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그냥 잠깐 내리다가 그칠 줄 알았는데, 설거지를 끝내고 강산 작가 일행이 모두 떠날 때까지도 비는 여전히 세차게 쏟아졌다.
“하루 종일 오려나?”
“금방 그칠 것 같지는 않아요.”
비를 맞아서 샤워를 하고 나온 나와 정우진은 조금 전 촬영을 했던 창문으로 가 밖을 바라봤다. 살짝 열린 창틈으로 빗방울이 튀어 들어오고 있었다.
창문 앞에 의자나 탁자처럼 살짝 공간이 있었기 때문에 종이컵에 탄 믹스커피를 들고, 그곳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오늘 낚시 못 하나?”
“낚시하고 싶으세요?”
“꼭 하고 싶은 건 아닌데 그냥 저수지 있다고 하니까 한 번 가 보려고 했지.”
사실 낚시를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고, 평소에 관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라 안 해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좀 아쉽기는 했다.
“조금 있다가 한 번 가 볼래요? 꼭 낚시 안 해도 그냥 구경만 해도 되니까. 아니면 비가 온다 해도 낚시는 할 수 있지 않나?”
“아, 그럼 그냥 구경만 하러 갔다 올까? 비 오는 날 저수지면 예쁘긴 하겠다.”
비 오는 날 물과 산이 있는 풍경이라면 예쁘지 않기가 힘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시는데, 주전자에 물을 팔팔 끓여서 부었더니 너무 뜨거웠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정우진이 물었다.
“맛없어요?”
“아니, 뜨거워서.”
내 말에 정우진이 자기도 믹스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더니 내가 그랬던 것처럼 인상을 팍 찌푸렸다. 너무 질색하는 표정이라 웃으며 물었다.
“뜨겁지?”
“아니요, 맛이 없어요.”
“믹스커피 안 좋아해?”
“처음 먹어 봐요.”
내가 눈을 크게 뜨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아니, 믹스커피 안 먹어 본 사람 처음 봐서……. 아, 그러고 보니까 너 저번에 커피 마실 때도 쓰다고…….”
카페에서 정우진이 커피를 마시다가 내 얼굴에 다 뿜어 버렸던 게 떠올랐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 사실을 알 리가 없으니, 나는 카메라를 보며 설명했다.
“예전에 같이 카페를 간 적이 있는데, 우진이가 제가 시킨 거랑 똑같은 걸 시키더라고요. 제가 그때 아이스아메리카노에 샷 세 번 추가해서 시켰거든요. 아무튼 그래서 저는 그냥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얘가 그거 한 모금 마시더니…….”
“그 얘기를 갑자기 왜 하세요?”
실실 웃으면서 말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다급해 보이는 표정으로 내 입을 막으려는 듯 손을 들었다. 나는 그 손을 피해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였다.
“갑자기 제 얼굴에다가 커피를 뿜는 거예요. 그 시커먼 물을 얼굴에다가 푸왁…….”
“얼굴에 뿜은 게 아니라 그냥 조금 튄 거예요.”
“아니, 그때 나 완전 흠뻑 젖어 가지고 막 물이 얼굴 밑으로 줄줄줄 다 흘렀다고.”
내가 오버를 하면서 말하자 정우진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얼굴이 빨개졌다.
“그러게 커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왜 똑같은 걸로 시켜서.”
“그래야 빨리 나오고…….”
“아니, 거기가 무슨 점심시간에 간 기사 식당도 아니고,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변명이랍시고 한다는 말도 웃겼다.
“아, 저수지 갈 때 커피 좀 타서 보온병에 담아 가려고 했더니…….”
“타서 가세요. 제가 타 드릴게요.”
“됐어, 넌 써서 먹지도 못하는데.”
내가 한숨을 내쉬며 말하자 정우진이 발끈했다.
“써서 못 먹는 게 아니라 맛이 없어서 안 먹는 거예요.”
“알았어, 알았다고.”
“아니, 이게 좀 약간 미끌미끌하고…….”
그렇게 말하며 정우진이 믹스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더니 인상을 또 찌푸렸다. 그리고 최대한 맛을 느껴 보려는 듯 몇 번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너무 텁텁하고, 달고, 냄새도 좀 이상하고…….”
왜 맛이 없는지 설명해 주기 위해 그걸 결국 반이나 더 마셔 버린 정우진이 불쌍해서 대신 남은 커피는 내가 마셔 주었다.
빈 종이컵을 치운 우리는 대충 준비해서 저수지 구경이라도 할 겸 차에 탔다. 비가 와서 그런지 제법 쌀쌀해서 겉옷도 챙겨 뒷좌석에 던져 놨다.
“가는 길에 카페나 편의점 같은 거 보이면 마실 거 사자. 너는 커피 말고 다른 걸로 사. 고구마라테 같은 거…….”
“됐어요. 전 그냥 물 마실래요.”
토라진 목소리라 결국 나도 사실대로 실토했다.
“사실 나도 믹스커피는 별로 안 좋아해. 달아서.”
“알아요, 안 좋아하는 거. 달달한 커피는 안 좋아한다고 하셨잖아요.”
언제 말했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키며 말했다.
“4년 전에 케이 스타에서 말하셨어요.”
케이 스타면……. 한참 전에 없어진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넉 달 전도 아니고 4년 전에 나갔던 예능 프로그램에서 했던 말을 어떻게 아는 건지 모르겠다.
“그걸 어떻게 기억해?”
“기억을 왜 못 해요?”
“와, 진짜 신기하다.”
정우진이 내 팬이었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보통 저렇게 자세한 건 기억 못 하지 않나? 아니면 얼마 전에 재방송이라도 했었나?
“아, 저기 슈퍼 있는데 잠깐 들를까요?”
“그러자.”
저수지로 가는 도중 작은 구멍가게 같은 걸 발견해서 잠시 차를 세우고 들렀다. 마실 건 물과 탄산음료, 우유 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에 고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진 않았다.
“넌 이거 마셔. 색깔도 똑같은 노란색이잖아.”
바나나우유가 있어서 꺼내 주자 정우진이 말없이 그걸 받았다. 나는 초코우유를 골라 계산을 하고 다시 저수지로 출발했다. 정우진이 운전을 하고 있어서 우유에 빨대를 꽂아 건네주는데, 또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자꾸 왜 이러지? 어제도 그러더니…….
“선배님, 초코우유랑 바나나우유 중에 뭘 더 좋아하세요?”
“어? 난 초코우유 좋아하지. 넌?”
“저는 바나나요.”
“오…….”
내 주변에는 바나나 맛보다 초코 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하려다가 멈칫했다. 의아한 표정으로 앞만 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정우진을 쳐다봤다.
정우진은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한 손으로는 우유를 든 채 빨대로 그걸 빨아 마시고 있었다. 빠르게 줄어 가는 단지 속의 우유를 가만히 보고 있는데,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정우진이 빨대에서 입을 떼고 물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우유 잘 먹네.”
“네?”
“많이 먹어.”
뜬금없는 내 말에 정우진이 가만히 나를 보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금방 다 마신 건지 곧 빨대가 조금 남은 우유를 빨아들이는 소리만 크게 울렸다. 그래도 끝까지 계속 빨다 보니 이제 더 빨릴 것도 없는지 공기 소리만 났다.
슙…….
“…….”
슉, 슉.
“…….”
슈우우웁.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했다. 나는 계속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만 깜박거렸다. 반쯤 넋이 나가 있는 상태로 저수지에 도착해 풍경을 구경하기도 하고,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가 돌멩이로 물수제비를 뜨기도 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머릿속에는 계속 유진이가 떠올랐다. 같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성별도 성도 이름도 다른데…….
아, 그래서 내가 정우진이랑 금방 친해졌나 보다. 아무리 같은 프로그램에 출연한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과 빠르게 가까워진 적이 없었다. 특히 정우진처럼 자꾸 부담스럽게 하는 사람은 안 좋아하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친해졌다.
“이제 치울까요?”
저수지에서 돌아와 맥주 한 캔 정도와 함께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반 캔 정도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금방 배가 불렀다.
“더 안 먹고?”
아직 음식이 좀 남아서 묻자 정우진이 웃었다.
“선배님 지금 얼굴 엄청 빨개요.”
그 말에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양 뺨을 꽉 눌렀다. 취한 건 아닌데 술이 들어가니까 얼굴에 열이 올랐나 보다.
정우진은 자기가 치우겠다고 쉬고 있으라고 했지만, 그 정도로 취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같이 뒷정리를 했다. 이제 마지막 밤이라 한 번 더 사우나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정우진이 술 마셨으니까 안 된다고, 안 된다고 졸졸 쫓아다니면서 타령을 하는 바람에 그냥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궁이에 불, 밤에 안 꺼지려나?”
정우진이 먼저 씻으러 들어갔고, 나는 거실에서 짐을 정리하다가 문득 떠올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고 와야겠다.”
내가 집을 나서자 카메라도 날 따라왔다. 가마솥에 어제 산 뼈와 고기를 넣고 저녁을 먹기 전부터 팔팔 끓이고 있었다.
“내일 아침에 이거 먹으면 해장도 되고 좋겠다.”
불이 붙어 있는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괜히 부지깽이로 안을 들쑤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집 뒤에 있는 텃밭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갑자기 내일 가야 된다고 하니까 좀 아쉽네.”
비가 그치긴 했지만 땅이 젖어 있어서 걸을 때마다 물이 조금씩 튀었다. 이쪽엔 조명도 없어서 길이 많이 어두웠기 때문에 밭 안쪽으로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멀리서 보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와…….”
새카만 하늘에 별이 가득했다.
“하늘 좀 보세요. 별 진짜 많다.”
내 말에 카메라가 하늘을 찍기 시작했다.
“와, 대박이다.”
그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던 카메라맨도 탄성을 내뱉었다.
“저렇게 별 많은 거 진짜 오랜만에 본다.”
“저도요. 진짜 예쁘다.”
“정우진한테도 보여 줄까? 다 씻었나?”
멍하게 밤하늘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정우진이 떠올랐다. 나는 조금 빠른 걸음으로 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다 씻고 나온 정우진이 젖은 수건을 들고 날 쳐다봤다.
“어디 다녀오셨어요?”
“야, 잠깐 나와 봐.”
내 말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현관문 쪽으로 와 슬리퍼를 신었다. 그러곤 젖은 수건으로 머리를 닦으면서 내 뒤를 따라왔다.
“어디 가요?”
“일단 와 봐.”
“밭에 가요? 내일 아침에 먹을 거 미리 따 두려고요? 근데 너무 어두워서 괜찮나? 핸드폰 가지고 왔으면 조명이라도 비출 텐데……. 지금이라도 가서 가지고 올까요?”
잔뜩 걱정하고 있는 정우진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아, 바닥 젖었으니까 조심해.”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숙여 아래를 보면서 걸었다. 혹시라도 위를 보면 나중에 말했을 때 감동이 떨어질까 봐 일부러 한 말이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바닥만 보면서 걸을 줄은 몰랐다.
예전부터 느낀 건데 얘는 정말……. 중간이 없는 것 같았다.
“다 왔다.”
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자 정우진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너무 어두워서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지만 걱정스러워 보이는 듯한 얼굴이었다. 아직도 내가 밭에 들어가려고 여기까지 자기를 데리고 온 줄 아는가 보다.
나는 정우진이 뭐라고 하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고개 들어 봐.”
“고개를요? 왜요?”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천천히 턱을 들었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그걸 보며 가만히 있자 빤히 나를 보던 정우진의 시선이 무심코 하늘에 닿았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도 정우진의 눈이 점점 커다래지는 게 보였다.
위로 들려진 고개가 천천히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정우진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 자리에서 아주 느리게 한 바퀴 돌며 밤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도 그런 정우진에게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또다시 이상한 위화감이 전신을 덮쳤다.
무언가 잡힐 듯하다가도 손가락 사이로 물처럼 빠져나갔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뭔가가 떠오를 것 같기도 했는데, 더 이상 생각이라는 걸 할 수가 없었다.
“…….”
“…….”
정우진이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