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뭐지? 도대체 왜 따라오는 거지?
이미 차가 출발해서 도로 내리라고 할 수도 없었다.
“넌 왜 탔어?”
“아이스크림 먹고 싶으시다면서요?”
“그거 때문에 따라오는 거라고?”
내 물음에 정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치 당연할 걸 왜 물어보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그 정도로 먹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아이스크림 때문에 굳이 택시를 타고 우리 숙소까지 간다는 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냥 따로 사 먹으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내일 먹어도 되고……. 아무튼 어차피 이미 택시는 탔기 때문에 더 말을 할 일은 아니었다.
“아이스크림은 편의점에서 사나? 아니면 근처에 다른 가게 있어요? 시간이 너무 늦어서 다 문 닫았겠죠?”
“편의점 가야 할 걸?”
숙소 근처에 24시 편의점이 있어서 아이스크림은 거기서 사 먹으면 될 것 같았다. 빨리 먹여서 택시 태워 보내야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내일 일도 없나?
“아이스크림 뭐 드실 거예요?”
“글쎄……. 초코 맛?”
왠지 단 게 너무 먹고 싶어서 조금 생각하다가 말하자 정우진도 옆에서 고민하다가 말했다.
“음……. 저는 바밤바 먹을래요.”
“아, 그것도 맛있지.”
“선배님, 제가 바밤바로 삼행시 지어 볼게요.”
뜬금없는 말에 나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바밤바. 밤 맛이 나는. 바밤바.”
“…….”
내 말에 정우진이 당황하는 것 같더니 이내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걸 보며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야, 이거 완전 옛날 거잖아. 누가 몰라? 너 설마 바밤바 삼행시 하려고 이거 먹는다고 한 건 아니지?”
“아니에요, 그건 그냥 진짜 맛있어서 먹는 거예요.”
“너 근데 고구마라테도 좋아하더니, 아이스크림은 바밤바를 먹네. 혹시 감자도 좋아?”
“네, 좋아해요.”
어딘지 모르게 수줍은 얼굴로 대답하는 정우진을 보며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하는 사이,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계산을 하고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근처 편의점으로 갔다. 정우진은 바밤바를 고르고, 나는 쌍쌍바를 하나씩 골랐다.
숙소로 올라가는 오르막길 아래는 골목 안쪽에 있어서 굳이 보려고 하지 않는 이상 사람들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곳이라 숨어서 뭘 먹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이러고 있으니까 촬영할 때 시장에서 꽈배기 먹던 거 생각나요.”
“아, 그때 돈만 좀 더 있었어도 많이 사 먹었을 텐데.”
아이스크림 껍질을 뜯으며 말하자, 정우진이 내 쪽으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그럼 거기 한 번 더 갈래요? 저 다음 주까지만 바쁘고 그 뒤로는 좀 한가해져서 시간 괜찮아요.”
“거기까지? 너무 멀지 않나?”
“차 타고 가면 되죠. 풍경도 좋으니까 쉴 겸. 아니면 꼭 거기 아니더라도……. 아, 맞다. 차박!”
“…….”
정우진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화들짝 놀라 움찔거리자 정우진이 내 손목을 덥석 잡았다.
“저희 차박 가야죠.”
“……야, 근데 너 무슨……. 차박 못 가서 죽은 귀신이 붙었냐? 촬영할 때도 그러더니 왜 그렇게 집착해?”
“저 한 번도 안 가 봤단 말이에요. 선배님도 안 가 보셨다면서요? 재미있을 거 같지 않아요?”
당연히 재미야 있겠지만……. 어쩐지 별로 내키지 않는 느낌이라 아무 대답도 하질 않았다. 내가 말없이 아이스크림만 먹자 나를 보던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거 원래 반으로 잘라서 먹는 거 아니에요?”
“난 원래 이렇게 먹어.”
난 한 번도 이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반으로 잘라서 다른 사람과 나눠 먹은 적이 없었다. 안 그래도 작은 아이스크림인데, 이걸 나눠서 누구 코에 붙인단 말인가? 하나씩 사서 먹는 게 낫지.
“저 그거 반만 주시면 안 돼요?”
한 입밖에 안 먹었고, 입이 닿지도 않았는데 이걸 또 싫다고 안 주는 것도 이상해서 그냥 쌍쌍바를 정확히 반으로 쪼개서 정우진에게 건넸다.
“제 것도 선배님이 반 드세요.”
“됐어.”
“이거 다른 사람한테 준 적 있으세요?”
“뭘? 쌍쌍바 반으로 자른 거? 아니, 없어.”
내 말에 정우진이 쌍쌍바를 들고 헷, 하고 웃었다.
“…….”
진짜로 헷, 하고…….
대단한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화사해지는 얼굴을 보니 심장이 아래로 쑥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났다. 오늘 정우진 집에 갔을 때도 이런 느낌을 여러 번 받았었다. 애써 모른 척하고, 그런 게 아닐 거라고 넘어갔는데 이젠 슬슬 한계였다.
“…….”
반만 남은 쌍쌍바를 심각한 표정으로 가만히 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옆에서 내게 뭘 건넸다. 아이스크림인 줄 알고 됐으니까 너 먹으라고 하려는데, 손에 들린 건 작고 네모난 상자였다.
“열어 보세요.”
“뭔데?”
어느새 바밤바를 다 먹은 건지, 정우진의 손에는 나무 막대 하나와 내가 준 반쪽 쌍쌍바가 들려 있었다. 벌써 끝이 조금 녹기 시작하는 아이스크림을 가만히 보다가 상자를 받아 뚜껑을 열었다.
“…….”
안에는 붉은색 리본이 묶여져 있는 검은색 전자시계가 있었다.
설마 또 선물인가? 상자를 볼 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는데, 역시나 빗나가질 않았다.
“웬 시계야?”
“선배님, 제가 준 시계 안 하고 다니시잖아요. 그래서 막 하고 다닐 수 있는 걸로 사 봤어요. 이거 별로 비싼 것도 아니고……. 만 원밖에 안 해요. 그리고 방수도 되니까 편하게 하고 다니세요.”
구구절절 말하던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소매를 살짝 위로 들었다. 자연스럽게 양 손목을 확인한 정우진이 멋쩍은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나는 검지로 턱 아래를 살살 긁고 있는 정우진을 보다가 문득 그의 손목에 찬 시계를 발견했다.
내게 선물로 줬던 그 시계와 똑같은 것이었다.
“그거 너무 부담스러워서 평소에 잘 안 하고 다니시는 거 같아서……. 선배님이 만 원 정도 되는 건 선물해도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기억 안 나세요?”
내가 계속 아무런 말도 하질 않자 초조해졌는지 정우진이 변명하듯 말했다. 나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에 다 넣고, 상자 안에 예쁘게 리본이 묶여 있는 시계를 꺼내 보았다. 리본도 직접 묶은 건지 이리저리 꽈배기처럼 뒤틀려 있고, 이음새가 질끈 묶여 있는 게 보였다.
“마음에 안 드시면 다른 걸로 드릴게요. 혹시 몰라서 여러 개 사 놨거든요.”
“여러 개를 샀다고?”
놀라서 묻자 정우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아, 집에 있는데 아까 보여 드릴걸. 선물 미리 주면 방송 보는 내내 불편하실까 봐 일부러 말도 안 꺼냈는데…….”
확실히 정우진이 날 만나자마자 이런 말을 하면서 내게 선물이라고 시계를 줬다면 부담스러워서 방송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 같기는 했다. 이건 만 원이든, 칠천만 원이든, 가격의 문제가 절대 아니었다.
“다음에 저희 집에 오시면 보세요. 아니면 제가 집에 가서 사진 찍어서 보내 드릴까요? 영상 통화해도 괜찮고, 아니면…….”
들고 있던 상자의 뚜껑을 덮으며 짧게 한숨을 내쉬자 정우진이 말끝을 흐렸다. 표정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새카만 눈이 흔들리는 걸 보니 마음이 약해졌지만, 더 이상 모르는 척할 수가 없는 지경까지 와 버렸다.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는데, 정우진은 벌써 잔뜩 혼나서 풀이 죽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질문은 명확한데, 이걸 어떻게 꺼내야 할지 그게 너무 힘들었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고작 맥주 한 캔도 술이라고, 평소라면 또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갔을 텐데 없던 용기가 생기기라도 했나 보다. 마주하기에는 너무 불편해서 계속 못 본 척, 모르는 척,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지냈는데…….
생각이 정리되질 않아서 한동안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말했다.
“만약 아니라면 정말 미안한데, 아니면 아니라고 말해 줘. 이런 건 앞으로 어떤 상황이 와도 두 번 다시 안 물어볼 거니까…….”
“…….”
정우진이 이번에도 말을 돌리거나, 친구가 없어서 그렇다는 둥의 소리를 한다면 나는 정말 정중하게 사과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정우진이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어떤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든 두 번 다시는 이런 질문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정우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그냥 가만히 내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들이 말하는 그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는 정우진의 검은색 눈을 마주 보며 입을 열다가, 문득 그 뒤에 보이는 검은색 밤하늘에 시선을 빼앗겼다. 촬영을 할 때와는 달리 하늘에는 별 한 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너 혹시 나 좋아하냐?”
새카만 하늘을 보며 작게 묻는 순간, 툭 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정우진과 내 시선이 동시에 아래로 향했다.
“…….”
“…….”
조금 전 내가 줬던 아이스크림 반쪽이, 다 녹아서 아래로 떨어져 진창이 되어 있었다. 분명 내가 준 뒤로 정우진은 저 아이스크림을 한 입도 먹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렇게 녹아서 바닥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왜 하필 저게 지금 떨어진 걸까?
당황한 기색을 숨기고 눈알만 굴려 정우진을 바라봤다. 정우진은 떨어진 아이스크림에 시선을 고정한 채 꼼짝도 하질 않았다.
이 상황에서 나는 저 길고 검은 속눈썹이 눈 밑으로 그림자를 만드는 게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문득 아래로 하염없이 무언가가 떨어지고 있는 걸 발견했다.
저게 뭘까? 그런 의문을 가지기도 전에, 나는 정우진이 이젠 더 이상 먹지 못할 아이스크림을 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
그 하염없는 대답에 나는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