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5화 (120/190)

115화

하지만 순간의 동정심 때문에 감당하지도 못할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정우진이 좀 진정하길 기다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무튼 고맙고…….”

“…….”

정우진은 훌쩍거리면서 내 뒷말을 기다렸다. 나는 잠시 그런 정우진을 보다가 마음을 다 잡고 말했다.

“미안해.”

진부하긴 했지만 이런 말밖에는 해 줄 말이 없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정우진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도로록 뺨을 따라 흘렀다.

“한 달만……. 아니, 일주일만 만나 주시면 안 돼요? 생각이 바뀔 수도 있잖아요. 길게 말고 딱 일주일만요. 네?”

정우진이 애원하듯 말했지만 난감한 마음뿐이었다. 한 달이든 일주일이든 기간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정말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가 게이일 거라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남자를 보면서 설레거나 가슴이 두근거렸던 적도 없었고, 혹시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 본 적도 없었다.

길게 끌어 봤자 어차피 상처 받을 사람은 정해진 일이라, 차라리 처음부터 확실하게 말하는 게 정우진에게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다시 한번 미안하다고 말하려는데, 내 표정에서 이미 답을 읽은 건지 정우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럼 하루는요?”

“……아니, 기간이…….”

“하루도 안 돼요? 그럼 오늘 밤은요? 오늘 밤이 가기 전까지라도……. 저, 저……. 제가, 할 말도 있고…….”

정우진이 더듬더듬 말을 하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쉼 없이 떨어지는 눈물로 바닥이 짙은 색으로 젖고 있었다.

“예전에……. 제가, 계속 말하려고 했는데, 말을 못 한……. 그러니까, 제가 예전에 선배님을……. 예전부터, 어렸을 때…….”

생각이 정리가 되질 않는 건지, 두서없이 말하는 걸 가만히 듣다가 나는 어렵지 않게 정우진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깨달았다.

“이게, 사실……. 그럴 수도 있어.”

내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자 정우진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보니 입이 잘 떨어지질 않았다.

“계속 누굴 좋아하다 보면……. 그러니까, 팬이니까 좋아해서 응원을 하는 건데, 오랫동안 그러다가 보면 헷갈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일반적인 연예인이랑 팬들은 자주 만나서 밥을 먹거나 커피를 마실 수가 없으니까 이런 일이 흔하게 일어나진 않는데, 우리는 그런 거리감이 없고…….”

내가 잘 말하고 있는 걸까? 최대한 정우진이 기분 나빠하지 않도록, 오해하지 않게 잘 말하고 있는 건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정우진이 이렇게 갑자기 나를 좋아하게 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친구도 별로 없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다가 데뷔하기 전부터 팬이었던 나와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감정을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촬영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만났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연예인과 팬이 사귀는 일이 흔한 건 아니지만 아예 없는 일도 아니었고, 대부분 다 이런 수순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조금만 혼자 있으면서 생각해 보면 분명 너도…….”

너도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거라고 하려다가 문득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말문이 막힐 정도로 차가운 눈빛이었다.

내가 주춤하자 나를 멀거니 보고 있던 정우진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조금만 혼자 있으면, 뭐요?”

“…….”

“혼자 있다 보면, 이 감정이 사랑이 아니라 팬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될 거라고요? 그럼 제가 다른 연예인을 좋아하면 좀 괜찮아질까요? 앞으로 선배님 만나지 말고, 생각도 하지 말고, 그렇게 아예 없는 사람처럼, 절대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제가 좀 괜찮아질까요?”

따지듯 묻는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어딘지 처절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에 나는 내가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우진아, 내가…….”

“얼마나 안 만나면 되는데요? 10년? 20년? 그때까진 그냥 선배님 죽었다고 생각하고 살면 될까요? 그럼 좀 잊힐까요? 평생 만날 수도 없는데, 시간이 너무 지나서 얼굴도 잘 기억이 안 나면 어떡하죠? 사진 한 장도 없어서,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살지 않을까요?”

“아니야, 내가 미안해. 말이 잘못 나왔어. 미안해, 진짜.”

울고 있는 건지, 말하고 있는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정우진은 속에 있는 걸 그야말로 토해 내고 있었다. 덜덜 떨리고 있는 손을 잡아 아래로 내리며 진정하라는 듯 말했지만, 정우진의 목소리는 오히려 더욱 커졌다.

“제가 바보예요? 그런 걸 구분도 못 하게?”

“너 바보 아니야. 내가 바보지, 내가 말을 잘못한 거야.”

“내가 바보냐고. 그걸 내가…….”

그때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정우진이 고개를 숙이더니 조금 전 격정적이었던 것과는 정반대로,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희미한 목소리로 울먹거렸다.

“모르겠냐고……. 내가, 그걸…….”

“미안해, 진짜…….”

내가 말실수를 한 건 맞지만, 나는 솔직히 정우진이 왜 이렇게까지 서럽게 우는 건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네 감정을 착각했을 수도 있다.

이 말은 물론 고백을 한 사람에게는 굉장히 무례한 말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까지 사연이 있는 사람처럼 대성통곡을 할 만한 일이냐는 의문이 한구석에서 피어났다. 하지만 내 말실수로 우는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걸 물을 수도 없고, 어쨌든 내가 잘못한 건 맞아서 그냥 온 힘을 다해 진심으로 사과를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잘못했어. 진짜, 나도 어떻게든 무슨 말이라도 하려다 보니까…….”

“사랑해요…….”

“…….”

“정말, 진짜 좋아한단 말이에요. 제발…….”

떼를 쓰는 것 같은 말투였지만 작은 목소리에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멈칫하다가 잡고 있던 정우진의 손을 놓으려고 하는데, 손목이 잡혔다.

“너무 좋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

“제가 불편해서 눈치 보는 것도 사실 다 알고 있었는데……. 그래서 안 그러려고, 그러지 말자고 많이 생각했는데 만나기만 하면 너무 좋아서 그게 조절이 잘 안 됐어요.”

많이 떨리고 어눌한 발음이었지만, 정우진은 마치 고해 성사를 하듯 차근차근 말을 이었다.

“계속 싫어하고, 안 좋아하는 거 알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쳐다볼 때마다 자중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정말 안 됐어요. 너무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매일 참고……. 잘못 말했다가는 지금처럼 만나지도 못할까 봐, 혹시……. 혹시, 싫다고 할까 봐…….”

애원하듯 말하던 정우진이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간절한 눈빛이었지만 나는 그 어떤 말도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시면 안 돼요?”

아무런 대답도, 몸짓도 하지 않았는데 내 마음을 읽은 건지 정우진이 우는 소리를 몇 번 내다가 헐떡이며 다시 물었다.

“그럼, 그러면……. 일주일만…….”

“일주일을 만나든 한 달을 만나든 똑같을 거야.”

이러다가 탈진이라도 할 것 같아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빨리 대화를 끝내는 게 정우진에게도 내게도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아닌 건 아니었다.

“너한테 무슨 문제가 있고, 그래서 그런 게 아니야. 그래서 네가 나한테 잘하든 못하든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어. 일주일이든 한 달이든…….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

“그만 울고, 진정 좀 해. 너 진짜 이러다가 쓰러지면 어쩔래? 일단 집에 가서 좀 씻고, 쉬다가……. 아니, 가자.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겉옷을 주우려는데, 정우진이 내 어깨를 가볍게 밀었다. 그러더니 떨리는 손으로 제 옷을 주워 입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 혼자 갈 수 있어요.”

“너 지금 이러고 택시 탔다가 혹시라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우진이 등을 돌렸다. 나는 혼자 걸어가는 정우진의 뒷모습을 멍하게 보다가 놀라서 입을 열었다.

“야, 너 어디 가! 그럼 준오한테 연락이라도 해!”

아무리 매니저라도 사생활을 들키고 싶지는 않겠지만, 저 상태로 혼자 택시를 타고 가다가 누구한테 들키느니 차라리 박준오를 부르는 게 훨씬 나았다. 하지만 나와는 생각이 다른 건지, 고개를 돌려 나를 노려보는 정우진의 얼굴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정말 화가 난 것처럼 보이는 모습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말했다.

“내가 연락할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

“됐다고요.”

“너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무슨 상관이에요!”

그때 정우진이 별안간 고함을 빽 질렀다. 짜증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자 정우진이 씩씩거리면서 다시 울기 시작했다.

“상관하지 마세요. 어차피 좋아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아니, 그거랑 이건 다르잖아.”

“뭐가 달라요? 저는 좋아하지도 않은 사람은 쳐다도 안 봐요. 말도 안 해요. 신경도 안 써요! 옆에서 죽어도 눈도 하나 깜짝 안 해!”

“…….”

그 정도면 성격에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정우진은 잔뜩 화가 나 사나운 얼굴로 한참 나를 노려봤다. 그러다가 떨리는 손으로 천천히 마스크를 쓰고, 옷도 여미고, 헝클어진 머리도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까지 닦아 내고 나니 훨씬 나아졌지만, 그래도 초췌해 보이는 건 여전했다.

“따라오지 마세요. 이제 저한테 연락도 하지 마시고, 혹시 만나도 아는 척도 하지 마세요. 한 번만…….”

“…….”

“……한 번만 더 말 걸면, 저한테 마음 있는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

이제는 남처럼 지내자는 말에 가슴이 조금 술렁거렸다. 왜냐면 한참 잘 지내던 사람과 더 이상 만날 수 없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이게 맞는 걸지도 몰랐다. 내가 아쉽다고 친구로 계속 지내자고 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정우진은 마치 말을 걸어 달라는 것처럼 한참 그 자리에서 나를 쳐다봤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정우진이 흐느끼는 소리는 커졌고, 주먹을 쥔 손에는 계속 힘이 들어가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몇 번이나 무슨 말을 해 보려고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결국 나는 정우진이 등을 돌릴 때까지도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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