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오남자 첫 화가 나가자, 평소엔 연락도 거의 없던 사람들에게 문자나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건 대표님이 직접 문자를 보내 주셨다는 거다.
[서주야, 방송 잘 봤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하자.]
사실 대표님에게는 그렇게 좋은 감정이 없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을 해 주니 기분은 좋아서 답장을 보냈다.
[선배님 방송 보셨어요?]
물론 정우진에게도 연락이 왔다. 지금 일본에 있다는데 바빠서 아직 방송은 보지 못했다고 한다. 호텔에 가서 자기 전에 본다는데, 오남자 촬영 뒤에 유독 엄청나게 바빠진 느낌이었다.
아니, 원래 이렇게 바쁜데 최근에 이상할 정도로 한가했던 건가?
-선배님, 지금 잠깐 통화해도 될까요?
“어, 왜.”
-저 할 말 있어서 전화했어요. 있잖아요, 좀 전에 도시락 먹었는데 거기에 할라피뇨가 있는 거예요. 돈가스랑 새우튀김 같은 거였는데, 다 식고 완전 눅눅하고 튀김옷도 젖어서 흐물거리고. 안 그래도 맛이 너무 없었는데, 할라피뇨가 돈가스 튀김 위에 완전 꽉 눌려 있었던 거예요. 뚜껑 때문에……. 그래서 돈가스 먹는데 자꾸 할라피뇨 그 매운 맛이랑 시큼한 맛 같은 게 같이 나서 진짜 너무 싫고, 입맛도 없고……. 근데 연어 초밥은 너무 맛있었어요. 선배님, 연어 초밥 좋아하시잖아요. 그쵸? 먹는데 자꾸 선배님 생각나서 다음에는 꼭 같이 먹으러 가고 싶어요. 제가 연어 많이 사 드릴게요.
정우진은 말 못 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붙은 것처럼 한 번 통화를 할 때마다 주절주절 자기가 있었던 일들을 오랫동안 말했다. 어떤 날은 통화할 시간이 별로 없었던 건지, 랩을 하는 것처럼 빠르게 말했는데 거의 반절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했었다.
시간을 가리지도 않고, 이른 오전이나 아주 늦은 새벽에 전화가 올 때도 있었다.
나도 바쁘거나 다른 일 때문에 전화를 못 받으면 아주 긴 문자로 일기를 써서 보내 놓고는 했었다.
사실 이러든 말든 상관은 없었지만, 요즘 들어 빈도가 너무 잦아서 전화를 받는 것도 일이었다.
어느 날은 저장도 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 연락이 온 적도 있었는데, 고등학교 동창이란다. 오랜만이라는 얘기와 그간의 안부도 묻다가 곧 결혼을 한다고 해서 축하한다는 말도 해 주었다.
그런데 결혼할 사람이 비비 팬이라며, 혹시 사인 한 장이라도 좋으니 받아 줄 수 있냐는 말에 흐지부지 연락을 끊어 버렸다.
이렇게 방송이 잘 되니 좋지 않은 일들도 더러 일어났지만, 그래도 요즘은 매일 아침이 행복했다. 조금씩 스케줄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름 내 입장에서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를 보내다가 조금 한가한 오후에 김갑진에게 전화가 왔다.
“어, 왜.”
-야, 너 바쁘냐?
“지금은 안 바빠. 왜?”
-그럼 우리 가게 좀 와 봐.
뜬금없는 말에 의아하긴 했지만 안 간 지 좀 된 것 같기도 했고, 라면이나 먹을 생각에 멤버들과 아직 밥을 안 먹었다는 박준오도 같이 갑멘으로 갔다.
“여기 라면이 진짜 맛있거든?”
“아, 정말요? 사장님이 서주 형 친구분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어요.”
“차슈 추가 무조건 해야 돼.”
“아, 무조건이지.”
인원이 제법 되다 보니 한마디씩만 해도 시끌벅적했다. 작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김갑진은 주방에 있는지 보이질 않았다.
“야, 우리 왔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하자 주방 안에서 김갑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잠깐만!”
“이거 뭐야?”
자리를 잡고 앉으려는데 갑자기 유노을이 벽 한 면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벽 쪽을 보니 처음 보는 액자였다.
“이거 형 사인 아니야? 옆에는…… 세가온 사인?”
“……설마 용이야?”
“미쳤다, 개비싸 보여…….”
“와…….”
애들과 박준오가 액자에서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감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냥 지랄 염병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왔어?”
넋이 나간 얼굴로 액자를 보고 있는데, 김갑진이 주방에서 나왔다.
“형, 이거 뭐예요?”
“멋있지?”
“네, 진짜 개멋있음!”
유노을이 쌍따봉을 날리자 김갑진이 뿌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게 너무 꼴 보기 싫어서 질색하다가 물었다.
“이거 너무 거창한 거 아니야?”
“야, 이 정도는 해야지. 내가 이 액자 맞추는데 돈을 얼마나 쓴 줄 알아?”
“뭐? 이걸 돈 주고 맞췄다고? 그냥 기성품 산 게 아니라?”
“당연하지.”
그 말에 액자를 자세히 보니 나무틀에 새겨진 용이 금방이라도 하늘로 비상할 것처럼 정교했다. 이건 누가 봐도 장인의 솜씨였다.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어, 내가 질렸다는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김갑진이 내 어깨를 퍽 소리 나게 밀었다.
“야, 물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지. 지금 타이밍도 딱 좋구만.”
“뭔 소리야.”
“근데 이분은 누구셔?”
김갑진이 옆에서 가만히 있는 박준오를 보며 물었다. 나는 아, 하고 둘을 인사시켰다.
“새로 오신 매니저인데 같이 왔어. 저녁 먹으려고.”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가 더 어려요.”
“아, 그럴까? 너 라면 좋아해?”
“없어서 못 먹죠.”
둘이 대화하는 걸 잠깐 보다가 고개를 돌리자 애들이 액자를 여러 각도에서 찍고 있는 게 보였다. 누가 보면 예술 작품인 줄 알겠다. 아니, 액자 틀만 보면 확실히 예술 작품이 맞긴 한데…….
“너도 빨리 사진 찍어서 세가온 님께 보내 드려.”
“…….”
김갑진이 갑자기 극존칭을 써서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사진을 찍고 있던 애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형, 내가 잘 찍은 거 있는데, 이거 보내 줄까? 형은 사진 못 찍잖아.”
“맞아, 노을이가 사진 잘 찍으니까 이걸로 보내 드려.”
“형, 내가 찍은 것도 봐봐. 이거 잘 나오지 않았어?”
김강이 내게 제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며 말했다. 슬쩍 시선을 내려다보니 온갖 휘황찬란한 필터가 겹쳐 사인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비켜, 그냥 내가 찍게.”
“플래시 터뜨리지 마.”
“중앙에 잘 맞춰. 삐뚤어지게 찍지 말고.”
“형, 필터 같은 것도 좀 써 봐. 그냥 찍으면 너무 없어 보이잖아.”
옆에 바짝 붙어서 시어머니들처럼 핸드폰 화면을 보며 한마디씩 하는 애들 때문에 안 그래도 없는 실력이 더 없어지는 것 같았다. 결국 열 장 정도 찍어 겨우 한 장을 건진 나는 정우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일단 주문부터 해. 뭐 먹을래?”
그 말에 문자를 보내고 고개를 들어 말했다.
“이거 내가 살 테니까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저도요?”
“당연하지. 내가 너만 안 사 주겠냐?”
박준오가 놀라서 묻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하자 감동 받은 표정을 지었다. 고작 라면 하나에 저렇게까지 감동을 받다니……. 아직 어려서 그런가, 순수한 면이 있었다.
“갑돌이 형.”
그때였다. 김강이 갑자기 엄청 진지한 표정으로 김갑진을 불렀다.
“야, 갑돌이라고 하지 말라고.”
김갑진이 인상을 팍 찌푸리자 김강이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오늘 일찍 퇴근하게 해 드릴게요. 일단 저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줘 보세요.”
“강아…….”
그 박력 넘치는 말에 김갑진이 양손을 모으더니 감격스런 표정으로 김강의 이름을 불렀다. 박준오보다 더 어린 김강이 저러는 걸 보니 순수한 건 나이와 별 관계가 없나 보다.
그때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유노을도 느끼한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전 점보 사이즈로 차슈 다섯 번이 아니라 열 번 추가해 주세요. 일찍 퇴근하게 해 드리겠습니다.”
“음…… 저는 그럼……. 두 그릇 주세요.”
“얘들아…….”
이진혁까지 가세하자 김갑진이 울기 직전인 얼굴로 박준오를 쳐다봤다. 갑자기 자신에게로 시선이 몰리자 당황한 박준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저는 그냥 한 그릇만 주세요. 제가 양이 별로 안 많아서…….”
“한 그릇도 좋아.”
“네,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는 박준오를 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 사 준다며!”
“너무 많이 시켜서 도망가는 거 아니야?”
“형, 나갈 거면 카드 두고 가!”
나는 계속 진동하는 핸드폰을 들고 다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안 도망 가. 전화 받으러 나가는 거야.”
내 말에 이진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전화를 왜 나가서 받아?”
그러자 유노을이 젓가락을 놔주며 무심히 말했다.
“정우진인가 보지.”
“아하.”
“…….”
그 대화를 가만히 듣다가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꽉 줬다. 열은 받는데 진짜 정우진한테 온 전화라서 뭐라고 할 말도 딱히 없었다.
나는 속으로 심호흡을 하며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선배님, 사진 뭐예요?
“저번에 갑멘에서 라면 먹었을 때 네가 사인해 준 거 있잖아. 기억나?”
-아, 네. 갑멘……. 김갑수 씨였나?
“갑진이. 아무튼 그거 액자까지 따로 맞춰서 만들었대.”
-아, 정말요? 그때 안 그래도 액자 맞춘다고 하셔서 엄청 웃겼는데, 정말 맞췄나 보네요. 액자에 그거 용 맞죠?
“어…….”
갑자기 김갑진이 내 친구라는 게 너무 쪽팔려서 작게 말끝을 흐리자 정우진이 웃었다.
-지금 갑멘이에요?
“어, 애들이랑 같이 왔어. 넌 밥 먹었냐?”
-저도 이제 곧 먹을 거 같아요. 선배님, 저 다음 방송할 때도 한국에 없을 거 같은데, 다다음주에는 괜찮을 거 같거든요? 그때 같이 보실래요?
“오남자? 다다음주에?”
-네, 저희 집에서 같이 봐요. 제가 사우나도 사람 불러서 설치해 놨어요.
“…….”
사우나라니……. 완전히 잊고 있었다. 나는 당황한 얼굴로 눈만 깜빡거리다가 물었다.
“그걸 진짜……. 아니, 벌써…….”
-제가 맛있는 것도 해 드릴게요. 그리고 맥주 같은 것도 같이 마실까요? 방송 보면서 간단하게 안주랑 같이 해서 먹으면 좋잖아요.
“어, 그렇기는 한데……. 너희 집에서?”
-네, 아니면 제가 선배님 숙소로 갈까요? 다른 분들만 괜찮다고 하시면 전 그것도 좋아요.
“…….”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놀림을 당했는데, 정우진이 숙소에 온다고? 그리고 애들이랑 같이 방송을 봐? 다음다음 주면 어떤 내용이 나올 차례지…….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다가 순간 떠올렸다.
혹시 화보 촬영하는 장면인가? 아닐 수도 있었지만 만약 맞다면 분명 그 오두막집 게이들 컷이 나올 게 틀림없었다.
“아니……. 그냥 내가 너희 집으로 갈게.”
선택을 강요당한 느낌이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든 건지, 정우진이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