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5화 (100/190)

95화

사우나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자 시원한 공기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와, 진짜 좋다.”

내가 감탄사를 내뱉자 정우진이 나를 보며 말했다.

“선배님, 저 양치질하고 있을 테니까 먼저 씻으세요.”

그냥 같이 씻자고 하려다가 말이 잘 나오질 않아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빨리 씻고 나갈게.”

“천천히 씻으셔도 돼요.”

나는 정우진과 카메라맨들이 나가자마자 옷을 다 벗고 학교에 지각한 사람처럼 씻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수건으로 몸을 닦는데, 새 옷이 없다는 걸 깨닫고 문을 살짝 열어 정우진을 불렀다.

“야, 나 옷 좀 갖다 줘.”

“아, 네. 잠시만요!”

조금 기다리자 정우진이 살짝 열린 문틈으로 옷을 넣어 주며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벌써 다 씻으신 거예요?”

“어어.”

“지금 5분밖에 안 지났는데…….”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옷을 껴입고 밖으로 나오자 칫솔을 들고 있는 정우진이 보였다.

“너 양치질 안 했어?”

“밖에서 했어요.”

“빨리 들어가서 씻어. 땀 식으면 감기 걸리는 거 아니야?”

정우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카락을 말리려고 하다가 조금 전에 핸드폰 전원을 꺼 놨던 게 떠올랐다.

강수민이 전화가 왜 왔던 거지? 또 기사 난 거 보고 헛소리나 하려고 했던 게 틀림없었다. 문자라도 와 있을 줄 알았는데, 부재중 전화 외에 다른 건 들어와 있지 않았다.

멤버들 단체 메시지 방에, 잘 도작했냐는 문자가 와 있어서 답장을 보내고 있는데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씻어서 그런지 양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는 정우진이 머리카락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게 보였다.

“벌써 다 씻었어?”

“네.”

시간을 보니 정우진도 다 씻는데 얼추 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혹시 내가 빨리 씻어서 그런 건가? 난 그냥 정우진이 감기 걸릴까 봐 그랬던 건데.

“저녁 뭐 먹지? 간단하게 그냥 국수나 만들어 먹을까?”

“네, 아무거나 괜찮아요.”

“그럼……. 음, 그냥 잔치국수 같은 거 만들까? 멸치 육수 내서 양념장 넣고 먹으면 금방 만들 수 있지 않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밖으로 나가자 송철 피디가 보였다.

“저녁 식사 하셨어요?”

“네, 저희는 아까 간단하게 먹었어요.”

우리가 자는 사이에 제작진들끼리 저녁을 먹었나 보다. 씻고 나와서 그런지 엄청 피곤하기도 해서 우리는 별말 없이 곧장 저녁을 준비했다.

내가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요리는 대부분 정우진이 했다. 그냥 국수를 삶고 육수에 양념장을 넣어 간만 맞추고 먹으면 되는 거라 준비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와, 국수 완전 쫄깃하다.”

“별것도 안 넣었는데 되게 맛있는 거 같아요.”

“밖에서 먹으니까 더 맛있나 봐.”

신김치를 다져서 참기름과 섞은 다음에 국수에 같이 넣었는데, 그게 정말 신의 한 수였다. 국수 한 그릇을 다 먹고 설거지까지 끝낸 다음 따뜻한 보리차를 타서 평상에 앉자 송철 피디가 말했다.

“내일 아침 촬영은 오전부터 할 거라 일어나서 바로 준비하시면 될 거예요.”

“오전 몇 시부터 해요?”

“예정은 열 시부터인데 조금 더 늦어질 수도 있고, 빨라질 수도 있고 그래요. 일단 오늘 저녁에는 피곤하실 테니까 푹 주무시고 아침에 일어나시면 됩니다.”

오전 열 시부터면 이른 시간도 아니니 문제는 없었다.

“그럼 저희는 들어가 볼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봬요.”

스태프들과 인사를 한 뒤 집 안으로 들어왔다. 너무 피곤해서 눈을 반쯤 감고 양치질을 하는데 거울 속으로 아직도 눈이 말똥말똥한 정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그걸 보자마자 피식 웃음이 터졌다.

“왜 웃으세요?”

입 안에 거품 때문인지 정우진이 어눌한 발음으로 물었다. 뭐라고 하려다가 나도 거품 때문에 말을 잘 못 할 것 같아서 그냥 고개만 흔들었다.

물로 입을 헹구고 욕실에서 나온 나는 침대가 있는 방으로 가 다시 한번 카메라의 위치를 확인했다. 욕실처럼 하나 정도만 있을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정사각형의 방 안에 사각지대라고는 단 한 군데도 없을 것 같았다.

“선배님, 안에서 주무실 거예요?”

정우진이 방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침대 사이즈가 커서 둘이 같이 자도 상관은 없을 것 같기는 한데……. 이제 와서 따로 자겠다고 한 명은 이불을 깔고 바닥에서 자는 것도 좀 이상했다. 그리고 내가 바닥에 이불을 깔면 정우진은 자기가 밑에서 자겠다고 할 게 분명했다.

“…….”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네가 안에서 자.”

내 말에 정우진이 쭈뼛거리다가 어정쩡한 자세로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가만 보니까 덮는 이불도 하나밖에 없었다. 뭔가 좀 황당한 마음이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빨리 자고 싶은 마음이 컸기 때문에 나는 정우진이 눕는 걸 본 뒤 불을 껐다.

암막 커튼까지 쳐져 있어서 그런지 불을 끄자 눈앞이 완전히 캄캄해졌다.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침대 안으로 들어가자 정우진이 말했다.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굳이 보지 않아도 정우진이 이불을 젖혀 줬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 이불을 덮은 뒤 푹신한 베개에 머리를 대고 몸에 힘을 뺐다.

“내일 아침에 알람 맞춰 놔야 하나?”

“제가 깨워 드릴게요.”

“너도 늦잠 자면 어쩌려고?”

“저 늦잠 안 자요.”

장담을 하고 있었지만 그다지 믿음이 가진 않았다. 근데 생각해 보니까 핸드폰이 거실에 있었다. 다시 일어나서 가지고 오려니 귀찮아서 그냥 나는 눈을 감았다.

“내일 포스터 촬영하고 저수지에 한 번 가 보자.”

“낚시 하시려고요?”

“그래도 왔는데 한 번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너 낚시 해 봤어?”

“아니요,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선배님은요?”

“나도 안 해 봤어.”

지금 거의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라서 어눌한 발음으로 느리게 대답하자 정우진이 잠시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

“저 너무 긴장돼서 잠도 못 잘 것 같아요.”

“눈 감고 가만히 있으면 잠들어.”

“잠이 진짜 하나도 안 와요.”

“일단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 봐.”

졸려 죽겠는데 자꾸만 말을 시켜서 대충 대답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다시 뭐라고 말했다. 그 잠깐 사이에 깜빡 잠이 들어서 무슨 소리를 했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시장 갔을 때 식빵 같은 거라도 살 걸 그랬어요.”

“그러게…….”

“그럼 아침에 간단하게 우유랑 같이 먹으면 좋을 거 같은데.”

“그치…….”

“감자 있나? 감자 샐러드랑 같이 먹으면…….”

“그렇지…….”

반사적으로 대답하다가 나는 어느 순간부터 잠이 들었다. 언제 잠이 든 건지, 얼마나 잤던 건지 모르겠지만 갑작스럽게 이마를 때리는 무언가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가 이마에 닿아 있는 무거운 걸 손으로 밀어냈다. 나는 그게 뒤늦게 정우진의 팔이라는 걸 깨달았다. 잔뜩 몸을 웅크리고 등을 돌린 채 눕자 금방 또 잠이 왔다.

“…….”

하지만 나는 다시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내 다리 위로 정우진의 다리가 턱 올라왔기 때문이다. 결국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부스스 상체를 일으켜 앉자 정우진이 침대 정중앙에 대자로 뻗어 있는 게 보였다.

“…….”

둘이 덮고도 남을 만큼 커다란 이불은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하마터면 나도 이불처럼 침대 밖으로 떨어질 뻔했다.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겠고……. 아직 조용한 걸 보면 아침은 아닌 것 같은데.

조금 더 자야겠다고 생각하고 바닥에 떨어진 이불을 주섬주섬 주워 정우진에게 덮어 주고 나도 덮었다. 그리고 침대 구석탱이에 쭈그려 누워 다시 잠을 청하려는데 정우진이 뒤척거리기 시작했다.

“…….”

한참 뒤척거리다가 움직임을 멈추고 다시 고개를 돌려 보니, 이번에는 정우진이 내 허리를 베고 가로로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하…….”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잠이 깬 건지 더 자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 천천히 몸을 빼내 정우진의 머리를 침대에 내려 두고 조용히 방 밖으로 나왔다.

핸드폰을 찾아 시간을 확인한 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아침 공기가 쌀쌀했다.

“왜 벌써 일어나셨어요?”

“정우진이…….”

“네?”

“침대에서 막 굴러다니고…….”

“우진 씨가요?”

스태프 중 한 명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다시 생각하니 웃겨서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아니, 자다가 깼는데 이불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거예요. 걔가 안에서 자고 제가 바깥에서 잤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몸부림을 쳤으면…….”

스태프들이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낄낄거리고 있는데 송철 피디가 나왔다. 나는 송철 피디에게도 정우진의 잠버릇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준 다음 아침은 뭘 먹을 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우진은 좀 더 자게 두고……. 아침은 간단하게 볶음밥 같은 거 할까요? 어제 김치 다져 놓은 것도 남았는데……. 김치볶음밥 할까?”

슬리퍼를 신고 마당을 돌아다니면서 카메라를 보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진 씨는 안 깨우고요?”

“네, 제가 봤을 땐 걔 지금 완전 기절했어요.”

“어제 엄청 피곤했나 보다.”

“도시락 싸느라 잠도 못 잤대요. 소풍이나 여행 같은 게 거의 처음이라고 했었나? 아무튼 그래 가지고 기대 많이 했나 봐요.”

그런 말을 하면서 다진 김치를 가지고 왔다가 나는 밥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아, 난 냄비 밥 자신이 없는데……. 감자 있나? 그냥 감자 쪄서 김치랑 먹을까?”

마당 한가운데에 덩그러니 서서 멀뚱멀뚱 카메라만 쳐다봤다. 냄비 밥을 하면 태울 게 분명해서……. 차라리 감자를 쪄 먹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감자도 괜찮지 않을까? 밥이랑 비슷하니까……. 똑같은 탄수화물이고……. 그래, 차라리 감자랑 같이 먹어야겠다. 괜히 냄비 밥 했다가 태우면 수습도 못 하고…….”

나는 계속 중얼거리며 호미와 바구니를 챙겨 밭으로 갔다. 그리고 감자를 몇 개 캐서 다시 집으로 와 흙을 털어 내고 물로 깨끗이 씻었다. 아궁이에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인 다음에 감자를 통째로 넣고 팔팔 끓이고, 다진 김치도 프라이팬에 넣어 데우고 있는데 집 안에서 작은 인기척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굳게 닫혀 있던 현관문이 열리면서 자다가 막 깬 것이 분명해 보이는 정우진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새하얀 얼굴에 한쪽 뺨에는 베개 자국이 나 있었고, 머리카락은 폭탄을 맞은 것처럼 동서남북 사방으로 뻗쳐 있는 대단한 모습이었다.

“선배님…….”

“아니, 우진아……. 너…….”

“죄송해요, 저 잠을…….”

별로 늦게 일어난 것도 아닌데 정우진은 자기 꼴이 어떤지도 모르고 미안하다는 얼굴로 내게 비틀거리며 다가왔다. 아직 잠이 덜 깬 건지 슬리퍼도 짝짝이로 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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