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7화 (122/190)

117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눈알만 데룩데룩 굴리고 있는데, 다행히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을 보니 박준오였다.

“어, 준오야.”

-형, 저 지금 우진이 형 집에 왔는데, 아직 안 오신 거 같아요.

“우진이 방금 우리 숙소에 왔어……. 술 많이 취한 거 같아서 세수만 시키고 보내려고. 내가 보낼 테니까 넌 집에 가서 빨리 쉬어. 늦게 미안하다야.”

-아니에요, 제가 데리러 갈게요. 형, 면허도 없으시잖아요.

그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혀 애들을 가만히 쳐다봤다. 확실히 우리 중에 면허가 있는 사람은 유노을뿐이었는데, 차도 없었기 때문에 정우진을 보내려면 택시를 불러야 했다.

“그렇긴 해……. 아니면 그냥 여기서 재울까? 너 여기 왔다가 우진이 데려다주고 또 너희 집에 가려면, 시간 엄청 많이 걸리지 않냐? 시간도 늦었는데, 그냥 여기서 재울 테니까 내일 아침에 와. 오전 일찍 스케줄 있다며?”

-네, 그렇긴 한데……. 그래도 괜찮으세요?

“괜찮지. 얼른 집에 가서 빨리 쉬어. 괜히 헛걸음하게 했네.”

-아니에요, 형. 그럼 내일 오전 한 여섯 시쯤까지 갈게요.

“그래, 얼른 들어가서 쉬어.”

-네, 안녕히 주무세요.

사실 정우진을 여기서 재울 생각은 없었지만 박준오와 말을 하다 보니까 이게 최선의 방법인 것 같았다. 전화를 받기 전까지만 해도 세수만 하고 갈 거라고 했는데, 이렇게 금방 말을 바꿔서 나도 머쓱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또 분명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을 게 뻔해서 나는 애들을 보지도 않고 변명하듯 말했다.

“내일 오전에 일찍 스케줄 있다고 해서……. 준오도 여기 왔다가 또 정우진 집에 갔다가 자기 집 가고 그러면 피곤하잖아. 아무튼 내 침대에서 재우고……. 난 거실 소파에서 자든가 할 테니…….”

“뭐?”

주절주절 말하고 있는데, 유노을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자 유노을이 사색이 된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나보고 정우진이랑 같이 자라고?”

“아니, 2층 침대니까 같이 자는 건…… 아니지 않나? 그냥 방만 같은 방인 거고…….”

말을 하다 보니 그게 그건가 싶었지만, 그렇다고 정우진을 소파에서 재울 수는 없었다. 술을 마시고 진상처럼 굴었다고 해도 쟤는 어쨌든 이 집의 손님이었으니까.

“그냥 내가 소파에서 잘게, 형. 차라리 형이 내 침대에서 자고, 정우진을 형 침대에서 재워.”

이미 그렇게 마음을 먹은 듯한 유노을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옆에서 이진혁과 김강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말했다.

“남는 이불 있지? 차라리 거실에 이불을 깔고 쟤를 여기서 재우자.”

“그럴 거면 그냥 소파가 낫지 않아? 더 푹신푹신하고……. 바닥에서 이불 깔고 자는 거랑 소파에서 자는 게 무슨 차이지?”

유노을의 말에 김강이 잠시 고민하는 것 같더니 말했다.

“그럼 그냥 내 침대 쓰라고 할까? 2층 침대보다는 그게 더 편할 거 같은데.”

확실히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고 또 막내만 밖에서 자라고 하려니까 그것도 마음이 불편했다. 이진혁도 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흔들었다.

“침대가 문제면 그냥 내 침대에서 재우자. 난 바닥에서 자나 침대에서 자나 크게 상관없어서…….”

“나도 상관없기는 한데.”

“넌 그냥 네 침대에서 자.”

“아, 그냥 정우진을 서주 형 침대에서 재우고 형이 내 침대에서 자. 그게 제일 낫다니까? 쟤도 우리보다는 차라리 형이랑 같은 방에서 자는 게 편할 거 아니야.”

정우진은 어차피 베개에 머리만 붙이면 잠드는 거 같아서 딱히 어디에서 누구랑 자든 상관없을 것 같은데…….

그러다가 문득 고작 하루 자는 건데 이렇게까지 토론을 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그냥 애들을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일단 들어가서 먼저 자. 그냥 정우진 밖에서 재울 테니까.”

“그럼 둘이 밖에서 자? 거실에 이불 펼까?”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들어가.”

“근데 술 마셨다고 하지 않았어? 꿀물이라도 한 잔 타야 되는 거 아니야?”

“얘들아, 들어가라고. 가서, 자.”

자꾸 기웃거리는 애들을 방 안으로 밀어 넣고 욕실 문 앞에 김강이 가지고 온 옷을 뒀다. 그리고 남는 이불을 거실에 펼치고 베개는 없어서, 그냥 내 베개를 가지고 왔다.

그러는 사이, 다 씻은 건지 위아래로 검은색 운동복을 입은 정우진이 쭈뼛거리며 욕실에서 나왔다.

“선배님.”

씻으면서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 아직도 코맹맹이 소리가 나고 있었다.

“너 일찍 스케줄 있다며? 준오가 여기로 데리러 오기로 했으니까 오늘은 자고 가. 저기 이불 깔아 놨으니까……. 너 뭐, 침대 아니면 못 자고 그런 거 없지?”

내 말에 잠시 당황하던 정우진이 눈을 살짝 내리깔며 작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까는 그렇게 딸꾹질을 하면서 고함을 지르고 울고불고 난리 염병을 떨더니, 지금은 꼭 새색시처럼 수줍어하는 모습이 웃기기만 했다.

갑자기 급격하게 피로가 몰려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 나는 이불을 깔아 놨던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 그럼……. 저기서 자.”

“선배님은요?”

“뭐?”

“선배님은 어디서 주무세요?”

“…….”

질문의 의도는 알 수가 없었지만 어쩐지 황당한 기분이었다. 나는 이를 꽉 물고 가만히 정우진을 보다가 조금 전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자라.”

“네…….”

내 말에 정우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대답하더니 발소리도 내지 않고 깔아 둔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턱 끝까지 이불을 덮고 멀뚱멀뚱 날 보다가 말했다.

“안녕히 주무세요. 그리고 오늘 죄송해요. 제가 내일 꼭 다시 사과드릴게요.”

“불 끈다.”

“좋은 꿈꾸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불을 끄고 안으로 들어가자 유노을이 위에서 불쑥 얼굴을 내밀더니 작게 물었다.

“밖에서 안 자?”

“…….”

너무 힘들고 지쳐서 대답할 기운도 없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눕자, 박쥐처럼 거꾸로 뒤집어진 유노을의 얼굴이 위에서 쑥 내려왔다.

“여기서 자?”

“빨리 자, 너도.”

“알았어. 잘 자.”

그리고 눈을 감았는데, 그 뒤로 기억이 끊어졌다. 기분 탓이 아니라 정말 피곤했던 건지 나는 꿈도 꾸지 않고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깨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이대로 하루 종일 잤을지도 몰랐다.

“선배님.”

천천히 눈을 뜨자 정우진이 옆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하러 나오시래요.”

“……식사? 너 근데…….”

갑자기 무슨 식사? 지금 새벽 아닌가?

그런 의문이 들기도 전에 나는 정우진의 얼굴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울어서 그런지 발갛게 부은 눈과 창백한 피부, 힘이 없어 보이는 얼굴까지 누가 봐도 병세가 위중한 환자의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폭탄이 되어 있던 머리도 지나치게 차분했다.

“너 안 잤어?”

“아니요, 잘 잤어요. 조심하세요.”

침대 밖으로 나오는데 정우진이 내 손목을 잡아 일으켜 주며 말했다.

뭘 조심하라는 거지? 어디 아픈 사람도 아니고,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할까 봐 저러는 건가? 누가 봐도 아픈 사람은 내가 아니라, 정우진인데…….

당황한 마음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정우진의 손을 잡고 일어난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잡고 있던 손을 놨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자 이른 시간인데도 일어나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애들과 식탁 앞에 앉아 있는 박준오가 보였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언제 왔어?”

“방금이요. 진혁이 형이 아침 먹고 가라고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아직 시간도 좀 남았고 해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으로 가니, 이진혁과 김강이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뭐 만들어?”

“콩나물국이랑 두부조림.”

“언제 일어났어?”

“아까……. 어우, 형.”

프라이팬에서 두부를 부치고 있던 이진혁이 나를 보더니 움찔했다.

“왜?”

“아니……. 잘 잤나 보네.”

“……?”

잘 자긴 했는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김강이 물었다.

“형, 머리가 왜 그래?”

“머리? 무슨 머리?”

“폭탄 맞았어?”

그 말에 머리를 만지면서 거실에 있는 거울 쪽으로 갔다. 그리고 비친 모습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두막집 남자들 촬영을 할 때 정우진 만큼이나 심각한 상태로 머리카락이 뻗쳐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어제 제대로 말리지도 않고 바로 자서 그런 것 같았다. 몇 번 머리를 만지다가 어차피 볼 사람도 없는데 뭐 어떤가 싶어서 그냥 다시 주방으로 돌아왔다.

“오남자 방송할 때는 우진이 형이 머리 엄청 뻗치고, 서주 형은 그대로였잖아요. 근데 오늘은 반대네요.”

박준오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그게 의문이었다. 촬영을 할 때에는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머리가 사방팔방으로 뻗쳐 있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단정한 모습인 건지……. 얼굴도 초췌하고 창백해 보여서 그런지 말없이 앉아 있는 모습이 이상하게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금방 아침상이 차려지고, 모두가 식탁 앞에 모였다. 의자가 모자라서 나와 김강은 책상 의자를 가지고 와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준오…….”

박준오의 말에 반사적으로 준오 너도 맛있게 먹으라고 하려다가 멈칫했다. 내가 말을 하다 말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물론 정우진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저한테는 자꾸 야, 라고 하면서 매니저 부를 때는……. 맨날, 준오라고 하고…….’

순간 정우진이 울면서 소리치던 말이 떠올랐다.

“네?”

자길 불러 놓고 아무런 말도 하질 않자, 박준오가 나를 보며 되물었다. 이미 한 말을 도로 물릴 수도 없어서, 나는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했다.

“준오, 너도 맛있게 먹고…….”

“네, 형도 맛있게 드세요.”

내 말이 끝나자 모두 식사를 하기 위해 수저를 들었다. 하지만 정우진만은 그대로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강렬한 시선에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왜냐면 이미 이진혁이 꼼짝도 하질 않는 정우진을 이상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혁아.”

“어?”

“맛있게 먹고…….”

“……어? 어, 어. 형도 맛있게 먹어.”

나는 최대한 당황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한 채 차례대로 사람들의 이름을 불렀다.

“노을아.”

“어?”

“너도 많이 먹고.”

“왜 이래, 갑자기?”

유노을이 콩나물국을 먹으며 의심스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강아.”

“맛있게 먹으라고? 알았어, 형도 맛있게 먹어.”

“…….”

모두에게 말한 뒤, 나는 속으로 숨을 한 번 내쉰 뒤 마지막으로 정우진을 바라봤다.

“우진아, 너도 맛있게 먹고…….”

내 말에 정우진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작게 말했다.

“선배님도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정우진이 그제야 수저를 드는 걸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