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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126/190)

121화

갑자기 부상은 무슨 부상이지? 심한 건가?

스케줄도 다 취소하고 귀국할 정도면 엄청 심한 거 아닌가?

“정우진 부상당했다고 난리던데, 심하게 다친 거야?”

아침을 먹으면서 이진혁이 걱정스러운 어조로 내게 물었다. 아직 부상이라고만 하고 정확히 어딜 얼마나 다친 건지 나온 게 아니라 모르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도 몰라.”

“계속 연락하고 있었던 거 아니야?”

“…….”

어제까지는 계속 연락하고 있었긴 한데……. 그게, 주고받은 게 아니라 정우진이 일방적으로 주고, 나는 받기만 했던 거라 이걸 연락했다는 걸로 표현하기가 애매했다.

“별로 안 다쳤겠지?”

“바로 입국한 거면 제대로 된 처치도 못 한 거 아닌가? 한국에 와서 하려고 그런 건가?”

“그렇겠지? 그런 거 보면 또 많이 다친 건 아닌 거 같고…….”

나보다 어째 애들이 더 걱정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집에서 자기도 하고 밥도 몇 번 같이 먹었다고 그새 정이라도 들었나 보다.

나도 걱정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연락을 먼저 하는 게 조심스러웠다.

이런저런 이유로 자꾸 연락하다 보면 정우진이 이상한 기대를 할 것 같기도 하고, 차라리 이렇게라도 정을 떼어 버리는 것도 크게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상당했다는 기사가 대대적으로 나갔는데, 괜찮으냐는 문자 한 통도 없으면 나한테 실망하지 않을까?

“…….”

숟가락을 들고 멍하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김강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고 있어? 입맛이 없어?”

“형도 걱정되겠지. 정우진이 다쳤는데.”

“걱정하지 마. 별로 안 다쳤을 거야. 아직 연락 없어? 비행기에서 안 내렸나?”

“문자 남겨 놨어? 확인하면 전화 오겠지.”

마치 애를 어르고 달래는 것처럼 들려서 좀 황당하기도 했고,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런 말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정우진에 관련된 주제로는 대화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밥이나 먹어.”

딱히 할 말도 없어서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하자 애들도 더 이상 입을 열지는 않았다.

아침 메뉴는 닭고기를 찢어 넣은 계란 볶음밥이었는데 너무 오래 볶은 건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퍽퍽한 건지 도무지 밥알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밥도 좀 덜 익었나? 왜 이렇게 딱딱한 거 같지?

입 안에 있는 볶음밥을 세월아 네월아 씹고 있는데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스케줄도 따로 없고, 이 집에 찾아올 사람도 매니저 말고는 없어서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현관문을 바라봤다. 문득 또 정우진이 찾아온 건 아닐까 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다쳤다는 애가 여기 올 리가 없었다.

안 그래도 입맛이 별로 없었는데 잘 됐다 싶어 숟가락을 내리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내가 나가 볼게.”

현관문으로 가 문을 열기 전에 물었다.

“누구세요?”

“저예요.”

“…….”

문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순간 내가 정우진 생각을 너무 많이 해서 환청이라도 들은 줄 알았다. 이 목소리를 식탁에 앉아 있던 애들도 들은 건지, 순식간에 집 안이 조용해졌다.

“……누구요?”

진짜 환청을 들은 걸 수도 있으니까 다시 물었다.

“우진이요.”

“…….”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에 이젠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 됐다.

계속 이대로 밖에 세워 둘 수도 없어서 나는 당황한 얼굴을 갈무리하지도 못한 채 문을 열었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리자 부상당했다는 사람치고는 멀끔한 얼굴의 정우진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제가 아침에 너무 일찍 왔죠?”

“……아니……. 너 근데 다쳤, 잠깐만. 그건 다 뭐야?”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상황이었다. 전에도 이런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었나?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정우진의 양손에 뭔가가 잔뜩 들려 있는 것도 모자라 옆에 큰 상자를 세워 두기까지 한 걸 보고 물었다.

“아, 이거……. 안녕하세요.”

정우진이 뭔가를 말하려다가 내 뒤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뒤를 돌아보자 식탁에 앉아 있던 애들이 어느새 내 뒤로 와 있었다. 애들도 많이 놀란 건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주춤주춤 인사하는 걸 보다가 정우진을 보며 다시 물었다.

“그건 다 뭐야?”

“선물이요. 저번에 제가 새벽에 민폐를 엄청 끼쳤잖아요.”

그렇게 말하며 정우진은 들고 있던 걸 차례대로 이진혁, 유노을, 그리고 김강에게 건넸다.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포장이 된 선물을 받아 들고 나를 쳐다봤다. 마치 이걸 받아도 되냐고 나한테 허락을 구하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스케줄 때문에 제대로 사과도 못 하고 가서 자꾸 마음에 걸렸거든요. 그래서 오는 길에……. 아, 선배님. 저 할 말이 있는데 잠깐 괜찮으세요? 차 가지고 와서 그냥 겉옷만 걸치고 나오시면 돼요.”

“…….”

대본이라도 읽는 것처럼 막힘없이 술술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말문이 막혀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계속 입술만 달싹거리자 정우진이 무해한 얼굴로 고개를 옆으로 살짝 젖히더니 다시 물었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오실래요?”

“……어, 그래.”

“그럼 기다릴게요.”

“어, 어…….”

반쯤 넋이 나가서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데, 뒤늦게 정신을 차린 이진혁이 정우진을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그 말에 정우진의 시선이 이진혁에게 닿았다.

“선물은……. 안 주셔도 되는데, 이런 걸…….”

“제가 죄송해서 드리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마세요. 제가 그때 엄청……. 좀 그랬잖아요.”

“그, 그렇긴 한데…….”

차마 그건 아니라고 하진 못하겠는지, 이진혁이 곤란한 얼굴로 솔직히 말했다.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 그냥 사과의 의미로 받아 주세요.”

“아, 네. 그럼……. 고마워요.”

“저도 고마워요.”

“고마워.”

이진혁이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유노을과 김강도 차례대로 인사를 했다. 그러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한 번 본 뒤, 별다른 말도 없이 그대로 가 버렸다.

“…….”

“…….”

“…….”

“…….”

집에 남겨진 우리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제일 먼저 움직인 건 유노을이었다. 들고 있던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주섬주섬 포장지를 풀자, 이진혁과 김강도 따라 상자를 풀기 시작했다.

현관문 앞에 서서 그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데, 가장 먼저 제일 커다란 상자의 포장을 푼 이진혁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

그리고 다음으로 유노을도 똑같이 입을 벌린 채 움직임을 멈췄다.

“허어어어억.”

김강만이 유일하게 황금을 발견한 탐험가처럼 봉투 안을 보며 크게 숨을 들이켰다. 도대체 저 안에 뭐가 있어서…….

정우진에게 부담스럽게 선물 같은 거 주지 말라고 하긴 했는데, 저건 나한테 준 것도 아니고 애들한테 준 거라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때 새벽에 찾아온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라고 하니, 더 이상 참견할 수도 없어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뭔데?”

내 물음에 이진혁이 상자 안에서 양손으로 뭔가를 힘겹게 꺼냈다. 제법 크고 묵직한 듯한 물건이었는데, 가만히 보니 스피커 같았다.

“이거……. 이거 내가 사고 싶다고 했던…….”

“……?”

유노을이 상자 안에서 양손으로 공손히 꺼낸 것은 운동화 한 켤레였다.

“콜라보……. 이거, 콜라보, 그거……. 지금 리셀…….”

“…….”

유노을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얼굴로 헐떡이며 말도 제대로 하질 못했다. 로고를 자세히 보니 저건 평소에 유노을이 좋아하던 브랜드의 신발인 것 같기는 했다.

마지막으로 김강은 봉투 안에서 종이 다발을 꺼내고 있었다. 설마 돈은 아니겠지 싶어 인상을 찌푸렸지만, 뒷면을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김강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종이 다발을 양손에 들고 펼치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왜?”

도대체 왜 저렇게 난리법석을 떠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묻자, 김강이 종이 다발 한 장을 뒤집어 내게 보여 줬다. 그건 십만 원짜리 상품권이었다. 무슨 상품권인지는 모르겠는데, 소 그림이 그려진 걸로 봐서는 음식점 같기도 하고…….

“아니, 잠깐만……. 그거 설마 다 십만 원짜리야? 며, 몇 장인데?”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어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대충 어림잡아 봐도 저 종이 다발이 3, 40장은 돼 보이기 때문이었다. 빠르게 눈대중으로 상품권을 세던 김강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십…….”

“뭐?”

“…….”

“…….”

오십 장이라고? 십만 원짜리가 오십 장이면 얼마지?

계산을 끝낸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그럼 설마 이진혁이 받은 저 스피커랑 유노을이 받은 운동화도 대충 비슷한 가격이라는 건가?

아니……. 아니, 너무…….

“형, 이거 너무…… 너무 부담스러운데, 어떡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유노을이 중얼거렸다. 그 말에 고개를 돌리며 뭐라 하려다가 멈칫했다. 유노을이 운동화를 자기 품에 소중히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

“다시 돌려 줘야겠지?”

“…….”

저건 누가 봐도 돌려주기 싫어하는 사람의 모습이었다. 김강은 이미 봉투를 닫아 자기 옷 안으로 숨기듯 밀어 넣고 있었다. 그리고 스피커를 갓난아기처럼 안고 있는 이진혁까지 보니, 말문이 막혀서 입맛만 다시던 나는 그냥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 겉옷을 챙겨 나왔다.

“나갔다 올게.”

밖으로 나와 차가운 공기를 마시니 머리가 좀 맑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빠른 걸음으로 내리막길을 내려오자 주차되어 있는 차 한 대가 보였다. 운전석 쪽에 정우진이 타고 있는 걸 확인한 후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꽤 추워졌죠?”

차에 타자마자 정우진이 물었다. 나는 뭐라고 하려 숨을 크게 마셨다가 도로 입을 다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 정우진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이건 선배님 거예요.”

“…….”

손바닥 위에는 삐뚤빼뚤하게 접힌 작은 종이학 한 마리가 있었다.

“만 원짜리도 부담스럽다고 하셔서 이제는 그냥 사는 거 말고, 제가 만들어서 드리려고요. 어때요?”

“…….”

뜬금없는 종이학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내밀고 있는 손의 새끼손가락에 두껍게 깁스가 되어 있는 걸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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