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 분위기가 어색해서 힘들었지만, 텔레비전을 켜니 그마나 괜찮아졌다.
처음에는 옆에서 정우진이 자꾸 꼼지락거려서 화면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는데, 어둠 속에서 침대 위를 굴러다니는 정우진을 보니 그런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제가 진짜 저랬다고요?”
나도 저때는 자고 있느라 자세히 알지는 못했는데, 이렇게 화면으로 보니 정말 가관이었다. 내가 배를 부여잡고 큭큭거리자 정우진이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로 울상을 지었다.
“선배님, 죄송해요. 저 때문에 편히 주무시지도 못하고…….”
2화가 끝나기 전에도 정우진이 뒤척이는 게 잠시 나오긴 했지만, 그건 정말 예고편이나 다름없었다. 아주 오랫동안 길고 자세히, 마치 제작진들이 정우진의 잠버릇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여러 각도로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아, 나도 저건 몰랐는데. 내 머리채까지 잡았었네.”
“죄송합니다…….”
마치 아기들이 이불자락을 붙잡고 자는 것처럼 정우진이 내 머리카락을 꽉 쥐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너도 몰랐어? 너 잘 때 저렇게 자는 거?”
저 정도 잠버릇이면 모를 리가 없는데. 내가 웃음을 참으며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 집에서 잘 땐, 그냥 잠든 자세 그대로 일어나요.”
“음…….”
“진짜예요. 제가 보통 침대 끄트머리에서 웅크리고 자거든요? 이렇게요. 선배님, 보고 계세요?”
정우진이 자기가 말한 것처럼 침대 끄트머리에서 몸을 돌리며 모로 누워 웅크린 자세로 말했다.
“이렇게 잠드는데, 다음 날 일어나도 이 자세 그대로란 말이에요.”
“화면처럼 새벽에 굴러다니다가 일어나기 전에는 다시 그 자세로 돌아오는 건 아니고?”
“…….”
내 그럴듯한 추리에 정우진이 순간 발끈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붉으락푸르락해지는 얼굴을 보며 웃고 있는데, 이번에는 화면에서 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게 나왔다.
[화면] 서주 얼굴 클로즈업.
서주: 감자도 괜찮지 않을까? 밥이랑 비슷하니까……. 똑같은 탄수화물이고……. 그래, 차라리 감자랑 같이 먹어야겠다. 괜히 냄비 밥 했다가 태우면 수습도 못 하고…….
[자막] 망금술사들의 흔한 논리.. 감자와 밥은 똑같은 탄수화물..
“…….”
망금술사라니?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정우진이 옆에서 좀 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아니, 내가 감자로 뭘 한다는 게 아니라 그냥 밥 대신 감자를 먹는다는 뜻이었는데, 왜 저렇게……. 날 요리 못하는 사람처럼…….”
“그러니까요. 선배님은 절대 감자랑 밥이 똑같은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텐데, 왜 저렇게 말하는 거예요? 자막도 이상하고. 진짜 엄청 나빴네.”
“…….”
웃고 있던 정우진이 내 말에 동조하며 대신 화를 내주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화면을 보자 갑자기 정우진이 후다닥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조금 뒤, 캔 맥주 두 개를 가지고 와 하나를 내게 건넸다.
“선배님, 이걸로 속 좀 달래세요.”
“……너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아니요? 이거 드세요. 과일 좀 가지고 올까요? 아니면 과자? 마른안주 같은 건 어떠세요? 견과류도 있어요.”
“그냥 이거만 마시지, 뭐.”
맥주를 마실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한 캔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정우진도 다시 내 옆으로 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더니 말했다.
“제가 저때 일어났는데 선배님이 안 보여서 촬영한 게 꿈인 줄 알았어요.”
“촬영한 게?”
“네, 그냥……. 선배님 만난 것부터 촬영하고 이런 게 다 꿈인 줄 알고 진짜 엄청 놀랐어요.”
촬영은 그렇다 쳐도 보통 만난 것 자체를 꿈이라고 의심하나? 뭔가 이상하긴 했지만 화면에서 머리가 사방팔방 뻗친 정우진이 나오는 걸 보자 웃음이 터졌다.
“와, 진짜 예술이다.”
“근데 지금 보니까 저렇게 머리 뻗쳐서 다니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그 말에 나는 화면 속으로 밝은 햇살 아래에서 붕 뜬 머리로 멍때리고 있는 정우진을 바라봤다. 확실히 좀 웃기긴 했지만, 저것도 나름대로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막 엄청나게 이상한 건 아닌 것 같고…….
[화면] 입구에서 들어오는 벤 한 대.
스태프: 작가님 오셨어?
스태프: 네, 그런 것 같아요.
오두막집 남자들 포스터 촬영을 해 줄 강산 작가가 도착했다. 나와 정우진이 강산 작가에게 다가가 인사하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화면] 부루퉁한 얼굴의 우진과, 우진의 뻗친 머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걸어가고 있는 서주.
우진: 왜 그렇게 많이 흔드세요?
서주: 어?
우진: 악수할 때 왜 그렇게 자꾸 계속 막 오랫동안 흔드시냐고요, 웃으면서…….
서주: 안 그랬는데요?
우진: 아까 그랬잖아.
서주: 아닌디?
[자막] 세계관 최강 초딩들의 싸움..
“뻗친 머리 좋아하세요? 몰랐는데 계속 쳐다보고 계시네.”
때마침 나도 놀라고 있던 차라 당황한 얼굴로 정우진을 바라봤다.
“그러게……. 저렇게 쳐다보고 있는 줄은 나도 몰랐네.”
“앞으로 저렇게 하고 다닐까요?”
그 말에 그냥 웃고 말았는데, 정우진이 다시 말했다.
“선배님 만날 때만이라도요.”
“나 만날 때마다 머리를 저러고 오겠다고? 그럼 난 어떻게 해야 되는데? 설마 난 얼굴에 낙서해야 되냐?”
때마침 화면에서 정우진이 자신의 머리 상태를 알고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 나왔다. 촬영을 할 때에는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이제는 평소에도 저러고 다닌다고 하는 게 신기했다.
“만약 그렇게 하실 거면 제가 그려 드릴게요. 다른 사람한테 해 달라고 하지 말고 저한테 꼭 오세요. 알겠죠?”
얼굴에 그림을 그리고 다닐 리는 없겠지만, 만약 그런다고 해도 그냥 내가 그리고 말지 이걸 뭘 또 다른 사람한테 그려 달라고 하겠는가?
뭔가 진지한 듯한 정우진을 보며 대충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방송을 시청하는 것에 집중했다.
이런저런 포즈를 취하며 포스터 촬영을 하고 있는데, 내 모습은 내가 봐도 좀 어색해 보였다. 한 번 긴장을 하면 쉽게 풀리는 스타일이 아니라 더 그런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결과물을 보던 스태프나 강산 작가도 고개를 갸웃하는 장면이 여러 번 찍혔다.
그러는 와중에 쉬는 시간이 되어, 나와 정우진이 잡담을 하는 모습이 나왔다. 들고 있던 갈대로 내 옷을 자꾸 살살 올리는 장면이라든가, 내가 목화로 정우진을 퍽퍽 때려서 목화솜이 허공에 흩날리는 장면도 나왔다.
[화면] 속닥거리면서 놀고 있는 우진, 서주. 그런 모습을 찍고 있는 강산 작가.
강산 작가: 긴장 안 하시니까 표정이 훨씬 좋네.
스태프: 그러네요. 차이가 많이 나네.
강산 작가: 지금 분위기 괜찮지 않아요?
송철 피디: 괜찮은데?
[화면] 우진을 노려보고 있는 서주의 사진, 양 볼을 부풀리고 뚱하게 있는 우진,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우진과 서주의 사진들이 차례대로 나오고 있다.
강산 작가: 와, 근데 두 분 진짜 엄청 친하신가 봐요. 우진 씨랑 평소에 작업 꽤 했는데 촬영장에서 저렇게 편하게 계신 거 처음 봐요.
스태프: 메이크업 할 때도 그냥 눈 감고 가만히 계실 때가 많은데 오늘은 되게 말도 많이 하고 그러시더라고요.
강산 작가: 우진 씨랑 촬영할 때는 되게 속전속결이라고 해야 하나? 컨셉 이해도 빠르고 워낙 표정도 잘 쓰고 몸도 잘 쓰셔서 촬영도 금방 끝나거든요. 같이 일하시는 분들도 엄청 빠릿빠릿하고. 이렇게 화기애애하게 촬영한 적은 거의 처음인 것 같아요.
스태프: 그건 혹시 우진 씨가 화기애애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인가요?
강산 작가: 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큰일 나요, 진짜. 그런 게 아니라 우진 씨가 워낙 프로페셔널 하다 보니까, 그렇다는 거지요. 사실 같이 일하다 보면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라는 말을 할 필요도 없거든요.
보조 작가: 아, 그건 진짜 맞아요. 그래서 같이 일하면 진짜 편해요. 촬영도 예정 시간보다 항상 빨리 끝나고요.
스태프: 근데 저도 우진 씨랑 다른 촬영 몇 번 한 적 있는데, 진짜 편하신 거 같기는 해요.
강산 작가: 진짜요. 쓰읍, 사랑에 빠진 소년 컨셉으로 촬영할 때도 저런 표정은 안 지었던 거 같은데…….
스태프: (웃음)
보조 작가: 그럼 앞으로 그런 컨셉 촬영할 때는 서주 씨한테 도와달라고 연락 좀 드릴까요?
강산 작가: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에요. 서주 씨가 확실히 사람을 편하게 하는 게 있긴 한 거 같아. 저도 오늘 처음 뵙는데, 어우. 너무 좋아요. 예전부터 만난 사람 같고.
스태프: 맞아요, 엄청 잘 챙겨주세요. 카메라 안 돌아갈 때도 식사 하셨냐고 물어보시고, 좀 앉아 있으라고 다리 안 아프냐고 엄청 챙겨 주시더라고요.
보조 작가: 맏형이라 더 그런 게 있나 봐요.
강산 작가: 아, 그런가 보다. 약간 그룹 내에서도 아빠 포지션이라고 본 거 같긴 해.
스태프: 그래서 진짜 우진 씨도 서주 씨를 잘 따르나 봐요. 아무튼 이렇게 보니까 우진 씨도 제 나이 대처럼 보이네요. 평소 이미지가 되게 어른스럽잖아요.
송철 피디: 우진 씨가 낯을 많이 가려서 더 그렇게 보이나 봐.
스태프: 맞아요, 서주 씨도 계속 그러시더라고요. 처음에 난 무슨 서주 씨가 우진 씨 아빤 줄 알았잖아. 계속 우진이가 낯을 많이 가려서 그렇지, 평소에는 진짜 장난기도 많고 재미있다고. 뒤에서 약간 오퍼시티 50 정도로 우리 애가~ 우리 애가~ 이러는 거 같았다니까.
강산 작가: 상상이 안 되긴 한다…….
스태프: 두 눈으로 보고도 좀 안 믿기긴 해요.
보조 작가: 세가온의 장꾸미를 보려면 오남자를 봐야하나.
스태프: 무조건이죠.
송철 피디: 아니, 멘트가 왜……. 이러면 시켜서 한 줄 알잖아.
강산 작가: 피디님,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거죠?
송철 피디: 아, 진짜.
[자막] 오남자 본방 사수 부탁드립니다.
아무리 방송이라도 다른 사람들 입에서 내 얘기를 듣는 건 적응이 되질 않았다. 좀 민망하기도 하고 머쓱해서 괜히 눈알만 굴리다가 정우진에게 물었다.
“넌 평소에 얼마나 낯을 많이 가리면, 사람들 반응이 다 저러냐?”
내 말에 정우진이 어색한 표정으로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근데 뭔가……. 화면에 나오는 것만 보면 그냥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장난치고 그런 것밖에 없는데 이게 이렇게 놀랄 일인가 싶었다. 그동안 정우진이 쌓아 온 차갑고 날카로운 이미지 때문일까? 새삼 연예인은 이미지라는 게 이렇게나 중요하구나 싶어졌다.
[화면] 둘이 찍은 포스터 사진.
[자막] B컷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
그때 화면에 그 사진이 크게 나왔다. 그러니까 딱 보고 오두막집 게이들 같다고 생각했던 그 사진이…….
“와, 근데 저거……. 이렇게 보니까 진짜 노린 거 같기는 하다.”
“저는 저거 좋았는데. 선배님 웃는 얼굴로 너무 좋고.”
정우진의 말처럼 전체적인 분위기나 우리 표정도 다 좋기는 했다. 텔레비전에서도 사람들이 고민을 하는 장면이 나왔는데,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화면] 커다란 화면에 사진을 띄워두고 회의하는 사람들. 하지만 아쉽게 선정되지는 못한다.
강산 작가: 정말 아쉽네요. 저는 이게 제일 마음에 들긴 하는데…….
스태프: 저도요. 근데 뭔가 좀……. 저희 프로그램 취지에는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강산 작가: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웃기잖아요. 저는 그럼 뭐, 다른 취지로 이런 컷을 촬영했다는 건가요?
스태프 일동: (웃음)
송철 피디: 어떻게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나. 진짜 아깝긴 하다.
강산 작가: 그쵸. 진짜 잘 나왔는데.
스태프: 나중에 이걸로 굿즈 같은 거라도 만들까요?
송철 피디: 그거 좋다. 뭐 포카 같은 거라도 만들자.
스태프: 이걸로 포카 만들면 아무도 공식이라고 생각 안 할 걸요?
송철 피디: 왜?
스태프: 그, 그런 게 있
[화면] 삐- 하는 소리와 함께 꺼지는 화면.
[자막] 그랬다는 비하인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