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나는 놀란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붕 떠서 사방팔방으로 뻗쳐 있는 머리를 꾹꾹 눌러 주며 말했다.
“지금 일어났어?”
“네, 저 갑자기 잠이 들어서…….”
“어어, 그래. 이쪽으로 와 봐.”
내가 팔뚝을 잡고 가볍게 당기자 정우진이 비틀거리며 다시 현관문 안으로 들어갔다.
“일단 신발부터 똑바로 신고.”
“네, 근데 저 오래 잤어요?”
“아니, 늦잠 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내가 먼저 깨서 그냥 간단하게 아침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너 아직 잠 덜 깬 거 같으니까 진정하고 여기 봐.”
슬리퍼를 갈아 신으면서도 계속 횡설수설하는 정우진의 앞에서 가볍게 손뼉을 두 번 치자, 정우진이 깜짝 놀라며 나를 쳐다봤다.
“정신 차렸어?”
“네.”
“머리 좀 꾹꾹 눌러 봐.”
내 말에 정우진이 아직도 잠이 덜 깬 눈으로 자기 머리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뻗칠 대로 뻗친 머리는 회생이 불가능해 보였다. 하는 수 없이 그대로 정우진을 데리고 나와 평상에 앉혔다.
“어우, 우진 씨. 완전 푹 주무셨나 봐요.”
정우진의 모습을 보고 송철 피디가 웃으며 말했다.
“네, 안녕하세요. 너무 잘 잤어요.”
“그렇게 보이세요.”
그 말에 정우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와 송철 피디를 번갈아 봤다. 아무래도 자기 머리카락이 얼마나 뻗쳐 있는지 알지 못하는 듯싶었다. 물이라도 좀 묻히라고 말해 주려다가, 어제 얼굴에 낙서 당했던 기억이 떠올라 모른 척 말했다.
“이제 거의 다 됐어.”
“저도 도와 드릴게요.”
“그럼 접시 좀 가지고 와 줄래?”
“네.”
이제 완전히 잠이 깬 건지 비틀거리지도 않고 똑바로 걷고 있었다. 나는 정우진이 가지고 온 접시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삶은 감자와 볶은 김치를 담았다. 담고 보니까 너무 초라한 듯해 조미김도 꺼내 그 옆에 뒀다.
“감자랑 김이랑 같이 먹으면 맛있어.”
“저도 그렇게 먹는 거 좋아해요.”
“이렇게 먹어 봤어?”
“네.”
나는 정우진이 잘 먹는 걸 뿌듯한 표정으로 보며 웃음을 삼켰다. 저렇게 머리가 뻗쳐서 삶은 감자의 껍질을 까고 있는 걸 보니 인간적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라 보기가 좋았다.
접시를 싹싹 비우고 설거지까지 끝낸 뒤 평상에 앉아 있자 정우진이 말했다.
“선배님, 저 먼저 씻을까요?”
“아니, 일단 조금만 앉아 있어 봐.”
“네?”
“좀 있다가 씻자.”
밝은 햇빛 아래에서 폭탄 머리를 한 채 앉아 멍을 때리는 정우진의 모습이 조금 더 카메라에 담겼으면 싶었다. 내 마음을 아는 건지, 카메라맨들도 열심히 여러 각도에서 정우진을 찍고 있었다.
다행히 정우진도 내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그냥 옆에 앉아서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오늘 자기 전에 가마솥에 어제 사 왔던 뼈 넣고 밤새도록 끓이자.”
“아궁이에요? 밤새도록 끓여도 되나?”
“응,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그거 먹고 가면 딱 좋지.”
정우진이 내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런저런 말을 하고 있는데 멀리서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스태프들도 분주해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포스터 촬영 팀이 온 것 같았다. 평상에 앉아 있던 우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진작가님 오셨어요?”
“네, 지금 오신 것 같아요.”
“아, 그럼 빨리 씻어야겠네.”
내 말에 정우진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는 그런 정우진을 빤히 보다가 그의 손목을 잡고 차가 들어온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작가님한테 먼저 인사하고 가서 씻자.”
“네.”
카메라맨들이 나와 정우진을 찍으면서 분주하게 따라왔다. 처음 보는 스태프들에게도 인사하면서 사진작가처럼 보이는 남자를 발견해 그쪽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하자 정우진도 똑같이 인사했다. 차 안에서 뭔가를 꺼내고 있던 사진작가가 우리를 보더니 화색을 띠며 덩달아 인사하려다가 정우진을 보더니 주춤거렸다.
“아, 안녕하세요. 아이고.”
사진작가가 당황하며 나와 정우진을 번갈아 보더니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오늘 포스터 촬영을 담당하는 강산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어나더 원입니다.”
“저희는 처음 뵙죠?”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아, 하고 말했다.
“혹시 우진이랑은 구면이세요?”
“네네, 저희는 몇 번 같이 작업한 적이 있어서…….”
“아…….”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우리는 동시에 정우진을 바라봤다. 자유분방하게 뻗쳐 있는 머리카락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와서 입술을 꽉 깨물자, 강산 작가가 나를 쳐다봤다. 그러더니 뭔가 눈치를 챘는지 자기도 웃음을 참으면서 말을 돌렸다.
“아무튼, 정말 반갑습니다.”
“네네, 저도 반갑습니다.”
우리는 다시 맞잡은 손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인사를 했다. 정우진은 말없이 우리가 잡고 있는 손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기만 했다.
“그러면 저희는 일단 씻고 올게요.”
“네네, 그러셔야 할 것 같아요. 그럼 저도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네.”
목례를 하고 돌아서자 내 뒤를 가만히 따라오던 정우진이 조금 부루퉁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왜 그렇게 많이 흔드세요?”
“어?”
“악수할 때 왜 그렇게 자꾸 계속 막 오랫동안 흔드시냐고요, 웃으면서…….”
우리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웃음을 참고 있는 걸 보고 본능적으로 자길 놀리고 있다는 걸 깨달은 것 같았다. 나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모르는 척했다.
“안 그랬는데요?”
“아까 그랬잖아.”
“아닌디?”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가며 계속 깐죽거리다가 정우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부터 씻어.”
“…….”
“아, 사우나도 하고 싶은데 시간 안 되겠지?”
“…….”
“아, 알았어.”
시위하듯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노려보는 정우진을 보며 결국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정우진을 보며 말을 할 듯 말 듯 계속 뜸을 들이다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너무 예뻐서 그랬지.”
“……네?”
“너무 예뻐서요.”
“…….”
“너무…….”
나는 어제 정우진이 내게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끝까지 정색을 하고 말하려고 했는데, 정우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몹시 떨리고 있어서 결국 웃음이 터져 버리고야 말았다.
“하하하!”
“…….”
“아흑흑…….”
크게 웃다가 문득 정우진이 얄밉게 웃던 게 떠올라 얼른 숨을 죽이고 웃는 소리까지 따라 했다. 그러자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던 정우진이 뭔가를 깨달은 듯 화들짝 놀라며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조금 뒤, 거울로 자신의 몰골을 확인한 듯 크게 고함을 질렀다.
“아, 선배님!”
“흑흑흑.”
욕실 문 밖으로 삐죽 나온 머리통에 물이 잔뜩 묻어 있는 걸 보며 나는 흐느끼듯 웃어 버렸다.
***
다 씻고 헤어와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와중에도 정우진은 혼자 계속 삐쳐 있었다.
“야, 너 표정이 왜 그래. 완전 복어 같아.”
거울로 보이는 잔뜩 성난 얼굴에 다시 웃음이 터져 버렸다.
“말도 안 해 주고.”
“너도 어제 말 안 해 줬잖아.”
“어쩐지, 좀 있다가 씻으라고 할 때도 뭔가 이상했어.”
“괜찮아. 자고 일어나면 원래 다 머리 뻗치는 거지. 그쵸?”
머리를 만져 주고 있는 사람에게 묻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조해 주었다.
“그럼요, 그럼요.”
“거봐.”
“선배님은 머리 안 뻗쳤잖아요.”
“나는 안 움직이면서 자니까 그렇지.”
평소에 나는 잘 때 정말 죽은 것처럼 똑바로 누워서 잔다. 멤버들 말로는 고개도 옆으로 한번 돌리지 않을 정도라고 했었다.
내 말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보다가 물었다.
“저도 안 움직이는데요?”
“……뭐?”
“저도 잘 때 가만히 누워서 자요.”
뭐지? 일부러 우기는 건지, 진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침대 밑으로 이불까지 다 떨어질 정도인데, 자기 잠버릇을 모를 수가 있나? 아니면 너무 피곤해서 이번에만 그런 건가?
“표정이 왜 그러세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왜요? 또 왜 그러시는데요?”
나는 계속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다가 말했다.
“그냥 나중에……. 방송 나오면 봐.”
“…….”
“편집된다면 어쩔 수 없고…….”
순간 정우진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는 게 보였다.
“혹시 제가 뭐 이상한 짓이라도 했어요?”
“음…….”
“왜요?”
“으음…….”
“선배님, 왜요? 네? 제가 뭘 했는데요?”
계속 놀리고 싶었지만 이대로 뒀다가는 울 것 같아서 나는 결국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너 잠버릇이 좀 심해서…….”
“잠버릇이요?”
“많이 뒤척이더라.”
“제가요? 그럴 리가 없는데?”
의심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튼 방송 나오면 알겠지. 자기가 얼마나 침대 위에서 굴러다니면서 자는지…….
대충 헤어와 메이크업이 끝나 갈 때쯤 강산 작가가 스케치북을 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피디님께 들었는데, 두 분 촬영 컨셉이 귀농한 부부라면서요?”
“아, 그 컨셉은 폐기됐어요.”
“아, 폐기됐어요? 그럼 안 되는데…….”
곤란한 표정으로 말하는 강산 작가를 보니 나도 덩달아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설마 저희 부부 컨셉으로 촬영하는 거예요? 제발…….”
제발 아니라고 해 주세요……. 내 간절한 눈빛에 강산 작가가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때 옆에서 정우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는 부부 컨셉 좋은데…….”
“아, 두 분 의견이 다르시네.”
“근데 컨셉은 왜요?”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묻자, 강산 작가가 가지고 온 스케치북을 펼쳐서 보여 주며 말했다.
“아까 말했던 건 농담이고요. 두 분 컨셉이 부부는 아니지만, 귀농한 남자 둘이 오두막집에서 생활한다는 컨셉이거든요. 물론 이 집이 오두막이라고 하기에는 좀 좋은 집이기는 하지만……. 따뜻하고 목가적인 분위기로 찍을 거예요.”
스케치북에는 강산 작가가 말한 컨셉이 알아보기 쉽게 그려져 있었다. 정우진과 나처럼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집 안에서 사진을 찍는 모습과, 밖에서 밭으로 걸어가고 있는 모습 등등, 배경도 다양했다.
“우선 처음에는 저기 창문 앞에서 찍을 건데, 두 분이서 저희 집에 놀러 오세요, 라고 말하는 것처럼 해 주시면 돼요.”
“아, 저희 안 그래도 그런 얘기 했었거든요. 여기가 마치 민박집인 컨셉으로……. 말만 하고 그런 컨셉처럼 행동하지도 않긴 했지만.”
내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하자 정우진이 물었다.
“지금이라도 할까요?”
“촬영할 땐 그런 식으로 해도 될 것 같기도 하고…….”
저희 오두막 민박집에 놀러 오세요, 이런 느낌으로?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강산 작가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그렇게 해 주시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가 소품도 준비했는데, 오다가 갈대밭을 봐서 가을이기도 하니까 그것도 챙겨 볼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서주 씨 탄생화가 갈대더라고요?”
그 말에 정우진이 아, 하고 덧붙였다.
“맞아요, 선배님 탄생화 갈대예요. 12월 8일.”
“어, 내 생일을 어떻게 알아?”
“당연히 알죠.”
뿌듯한 얼굴로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조금 감동받은 표정을 짓고 있는데, 강산 작가가 말을 이었다.
“우진 씨는 12월 12일이 생일이고, 탄생화는…….”
“잠시만요, 선배님 혹시 제 탄생화 뭔지 아세요?”
정우진이 강산 작가의 말을 끊고 내게 물었다. 내 탄생화도 몰랐는데 내가 정우진의 탄생화를 알 리가 없었다. 결국 찍을 수밖에 없었는데, 아는 꽃도 별로 없어서 한참 고민하다가 말했다.
“무궁화?”
“갑자기 웬 무궁화예요?”
“우리나라 국화잖아.”
“……애국자시네요.”
어쩐지 실망한 듯한 표정이었다. 무궁화 싫어하나? 아니면 너무 성의 없이 대답했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다시 물었다.
“절 보면 무궁화가 떠오르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 무슨 꽃이 떠오르세요?”
좀 곤란해서 고개를 돌려 강산 작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내 물음에 강산 작가가 정우진을 가만히 보더니 기다렸다는 듯 술술 대답했다.
“우진 씨는……. 화려한 느낌이랑 단아한 느낌이 공존한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백합이나 목련 같은 꽃이 떠오르는 거 같아요. 뭔가 여러 송이의 작은 꽃들보다는 단독으로 한 송이만 있어도 부족해 보이지 않고 기품 있는 느낌?”
역시 전문가는 다른 걸까? 듣다 보니까 그럴 듯해서 오, 하고 감탄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대뜸 말했다.
“선배님은 개나리 같아요.”
“아……. 그래, 고맙다.”
뜬금없는 말에 당황해서 말하자 강산 작가가 나와 정우진을 번갈아 보면서 입을 열었다.
“우진 씨 탄생화는 목화라서 갈대랑 같이 준비했는데……. 개나리는 없어요.”
“네, 없는 게 당연하죠.”
“아쉽다.”
“예, 뭐……. 아무튼 그렇습니다.”
뭐가 그렇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강산 작가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아서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