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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화 (99/190)

94화

정우진이 시키는 대로 하니, 양머리는 금방 만들 수 있었다. 대충 머리에 쓰고 거울을 보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내 앞을 가로막고 양머리를 만져 주며 말했다.

“여기 약간 짝짝이 아니에요?”

“왼쪽?”

“이제 됐어요. 저도 씌워 주세요.”

애도 아니고 뭘 또 씌워 달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잔뜩 들뜬 표정이라 나는 별말 없이 그냥 모자를 씌워 줬다. 최대한 양쪽의 비율이 맞게 잘 씌워 준 다음 내 모습을 보고 싶어 거울을 보러 가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이번에는 내 손목을 잡았다.

“선배님, 이쪽 봐 보세요.”

“사진 찍게?”

“이쪽 보고 양처럼 해 보세요.”

“양처럼은 뭔데? 양 흉내 내라고?”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묻자 정우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양 흉내는 살면서 한 번도 내 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뭘 어떻게 하라는 거야? 나는 심각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메에에?”

“표정도 양처럼 해야죠.”

“양 표정이 뭔데? 야, 그거 줘. 네가 양처럼 해 봐.”

나는 정우진의 손에서 핸드폰을 빼앗으며 말했다. 너는 어떻게 하나 보자, 라는 심정으로 카메라를 들이대자 조금 당황하는 것 같던 정우진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었다.

“메에에?”

“왜 따라 해?”

“그냥 브이나 할게요.”

정우진이 갑자기 온갖 포즈로 여러 종류의 브이를 하면서 자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그 뻔뻔한 모습에 웃으면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고 있는데, 정우진이 말했다.

“이번에는 같이 찍을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셀카 모드로 바꾸려는데, 정우진이 핸드폰을 가져가 팔을 앞으로 쭉 뻗더니 후면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려고 했다.

“이렇게 찍으면 더 잘 나온대요.”

“그럼 안 보이잖아.”

“이 각도면 얼굴도 나올 거예요.”

“그래?”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핸드폰 카메라를 쳐다봤다. 조금 위쪽을 향해 들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고개가 들렸다. 연달아 사진을 몇 장이나 찍으며 표정도 바꿔 보고 자세도 바꿔 보면서 그러고 있는데, 왠지 정우진의 상태가 좀 이상한 것 같았다.

사진 찍느라 정신이 팔려서 몰랐는데, 아까부터 마치 추운 사람처럼 떨고 있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슬쩍 시선을 돌려 정우진을 바라봤다.

“……?”

표정이 뭔가……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은, 요상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

“너무 예뻐서요.”

순간 발밑으로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카메라 쪽을 쳐다보려다가 안간힘을 다해 정우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뭐라고?”

“너무…….”

“…….”

“아하하.”

사색이 된 얼굴로 되묻자 별안간 정색을 하고 말하던 정우진이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내면서 웃기 시작했다. 알 수가 없는 행동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보다가 카메라를 쳐다봤다.

“왜 웃어?”

“아니…….”

“뭔데, 갑자기 왜 웃냐고.”

“아흑, 흑흑…….”

“…….”

웃음을 참느라 이젠 이상한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웃고 있는 건지, 울고 있는 건지 분간이 되지도 않고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더듬더듬 양머리를 만지다가 벽에 붙어 있는 거울 쪽으로 갔다.

그리고 거울을 확인하는 순간, 정우진이 왜 그렇게 웃는지 알 수 있었다.

“…….”

이마 정중앙과 턱 끝에는 커다란 소용돌이 모양의 낙서, 그리고 양 볼에는 여러 개의 하트 모양, 코끝에는 새카만 별 모양…….

송철 피디도 그렇고 스태프들이 나만 보면 왜 그렇게 놀랐던 건지, 이제 이해가 됐다. 나는 화를 삭이며 입술을 깨물고 정우진을 돌아봤다.

“야.”

“아니, 선배님. 왜 안 깨요?”

“이거 네가 그랬지? 너 죽을래?”

“계속 낙서해도 인상만 조금 찌푸리고, 너무 안 깨서 기절한 줄, 아야!”

정우진의 등짝을 철썩철썩 몇 대 때리고, 세면대에서 손에 물을 묻혀 뺨을 벅벅 문질러 봤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야, 이거 안 지워져!”

“아니에요, 비누로 씻으면 지워질 거예요. 으흑흑…….”

“아니……. 하, 야. 웃을 거면 그냥 웃어, 자꾸 울지 말고.”

자꾸 이상한 소리로 웃는 정우진을 보며 황당해서 결국 나까지 웃음이 터져 버렸다. 그러자 정우진이 배를 부여잡고 크게 웃기 시작했다.

“아, 진짜 이건 언제 그린 거야.”

“선배님 잘 때 심심해서 그렸는데 꼼짝도 안 하던데요?”

“어휴, 저 초딩.”

“응애.”

세상에 어떤 초딩이 응애 하고 우냐고 하려다가 그냥 말을 말았다. 저렇게 유치하게 나오니까 말로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진짜 카메라만 없었어도 몇 대 더 때렸을 텐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비누칠을 해 벅벅 세수를 했다. 그리고 물로 대충 헹구고 거울을 봤지만 아직도 볼펜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안 지워져!”

“큰일 났네, 진짜. 내일 포스터 촬영도 해야 하는데……. 화장 진하게 하면 그래도 가려질 거예요.”

정우진이 내 옆에서 거울로 나를 보며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황당한 얼굴로 물을 뚝뚝 흘리면서 거울 속으로 정우진을 바라봤다.

“아니면 우리 특이한 컨셉으로 가면 같은 거 쓰고 할래요?”

“어, 그러자. 볼펜 가지고 와 봐. 넌 내가 그냥 얼굴을 가면으로 만들어 줄 테니까.”

“흑흑흑.”

“아, 진짜 그렇게 웃지 말라고.”

나는 이를 악물고 팔꿈치로 정우진의 옆구리를 퍽퍽 쳤다. 맞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계속 웃던 정우진이 세면대에 물을 틀어 손에 물을 묻혔다. 그리고 비누칠을 하면서 거품을 내더니 한쪽 손만 물로 헹구고 한쪽 손은 그대로 비누 거품을 묻힌 채 내 쪽으로 돌아봤다.

“얼굴 들고 가만히 있어 보세요.”

그러더니 방금 씻어서 물만 묻은 손으로는 내 뒷목을 단단히 잡고, 거품이 묻은 손으로는 내 오른쪽 뺨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뭔가 어린애 세수시키는 자세였지만 일단 지금은 볼펜 자국을 지우는 게 중요했기 때문에 가만히 있었다.

“좀 지워져?”

“네, 지워지고 있어요.”

“확실해?”

“왜 제 말을 안 믿으세요?”

“너 같으면 믿으시겠어요?”

“절대 안 믿지.”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묻자 정우진이 뻔뻔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숨을 푹 쉬다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근데 보통 소용돌이 모양을 뺨에다가 하지 않냐?”

“소용돌이요?”

“그 뱅글뱅글 모양 있잖아. 이마랑 턱에다가 한 거.”

“다음에는 그럼 뺨에다가 소용돌이 모양 그려 드릴게요.”

뭐라고 한마디 하려다가 그냥 또 말을 말았다. 대충 다 문질렀는지 손을 떼기에 물을 틀어 세수를 한 번 더 했다. 정우진이 계속 문질렀던 살갗 쪽을 중심으로 씻어 내고 거울을 보니, 정말 거짓말처럼 볼펜 자국이 사라져 있었다.

“어, 지워졌다.”

나는 황급히 손에 비누를 묻혀 좀 전에 정우진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뺨을 문질렀다. 그러자 정우진이 옆에서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게 하지 말고 살살 여러 번 문지르세요. 세게 하면 조금만 문질러도 아프잖아요. 피부도 빨개지고.”

“살살 하고 있어.”

“네? 그게 살살 하는 거예요? 지금 선배님 얼굴 완전 찌그러지고 있는데…….”

그 말에 나는 아차 싶어 다시 살살 아기를 다루듯 뺨을 문질렀다. 코끝은 지우기가 좀 힘들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다 지워 내는데 성공한 나는 피곤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선배님, 이거 바르세요.”

“너 잘 때 조심해라.”

건네준 로션을 손바닥에 짜서 얼굴에 바르며 말하자 정우진이 설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무 기대돼요. 과연 선배님이 제 얼굴을 어떻게 해 주실지.”

“어휴.”

“이제 온도도 다 올라간 거 같은데 들어가 볼까요?”

닫아 놨던 사우나의 문을 열자 더운 열기가 후끈 느껴졌다.

“우리 그냥 따로 들어가자.”

“선배님 먼저 들어가세요.”

정우진이 내 등을 밀어서 좁은 사우나 안으로 억지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내 말이 안 들리니?”

“안으로 좀 더 들어가 보세요.”

“그래, 들어갈게.”

또 저러는 거 보니까 무슨 말을 해도 안 들을 것 같아서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최대한 구석탱이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와, 여기 무슨……. 오븐 안이야.”

너무 좁아서 카메라는 들어오지 못하고 밖에서 우리를 찍고 있었다. 언제 받은 건지 정우진이 손캠을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진짜 완전 좁다.”

“그래도 생각보다 숨은 안 막히네.”

엄청 좁고 더워서 숨쉬기도 힘들 줄 알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 좁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게 좋았다.

“와, 손에 물 묻은 거 벌써 다 말랐어요.”

“온도가 높아서 금방 마르나 봐.”

“여기 너무 좋은 거 같아요.”

마침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서 정우진을 보며 말했다.

“그치? 집에 이런 거 있으면 진짜 엄청 좋을 거 같아. 피곤할 때 사우나 한 후 샤워하고 자면 진짜 엄청 좋을 거 같은데. 뜨겁게 지지니까 피로도 풀리는 거 같고.”

“선배님, 사우나 하는 거 좋아하세요?”

“아니, 나는 사우나보다는 뜨거운 탕에 들어가 있는 게 더 좋아. 근데 사우나도 지금 해 보니까 괜찮은데?”

들어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거 하나 살까요?”

충동구매 스케일이 너무 큰 거 아닌가 싶었지만 솔직히 나라도 돈만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 것 같았다.

“어디서 사? 인터넷으로 살 수 있나?”

“주문하면 배달해 주지 않을까요? 이거 사면 저희 집에 놀러 오세요. 선배님은 특별히 5분에 천 원만 받을게요.”

“5분에 천 원을 받는다고? 아니, 저번에…….”

저번에는 월세랑 관리비에 생활비도 안 받는다고 하더니, 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동네 사우나 갈게.”

“그럼 5분에 오백 원만 내세요.”

“어, 동네 사우나 갈게.”

“5분에 오십 원.”

“동네 사우나 갈게.”

“5년에 십 원.”

듣지도 않고 거절하다가 순간 나온 파격 세일에 나는 멈칫했다. 내가 망설이는 걸 느꼈는지 정우진이 덧붙였다.

“거기에 구운 계란이랑 식혜는 공짜로 드릴게요.”

“…….”

“배고플 땐 라면도 끓여 드려요.”

“콜.”

내가 얼른 대답하자 정우진이 풉 하고 웃었다. 덩달아 나도 웃음이 터져서 우리는 한참 동안이나 어깨를 들썩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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