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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화 (112/190)

107화

불안하긴 했는데,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정우진이 새벽 댓바람부터 연락을 해, 데리러 오겠다고 하는 바람에 예정보다 일찍 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안 나가려면 안 나갈 수도 있었지만 애들도 자꾸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일찍 만나지 말아야 할 이유도 딱히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저렇게까지 난리를 피우니까 할 말이 있어서 그러나 싶기도 해서 그냥 나와 버렸다.

“선배님!”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내리막길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는데, 차 안에 있던 정우진이 나와 양팔을 만세 하듯 번쩍 들고 위아래, 좌우 사방으로 흔들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변장을 한 건지, 시커먼 옷에 시커먼 모자, 시커먼 마스크까지 한 모습으로 저렇게 발광을 해 대니까 얼굴만 하얘서 반딧불이 같기도 했다. 어이가 없어서 고개를 돌리며 웃자, 정우진이 그새를 못 참고 내게 다가왔다.

“엄청 오랜만이죠?”

“엄청까지는 아니지 않나? 근데 시간이 빠르긴 빠르다.”

“별일 없으셨죠?”

“없었지. 너는?”

“저두요.”

갑자기 들리는 혀 짧은 소리에 의아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쳐다봤다. 마스크를 하고 있어서 얼굴이 반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파안대소하고 있다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차 문을 열자, 정우진도 빠른 걸음으로 운전석 쪽으로 돌아가 차에 탔다. 타자마자 안전벨트를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점심은 드셨어요?”

“안 먹었지. 먹고 들어갈까? 아니면 집에서 먹어도 되고.”

“뭐 드시고 싶으세요? 아, 연어 초밥 먹으러 갈까요? 아니면 연어 사서 집에서 해 먹어도 되고…….”

그 말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냥 재료 사서 집에서 해 먹자. 시간도 많은데.”

딱히 할 것도 없고, 오남자 방송까지 시간도 꽤 남아서 어차피 어딘가에 죽치고 있거나 다른 걸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하긴 했다.

“그럼 일단 마트로 갈게요.”

“그래.”

“선배님, 혹시 연어 구이도 좋아하세요?”

“좋아하지. 나 생연어 초밥보다는 토치로 살짝 익힌 걸 더 좋아해. 거기에 고추냉이 많이 올린 거.”

살짝 구워져 기름기가 올라온 연어는 고추냉이를 왕창 올려 먹어도 별로 맵지도 않고, 코가 찡하지도 않아서 좋아했다.

“그럼 스테이크 해 먹을까요? 제가 연어 구이 영상을 봤거든요? 엄청 간단하고 재료도 별로 안 들어가는데 되게 맛있대요. 프라이팬에 익히는 것도 있고, 오븐에 익히는 것도 있는데 둘 다 해 드릴게요.”

“영상을 봤다고? 어디서? 너튜브?”

“네, 쉬는 시간에 봤어요. 그리고 연어장 만드는 법도 봐서, 이것도 다음에 만들어서 드릴게요.”

얼마 전에 강이네 김장하러 갔을 때도 어머니가 밑반찬이라고 왕창 챙겨 주셨는데……. 어쩐지 정우진을 보고 있자니 강이네 어머니가 떠올랐다. 하나라도 더 챙겨 주고 싶어서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 뭐 더 가지고 갈 거 없냐고 계속 고민하시던 모습이…….

“…….”

근데 강이네 어머니는 가족이고 어머니니까 그렇다 쳐도 정우진은 나보다 나이도 어리고 바쁘기도 훨씬 바쁠 텐데, 갑자기 무슨 반찬을 해 주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물론 고맙고 좋기는 했지만 좀 너무 갑작스럽다고 해야 할까?

“괜찮아, 너 바쁜데 됐어. 마음만 받을게.”

내 말에 신호가 걸려 잠시 차를 세운 정우진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저 오남자 촬영한 뒤로 요리하는 게 너무 재미있어진 거 같아요. 그 전에는 집에서 밥도 잘 안 먹었거든요. 거의 밖에서 먹고 집에서는 물 정도밖에 안 마셨는데, 몇 번 연습하다 보니까 너무 재미있어요.”

정우진이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하긴, 고기도 제대로 못 굽던 정우진이 고작 며칠 사이에 엄청나게 실력이 늘었다는 건 그만큼 연습을 많이 했다는 뜻이었다.

“근데 저는 혼자 사니까 뭘 많이 만들 수도 없고……. 아랫집에 제가 만든 거라고 나눠 줄 수도 없잖아요. 특히 연어장 같은 건 딱 1인분만 하기도 애매하고…….”

곤란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는 정우진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갑자기 직접 만든 연어장을 담은 락앤락 통을 들고 아랫집에 내려가는 정우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왜 웃으세요?”

내가 갑자기 웃자 정우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너 아랫집에 누구 사는지 알아?”

“아니요, 몰라요. 마주친 적도 한 번도 없어요.”

“갑자기 이거 드실래요? 하고 가지고 가면 엄청 놀라긴 하겠다.”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걸요?”

반박할 수가 없어서 다시 웃다가 말했다.

“그럼 멤버들한테 좀 나눠 주면 안 돼? 아니면 대표님이나……. 매니저나, 회사 사람들도 있잖아.”

“근데 또 그렇게 대용량으로 하는 건 아니라……. 만들어서 회사까지 가지고 갔는데 누군 주고 누군 안 주기도 좀 애매하잖아요.”

듣고 보니 또 그렇긴 했다. 뭔가 원하는 대답 쪽으로 계속 유도당하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이쯤 되니 모른 척할 수도 없어서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좀 남으면…… 주든가. 잘 먹을게.”

“네.”

나는 딱히 요리에 취미도 없고, 집에서 뭘 잘 만들지도 않는데……. 난 뭘 챙겨 줘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 사이에 마트에 도착했다. 예전에 비빔국수 재료를 살 때 왔던 그곳이었다.

냉장 연어와 같이 곁들여 먹을 채소, 그리고 군것질거리도 조금 샀다. 정말 별거 안 산 것 같은데 너무 많아서 커다란 봉지를 두 개나 들고 차로 돌아왔다.

마트에서 정우진의 집까지는 별로 거리가 멀지 않아서 금방 도착했다. 그래도 한 번 와 봤다고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선배님, 이거.”

짐을 들고 집 안으로 들어오자 정우진이 거실 슬리퍼를 내줬다. 그걸 신고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커다란 거실이 보였는데, 뭔가 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실을 둘러보며 의아한 표정으로 주방 쪽으로 가다가 멈칫했다.

“텔레비전 없어졌…….”

벽에 붙어 있던 커다란 텔레비전이 보이질 않아서 혼잣말처럼 말하다가, 주방에 새로 생긴 거대한 그릇장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와, 이게 뭐야.”

요리하는 게 재미있어졌다더니, 완전 빠졌나 보다. 가만히 보니까 요리 도구도 꽤 생긴 것 같고, 그릇장에 그릇도 가득 차 있고…….

딱 봐도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그릇과 여러 종류의 잔, 식기류들이 작품처럼 전시되어 있는 걸 구경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짐을 정리하며 말했다.

“아, 맞다. 선배님.”

“어?”

그릇장 안을 보며 대답하자 정우진이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텔레비전이 고장 났는데 아직 못 샀거든요.”

그 말에 나는 놀란 눈으로 정우진을 바라봤다.

“텔레비전이 고장 났다고? 그럼 우리 방송 어떻게 봐?”

어쩐지, 거실에 텔레비전이 없더니. 핸드폰으로 봐야 하나?

“방에 하나 더 있긴 해요.”

“아, 하나 더 있어? 그럼 거기서 보면 되겠네.”

“네.”

고개를 끄덕이던 정우진이 물었다.

“연어 지금 할까요?”

“그러자. 프라이팬에 굽는 거랑 오븐에 하는 거랑 그렇게 두 개 한다고 했었나?”

나도 정우진 옆으로 가서 봉지 안의 재료들을 같이 꺼냈다. 레몬은 꼭 필요하다고 해서 엄청 샀는데, 탄산수도 같이 사 와서 나중에 에이드를 만들어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았다.

냉장 연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 그냥 굽기만 하면 되는 거라 별로 어려운 건 없었다. 오븐에서 구운 연어는 괜찮았지만, 프라이팬에 구운 연어는 너무 크게 잘라서 그런지, 정우진도 나도 뒤집는데 실패하는 바람에 끄트머리가 살짝 부서지긴 했다.

정우진이 다시 하자는 걸 말려서 그냥 먹기로 했는데, 표정을 보니 엄청나게 상심한 모양이다.

“영상에서는 엄청 쉽게 뒤집던데.”

“원래 이런 거 뒤집는 게 어려워. 전 같은 것도 그냥 프라이팬 휙휙 하다가 슉 뒤집는 거 보면 엄청 쉬워 보이는데, 직접 하려고 하면 잘 안 되잖아.”

“다음에는 잘 해 드릴게요. 죄송해요.”

“죄송하긴 뭘 죄송해. 맛있기만 하면 됐지.”

정우진은 이렇게 간혹 별것도 아닌 일로 사과하는 경우가 있었다.

위로하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맛만 있으면 나는 모양 같은 건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서 정말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연어도 그냥 끄트머리만 살짝 부서진 거지, 노릇노릇 잘 구워지고 정우진이 야채와 매시트포테이토, 슬라이스 레몬 같은 걸로 나름 꾸미기도 해서 그냥 얼핏 봤을 땐 레스토랑에서 파는 음식처럼 보였다.

나는 시무룩한 얼굴로 정우진이 사진을 찍는 걸 기다리다가 물었다.

“다 찍었어?”

“네, 맛있게 드세요.”

“너도. 잘 먹을게.”

연어는 칼로 자를 필요도 없이 그냥 포크를 갖다 대기만 해도 잘릴 만큼 부드러웠다. 말하기도 입이 아플 정도로 너무 맛있어서 감탄하면서 먹다가 문득 떠올라 물었다.

“근데 텔레비전이 왜 두 개야?”

혹시 집에 영화관처럼 꾸며 놓은, 그런 공간이 있는 건가 싶어서 묻자 정우진이 입에 있는 걸 삼킨 뒤 말했다.

“누워서 보려고 하나 더 샀어요.”

아, 하긴. 텔레비전은 누워서 봐야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물었다.

“어디에 있는데?”

“네?”

“텔레비전이 어떤 방에 있는데?”

“안방이요.”

그 말에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점점 뭔지 모를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머릿속 가득 뜬 물음표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다시 말했다.

“다 먹고 라이브 방송 할래요?”

“갑자기?”

“네, 방송하기 전에 홍보 겸……. 그냥, 심심하니까.”

“좋지, 라이브 방송…….”

정우진 말대로 홍보도 할 겸, 라이브 방송을 켜는 것도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 알 수 없는 어떠한 이유로 찝찝한 마음이 커져 가고 있었다.

“그럼 설거지 다 하고 해요. 인별에 미리 말해야 하나? 아니면 그냥 갑자기 불시에 할까요? 그렇게 해도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음, 글쎄……. 일단 설거지는 내가 할게.”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됐어. 만드는 것도 네가 거의 다 만들었는데.”

어차피 애들이랑 있을 때도 음식을 만들고 준비하는 것보다 나는 대부분 뒷정리만 하기 때문에 설거지는 내가 하는 게 편했다.

“그럼 같이할래요?”

“뭘? 설거지를?”

“네.”

정우진이 또 기대에 찬 눈을 별처럼 빛내며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아주 잠깐 동안 뇌정지 비슷한 게 왔다.

싱크대에서 둘이 설거지를 같이하자고? 물론 그래도 안 될 건 없지만, 그냥 왠지 내키지 않는 느낌이 들어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건 좀……. 그럼 그냥 너 혼자 해.”

내 말에 정우진의 입이 댓 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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