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5/190)

90화

그래도 앞서 두 문제는 정우진이 힘을 내줬으니 마지막 문제만이라도 내가 맞혀야만 했다.

도대체 달콤한 라면이 뭐지? 일단 설탕 라면은 절대 아니고……. 꿀 라면? 달달 라면? 달라면……. 달라면? 아니야……. 단라면……. 이것도 아니고…….

통통통통…….

“선배님, 제가 방금 하나 떠올랐는데…….”

“뭔데?”

그때 말없이 안마를 하고 있던 정우진이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내 귓가에 속삭였다.

“달콤 라면?”

“안마나 해.”

“넵.”

“힘 더 줘서.”

내 말에 정우진이 다시 귀에다 대고 물었다.

“세게요?”

“어, 근데 너 아까부터 왜 자꾸 귓속말로 말해?”

내 물음에도 정우진은 말없이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것보다 어깨를 주무르는 손에 힘이 들어가니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어깨와 목 뒤쪽, 그리고 날개뼈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곳을 꾹꾹 눌러 주니 몸이 노곤해져서 촬영 중인지도 잠시 잊은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왜 이렇게 안마를 잘하지? 너무 시원해서 하마터면 졸 뻔했다.

그러는 와중에 몸의 피로가 풀려서 그런지 머릿속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계속 미궁 속에 있는 것 같던 문제의 답이 불현듯 떠올라 버렸다.

“잠깐만!”

벼락에 맞은 듯 소스라치게 놀라며 외치자 모든 시선이 내게 쏠렸다.

“정답.”

나는 가볍게 손을 들고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 말씀하세요.”

“설마…….”

“네.”

“그대와 함께라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송철 피디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흘렀다. 긴장감이 맴도는 가운데 뜸을 들이던 송철 피디가 나를 보며 말했다.

“다시 말씀해 주시겠어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설마 맞았나?

나는 그윽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그대와……, 함께라면?”

“정답!”

“와!”

“와!”

정답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우진과 나는 동시에 제자리에서 펄쩍펄쩍 뛰었다. 그리고 양손으로 하이 파이브를 계속했다.

“고기! 고기 사자!”

“너무 좋아요!”

야채가 잔뜩 들어간 된장찌개와 호박잎도 맛있었지만, 역시 놀러 와서는 고기를 먹어야 제맛이었다.

***

현금이 담긴 종이봉투를 받아 챙긴 우리는 곧장 차를 타고 시장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옷이라도 좀 갈아입고 갈 걸 그랬나 싶은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이미 출발을 한 뒤였다.

어쩔 수 없이 목에 한 손수건만 풀고 시장에 도착하자 정겨운 분위기가 한껏 느껴졌다.

“와, 꽈배기도 파네. 나중에 저것도 사 먹자.”

“지금 살까요?”

“일단 볼일부터 보고.”

“좋아요.”

길거리에서 온갖 걸 다 파는 바람에 잠시 한눈을 팔다가 우리는 가장 먼저 모탕을 파는 곳으로 갔다. 주인아저씨에게 추천을 받아 튼튼하고 커다란 모탕을 사고, 정육점에 들러 곰탕용 뼈와 고기, 그리고 수육용 삼겹살도 샀다.

“꽈배기 얼마예요?”

“두 개 천 원.”

“얼마치 사지? 한 오천 원? 찹쌀 도넛도 있는데 이것도 살까?”

달달한 냄새와 고소한 기름 냄새가 진동해서 그런지 조금 전에 밥을 먹었는데도 입에 침이 고였다.

“헐, 대박. 고로케도 있네. 야, 돈 얼마나 남았어?”

내 물음에 정우진이 봉투 안에 남은 돈을 확인했다.

“오천 원 정도요.”

오천 원밖에 없다니……. 고기를 너무 많이 샀나? 아니, 고기도 딱 먹을 만큼밖에 안 샀는데.

“찹쌀 도넛이랑 고로케는 얼마예요?”

“하나 이천 원씩이요.”

그 말에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정우진을 보며 물었다.

“꽈배기는 하나씩 먹고 저거는 반씩 나눠서 먹을까?”

“전 안 먹어도 돼요, 선배님 드세요.”

“야, 그래도 같이 먹어야지. 일단 그럼 그렇게 사자.”

빠르게 정하고 꽈배기 천 원어치와 찹쌀 도넛 하나, 고로케 하나를 주문했다.

“찹쌀 도넛이랑 고로케는 혹시 반으로 잘라 주실 수 있을까요?”

“당연히 되지요.”

계산을 하는 아저씨가 꼭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말해서 웃음이 나왔다.

“근데 뭐 찍는 거예요?”

주인아저씨가 고로케를 가위로 잘라 종이컵에 담아 주며 물었다.

“아, 이거 예능 프로그램인데……. 아직 방송 전이에요. 오두막집 남자들이라고, 이제 곧 해요.”

“나도 봐야겠네.”

“그래 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이거는 서비스로 드릴게요. 이것도 찹쌀 도넛인데, 이건 안에 팥 없는 거.”

아저씨는 우리가 산 찹쌀 도넛보다 크기가 작은 도넛을 봉투에 두 개나 담아 줬다. 계산을 하고 인사까지 하고 나오자 양손이 가득했다.

“와, 고로케 튀긴 지 얼마 안 됐나 봐. 따뜻해.”

종이컵에 담긴 고로케의 온기가 손으로 느껴져 눈을 크게 뜨고 말하자 정우진이 말했다.

“그럼 그거부터 얼른 드세요.”

시장 구경도 하면서 먹을까 했는데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정우진이 토스트를 먹으면서 줄줄 다 흘렸던 게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종이컵 안에 있는 고로케를 이로 깔짝거리고 있는 걸 보니 걸으면서 먹지는 못할 것 같았다.

“어디 좀 앉아서 먹자.”

그렇게 말하고 앉을 곳을 찾아 조금 더 걷다가 그냥 대충 구석에 턱이 올라와 있는 곳에 엉덩이만 걸쳐 앉았다.

“고로케 완전 맛있어.”

“따뜻하니까 더 맛있는 거 같아요.”

“감자 엄청 부드럽다. 야채도 많고, 고기도 있는 거 같고…….”

고로케는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 건지, 배가 고픈 것도 아닌데 너무 맛있었다. 반밖에 없어서 금방 먹고 단팥이 가득 든 찹쌀 도넛도 먹는데, 얼마나 쫄깃하고 달달하고 고소한지 이것도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근데 우리 너무 구석에서 숨어 먹으니까…….”

내가 말끝을 흐리자 정우진이 자기도 계속 그렇게 느꼈던 건지 웃었다.

“엄청 웃기죠? 사람들이 자꾸 쳐다봐요.”

“카메라도 있고 그래서 그런가 봐. 꽈배기는 걸어가면서 먹을까?”

“네.”

자리에서 일어나 종이봉투 안의 꽈배기를 하나씩 나눠 갖고, 서비스로 받은 작은 찹쌀 도넛은 입에 넣었다.

“시장 진짜 오랜만에 온다.”

“저도요. 가도 마트만 갔지, 시장은 엄청 오랜만이에요.”

사람들은 제법 있었지만 장을 보느라 바쁜 건지, 우리를 모르는 건지 그냥 카메라가 있는 게 신기해 몇 번 쳐다보기만 하고 다들 갈 길을 갔다.

“꽈배기 엄청 퐁신퐁신하다.”

“퐁신퐁신이요?”

“먹어 봐.”

내 말에 설탕이 잔뜩 묻은 꽈배기를 한 입 먹은 정우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엄청 퐁신퐁신해요.”

“그치? 맛있지?”

잘 먹는 모습을 보니 내가 만든 꽈배기도 아닌데 어쩐지 뿌듯해졌다. 돈만 있었으면 더 샀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이 광경을 어디선가 봤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뭐지?

순간 드는 위화감에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 처음 보는 광경에 처음 보는 사람들, 처음 겪는 상황인데…….

소란스러운 시장 안의 풍경 속에서 기억나지 않던, 어쩌면 잊고 있었을지도 모를 장면들이 두서없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너 이거 처음 먹어 봐?’

‘근데 너는 말을 못 해?’

‘대답을 해 봐. 고개만 끄덕거리지 말고.’

‘내일도 먹으러 갈까? 내가 사 줄게.’

마치 영화를 몇 배로 배속해서 보듯 화면이 빠르게 지나갔다. 내가 열 마디를 하면 겨우 한 번 정도 고개를 끄덕거리던 애가 내일도 먹으러 가자는 말에 가만히 나를 보다가 목소리를 냈다.

‘응.’

“선배님?”

“…….”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던 앳된 얼굴과 정우진의 얼굴이 겹쳤다.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린 나는 넋이 나간 얼굴로 몇 번 눈을 깜빡거리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어, 잠깐 뭐 좀 생각하느라고…….”

“무슨 생각이요?”

뭐라고 설명을 해 주고 싶은데,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도 모를 만큼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그때 분명 200원밖에 없어서…….

“돈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그때…….”

“네?”

“아니……. 아, 왜 이렇게 머리가 멍하지? 너무 많이 먹었나 봐.”

별안간 떠오르는 기억을 떨쳐 내며 나는 있는 힘껏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시장에서 이런 걸 사 먹으니 생각이 나기라도 했나 보다. 그것보다 지금은 촬영 중이니 집중력을 잃어서는 안 됐다.

“좀 쉬었다 갈까요?”

걱정스러운 어조로 묻는 정우진에게 나는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야. 와, 근데 진짜 뭐 엄청 많다.”

“다음에 돈 가지고 다시 와 보고 싶어요.”

“그치? 먹을 것도 많고…….”

핫도그부터 시작해서 떡볶이 등등, 길거리 음식들은 굉장히 많았지만 돈이 없는 우리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선배님, 이거 보세요.”

그때 정우진이 뭔가를 발견했는지 나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익숙해 보이는 기계가 있었다.

“와, 이거 게임 기계 아니야? 예전에 많이 했는데.”

“지금은 안 되나 봐요.”

작은 두 개의 게임기가 나란히 붙어 있었지만 고장이 난 건지, 아니면 전원을 꺼 놓은 건지 화면은 들어와 있지 않았다. 그 옆에는 뽑기 기계가 있었는데 인형 뽑기처럼 커다란 기계가 아니라 동전을 넣고 한 바퀴 돌리면 장난감이 나오는, 그런 옛날 기계였다.

‘이거 네가 돌려 볼래? 백 원짜리 동전 거기에 하나 넣고, 손잡이 잡고 한 바퀴 돌리면 거기 구멍에서 과자가 나오는데…….’

“이거 정말 오랜만에 본다…….”

어쩐지 추억에 잠긴 것 같은 표정으로 정우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미치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조금 전에 먹었던 꽈배기에 술이라도 들어 있던 건지 나는 현실과 과거가 뒤죽박죽 섞여 분간이 잘 되지 않았다.

진짜 큰일 난 거 아닌가? 촬영도 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자꾸…….

나는 멍하게 정우진을 보다가 힐끗 카메라 쪽에도 시선을 한 번 주었다. 그리고 정우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오빠.’

아니, 말하려고 했는데 나를 돌아본 정우진의 얼굴을 보는 순간 들려오는 소리에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조금 전처럼 어릴 때의 기억이 떠오른 건지, 정우진이 상황극을 하느라 장난을 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러세요?”

“어?”

“동전 몇 개 남았는데, 이거 한 번 해 볼까요?”

“어어, 그래……. 네가 돌려 봐. 오른…….”

정우진이 봉투 안에서 동전을 꺼내는 걸 보며 나는 말끝을 흐렸다. 곧 오백 원짜리 동전을 꺼낸 정우진이 기계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동전 거기에 넣고, 오른쪽으로 한 바퀴만 돌려 봐.”

“이렇게요?”

“흘릴지도 모르니까 나오는 곳에 손 받치고 있고.”

과자 떨어뜨리면 안 되니까…….

하지만 결국 과자는 바닥으로 떨어졌고, 그 애는 그 자리에 앉아 그걸 하나씩 주워 먹었다. 땅그지냐고 뭐라고 해도 꿋꿋하게 한 알, 한 알씩 다 주워 먹다가…….

“나왔다.”

맛있다고 웃었는데…….

정우진은 장난감이 들어 있는 동그란 플라스틱 볼을 들며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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