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정우진은 안 그래도 천천히 먹는 스타일인데, 입맛이 별로 없는지 평소보다 먹는 속도가 꽤 느렸다. 애들도 그렇고, 박준오도 밥을 천천히 먹는 편은 아니어서 정우진이 반도 채 먹기 전에 전부 그릇을 비웠다.
평소라면 그냥 나도 내 속도대로 먹었을 테지만, 지나치게 초췌하고 불쌍해 보이는 모습 탓에 나도 모르게 먹는 속도를 정우진에게 맞춰 버렸다.
“너 다른 데서는 그렇게 술 먹지 마라.”
모두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에 둘밖에 남지 않아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말에 정우진이 멈칫하더니 덩달아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저 취한 거 아니었어요.”
“…….”
술 취해서 난장을 부리는 놈들은 왜 매번 이렇게 패턴이 똑같을까? 물론 나도 그렇긴 하지만……. 나는 한심하다는 얼굴로 정우진을 보며 혀를 차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에요.”
“아무튼 술 그렇게 먹지 말라고.”
“술 마셔서 그런 거 아니었다고요.”
유독 우기는 정우진을 이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보통 이 정도 말하면 빈말이라도 알았다고 하지 않나? 내가 미간을 구기자 가만히 나를 보고 있던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좋아한다고 한 거 취해서 한 말 아니에요.”
“…….”
물이라도 마시고 있었더라면 그대로 뿜었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놀라운 말이었다.
나는 딱히 그 고백 때문에 한 말이 아니라, 그냥 어제 정우진의 진상 같던 모든 행동들을 통틀어서 한 말이었는데……. 아무래도 정우진은 내가 그냥 넌 취해서 그런 거라는 말로 넘어갈 거라 생각했나 보다.
나는 슬쩍 정우진 뒤쪽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아까보다 더욱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거 말고.”
“그럼요?”
“울면서 찾아오거나, 막 소리 지르거나 그런 거.”
“그것도 취해서 그런 게 아니라……. 아니, 애초에 그렇게 많이 마신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맥주 한 캔 정도밖에 안 마셨는데. 어쨌든 어제 막무가내로 굴었던 건 정말 죄송해요.”
정우진이 결국 들고 있던 수저를 내려놓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괜히 먹을 때 말했나? 불편해서 밥도 못 먹겠는지, 정우진이 먹다 체한 사람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아까 일어나서 다른 분들한테도 사과드렸어요.”
“아……. 애들한테?”
“네, 그리고 다음에 스케줄 없을 때 와서 다시 사과드릴게요. 정말 죄송해요.”
“아까 사과했다며? 그럼 됐지, 뭘 또 와.”
“…….”
내 말에 정우진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머뭇거렸다. 달싹거리는 입술이 꼭 시한폭탄 같았다. 저 입에서 또 날 곤란하게 만들 말이 나오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다 먹었어?”
“네? 아, 네…….”
“그럼 준비하고 가. 준…….”
“…….”
“……바, 박준오도 기다리고 있네.”
‘준’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정우진이 시선을 올려 나를 쳐다보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말을 바꿔 버렸다. 당황해서 순간적으로 그러긴 했지만, 도대체 내가 왜 이렇게 눈치를 보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라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연락드려도 돼요?”
“무슨 연락?”
“……그냥……. 뭐 하고 계신지…….”
그 말을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어제 고백이 정말 진심이라면 거절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어제에 이어 또 그렇게 매몰차게 말을 하려니까 마음이 너무 불편했다.
어쩌면 정우진은 이걸 노리고 있는 게 아닐까? 분명 어제 알아듣게 말했는데, 오늘 또 이러는 걸 보면 그럴 확률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바보도 아니고 동정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아니면 정우진은 둘을 딱히 구분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만약 그런 거라면 더 최악이었다.
“밥 뭐 먹었는지……. 그런 거랑, 그리고…….”
말을 하는 도중에 정우진의 얼굴에서 급격히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힘겹게 말하고 있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수저를 내려놓고 뒷목을 긁적거렸다.
“연락해도 상관은 없는데…….”
“진짜요?”
정우진의 표정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달라졌다. 마치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화색이 도는 얼굴을 보며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야 말았다.
“저 그럼 문자 보낼게요. 그리고 전화도 해도 돼요?”
“……아니……. 아니, 나야 상관없기는 한데……. 너는 괜찮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 죽어 가던 얼굴이 어떻게 저렇게 순식간에 바뀔 수가 있는 걸까? 마치 만화를 보는 것처럼 현실성이 없을 정도였다.
당황해서 더듬거리는 내 말에 정우진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걸 보자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네가 괜찮겠냐고…….”
“…….”
“대답은 어제 했잖아.”
“…….”
마치 조금씩 색을 잃어버리는 그림처럼 정우진의 모습이 다시 흑백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다. 얼굴은 창백해지고 표정은 사라지다가 결국 고개를 툭 떨어뜨렸다.
“……선배님은……. 그럼 우리가 이대로 영영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으신 거예요?”
밑으로 또다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게 차라리 침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저건 누가 봐도 눈물이었다.
그렇다.
정우진이 또 울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최대한 숨을 죽이며 작게 말했다.
“제발 부탁이니까 그만 좀 울어…….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닌데.”
“안 울어요.”
“그럼 지금 뚝뚝 떨어지고 있는 건 뭔데요.”
“네 눈에 문제가 있는 거겠지…….”
“하.”
코맹맹이 소리로 불만 가득히 하는 말에 순간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이 새끼가 진짜……. 도대체 지금 나랑 뭘 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내가 계속 어이없다는 듯 웃자 정우진이 훌쩍거리면서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사이에 얼굴이 또 눈물범벅이었다.
“야, 너 반말은 그렇다 쳐도 너라고 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내 물음에 정우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꽉 막힌 사람 아니라면서요.”
“네가 그냥 꽉 막힌 사람 하라며.”
“왜 제가 한 말을 그렇게 잘 기억하세요? 저한테 조금은 마음 있는 거 아니에요?”
“아니라고……. 하, 진짜. 빨리 눈물이나 좀 닦아.”
내 말에 정우진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뺨 위로 눈물이 주륵 흘렀다.
“선배님이 닦아 주세요.”
“우진아, 내가 어제…….”
“우진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다시 눈물이 주륵 흐르는 걸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언제는 또 그렇게 불러 달라며? 울고불고 그렇게 난리를 쳐 놓고.”
“그러니까 제 말을 왜 들어 주시냐고요. 어차피 좋아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우진이라고 다정하게 부르고…….”
아니, 다정하게 부른 적 없는데……. 오히려 좀 엄격한 목소리 아니었나?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들어 놓고, 왜 나한테 뭐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 앞으로는 우진이라고 안 부르겠다고 하려는 순간, 박준오와 눈이 마주쳤다. 쭈뼛거리고 있는 꼴이 아무래도 이젠 가 봐야 하는 것 같은 눈치였다. 나는 당황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티슈를 가지고 와 정우진의 얼굴에 벅벅 문댔다.
“너 이제 빨리 가 봐.”
“나중에……. 제가 문자…….”
“그래, 빨리 가. 준오야, 얘 데리고 어서 가.”
그렇게 말하며 정우진을 의자에서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힘없는 종이 인형처럼 일어난 정우진이 내 옷깃을 잡고 현관문 앞까지 걸어갔다.
박준오는 잠깐 정우진의 얼굴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숨을 들이켰지만, 왜 그러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정우진이 천천히 신발을 신고 있는 걸 보던 유노을이 아, 하고 주방 쪽으로 가 냉장고에서 뭘 꺼내 왔다.
그건 꽁꽁 언 숟가락 두 개였다.
“이거……. 아니, 차 안에서 눈에 대고 있으면 부기가 좀 빠지거든요.”
“…….”
차갑게 언 숟가락을 받아 든 정우진은 좀 어이가 없는 듯한 표정으로 그걸 가만히 보다가 유노을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그래요…….”
도대체 언제 저런 걸 준비한 거지? 유노을은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하다가 나를 보더니 괜히 화풀이를 했다.
“아, 왜 또 울린 거야.”
그 말에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뭐지, 이게? 무슨 상황이지?
“다음에 또 놀러 와요.”
그사이에 이진혁이 인사를 했고, 뒤이어 김강도 손을 흔들었다.
“잘 가.”
정우진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지만, 나는 억지로 박준오와 정우진을 밖으로 내보냈다. 그리고 현관문을 닫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이진혁이 물었다.
“둘이 뭔 일이야? 뭔데 새벽에 찾아와서 그렇게 펑펑 울어?”
“뭐 들어 보니까 이름 어쩌고저쩌고 하더만.”
김강까지 가세해서 물었지만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냥 피곤한 표정으로 손만 휘휘 젓고 있는데, 유노을이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새벽에도 계속 울던데…….”
그 말에 나는 놀라서 되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새벽에도? 거실에서?”
“어, 쉬 마려운데 괜히 눈치 보여서 나가지도 못하고 진짜 지릴 뻔했어.”
“나도 훌쩍거리는 소리 들었어.”
“아침에 보니까 다 죽어가길래 콩나물국도 끓인 거잖아……. 걸어 다니는 시체 같았다니까?”
“…….”
한마디씩 하면서 나를 쳐다보는데, 어쩐지 눈깔들이 이상했다. 왠지 나를 탓하는 것만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