”
“네? 뭐가요?”
저 새끼는 도대체 짜증 나게 왜 자꾸 씨발, 귀여운 척을 하는 거지? 유진일 때도 약을 저렇게 유별나게 처먹지는 않았는데, 덩치도 산만 한 새끼가 뭐 저딴 식으로 알약을 삼키는 건지 도무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어처구니가 없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우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등신 새끼처럼 그냥 처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