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우리는 대충 밭을 구경하며 무엇을 가지고 갈지 의논했다.
“이거 그냥 뜯으면 돼?”
“가위 같은 걸로 잘라야 하지 않아요?”
“가위로? 그냥 손으로 뚝 부러뜨리면 안 되나?”
정우진과 나는 둘 다 농사나 밭 관련해서는 무지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난관이었다. 스태프들에게 물어도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는 걸 보면 그냥 우리끼리 알아서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것 같기에 일단 도구들을 찾기 시작했다.
딴 야채들을 담을 넓적한 바구니와 가위, 그리고 흙을 파헤칠 호미도 챙기고 손이 다칠 수도 있으니 목장갑도 손에 꼈다. 이러고 보니 뭔가 그럴듯한 농사꾼 같아서 밀짚모자도 하나 집어 정우진에게 씌워 줬다.
“오빠는 안 쓰세요?”
모자 끄트머리에 달린 기다란 줄을 매만지며 정우진이 물었다. 호칭 통일 좀 하지. 자기 마음대로 오빠라고 했다가, 선배님이라고 했다가……. 그래도 듣다 보니 조금씩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나는 그냥 웃었다.
“어, 난 괜찮아. 자기가 써.”
내 말에 정우진이 뭐라고 하려다가 갑자기 입술을 꽉 깨물며 웃음을 참기 시작했다. 그걸 보니 나도 갑자기 웃음이 터져서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집 뒤에 있는 텃밭까지 정우진과 나란히 걸어가며 작게 말했다.
“야, 너 근데 촬영하기 전까지만 해도 예능 처음이라 무섭다고 하더니……. 뭐 그렇게 뻔뻔하냐?”
“지금도 많이 떨리고 무서워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
“진짜예요. 선배님이 계셔서 그나마 괜찮은 거지, 혼자 있었으면 아무 말도 못 했을걸요?”
밭까지 올라가는 길이 꽤 가팔라서 숨이 조금씩 흐트러졌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주 그냥 놀리려고 눈이 벌게져서…….”
“그럼 선배님도 저 놀리시면 되잖아요.”
“난 그렇게 유치하게 놀기 싫어.”
내가 질색하자 정우진이 또 놀리는 것처럼 웃었다.
“그럼 점잖게 한 번 놀아 볼까요?”
“점잖게 노는 건 뭔데?”
“저희는 이제 조선 시대 양반집 신혼부부인데, 혼례식 올리자마자 집안사람들이 무슨 잘못을 해서 우리도 연좌제 같은 걸로 시골에 귀양을 온 거예요. 그래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서로에게만 의지하면서…….”
또 소설을 쓰고 있는 정우진을 황당한 얼굴로 보다가 말했다.
“시대만 바꾼다고 그게 점잖은 거냐?”
“그럼 점잖게 호칭도 바꿀까요? 서방님 이런 걸로.”
“아니, 우진아. 나는 너랑 부부가 하기 싫어…….”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 자꾸 핀트가 어긋나는 말만 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간절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도련님이랑 돌쇠 같은 건 어때요?”
내 간절함이 통한 건지, 조금 고민하는 것 같던 정우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부부보다는 훨씬 낫기는 한데……. 꼭 그렇게 연기를 해야 돼?”
내 물음에 정우진이 어쩐지 놀란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토끼처럼 커다래진 눈을 보며 나는 이놈이 또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우진이 무엇엔가 감동받은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선배님은 있는 그대로의 제가 제일 좋다는 뜻이죠?”
“……그치.”
10년 차 귀농 부부라든지, 귀양 간 신혼부부 같은 걸 할 바엔 차라리 이렇게 생각하게 두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아서 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그냥 선배님이라고 부를게요.”
“그래, 정말 고맙다.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
“뭘요.”
쓸데없는 얘기들을 하며 밭에 도착한 우리는 어설픈 손짓으로 먹을 만큼의 야채를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된장찌개 끓이고, 호박잎 찌고……. 그렇게만 먹을까? 근데 쌀은 있나?”
“쌀은 당연히 있지 않을까요? 자급자족이라고는 하지만 벼를 도정해서 먹을 수는 없으니까…….”
“그건 그렇지. 김치도 있겠지?”
“없으면 겉절이 같은 거 만들까요? 배추나 상추 같은 거 있으니까 대충 뜯어서.”
처음에는 우왕좌왕했지만 그래도 서로 대화를 하며 하나씩 맞춰 가니 그럭저럭 계획이 세워졌다. 바구니 한가득 수확물을 담고 집으로 오자 송철 피디가 우리를 보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뭘 그렇게 많이 가지고 오세요?”
“밥 먹어야죠.”
“또 드시게요?”
“점심 먹어야죠. 재료 준비하고 만드는데 시간도 걸릴 텐데, 지금 빨리 해야 돼요. 아니면 혹시 뭐 다른 거 해야 하나요?”
내 물음에 송철 피디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요, 딱히 그런 건 없어요. 그냥 편하신 대로 하세요. 밥을 해 드시든가, 밭에 물을 주시든가, 거품 목욕 같은 걸 하시든가…….”
“네? 거품 목욕이요?”
거품 목욕까지는 아니더라도 뜨거운 물에 들어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좀 솔깃해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물었다.
“선배님, 나중에 같이 사우나 하실래요?”
그러고 보니 욕실에 두세 명 정도 들어갈 수 있는 작은 사우나도 있었다.
“사우나 좋지. 밤에 잠도 잘 오겠다. 근데 밥은 어디다 해? 밥솥 있나?”
나와 정우진이 동시에 송철 피디를 바라봤다.
“냄비 있으니까 거기다가 해 드시면 돼요. 쌀이랑 기본 조미료 같은 건 주방에 다 있어요.”
“……냄비요? 냄비 밥 해 본 적 없는데…….”
내가 중얼거리자 정우진이 주방에 가서 필요한 걸 가지고 오겠다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일단 걱정은 뒤로 밀어 두고 밭에서 갓 따온 채소들을 물로 씻어서 팍팍 털었다.
아까 정우진이 싸 온 김밥을 먹을 때부터 점심은 내가 해 주려고 했는데 낯선 환경과 낯선 도구, 식재료들로 뭘 하려니 너무 힘들었다. 내일쯤 좀 익숙해지면 그때 뭐라도 해 주는 게 나을 듯싶었다.
뭐부터 해야 하나 감이 잡히질 않아서 마당을 한 바퀴 쭉 둘러보자 드럼통 같은 걸로 만든 아궁이 두 개가 보였다. 나는 그걸 가만히 보다가 혹시나 싶어 물었다.
“여기에서 해야 하는 거죠?”
“네.”
“주방에 가스레인지 있던데…….”
“가스레인지는 사용 금지예요.”
갑자기 서바이벌 감독관처럼 단호하게 말하는 송철 피디를 보며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힐링 예능이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이런 게 힐링 아닌가요? 자연을 벗 삼아 살아가는 거요.”
“자연을 벗 삼는 게 아니라 그냥 옛날 체험 같은데……. 일단 알겠습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가혹하진 않아서 다행이긴 했지만 냄비 밥이 문제였다. 그래도 애들이랑 캠핑 가서 불을 피워 본 적은 있어서 그건 문제없었다.
아궁이 안이 텅 비어 있어서 또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데, 정우진이 쟁반에 뭘 잔뜩 가지고 나왔다.
“뭐야?”
“쌀이랑 조미료 같은 거요.”
“야, 아궁이에 불 때서 밥해야 된대.”
“그럼 장작도 패야 하나?”
우리가 차 안에서 예상했던 게 들어맞았다. 집 뒤쪽으로 가니 도끼와 받침대로 쓰는 모탕, 그리고 말린 나무를 저장해 두는 공간이 보였다.
“너 장작 패 본 적 있어?”
“아니요, 선배님은요?”
“나도 없긴 한데……. 일단 불 피워야 되니까 이거부터 해 보자.”
뭔가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해서 다가가 도끼를 들어 보니 제법 무거웠다. 내가 도끼를 살펴보고 있는 사이 정우진이 말린 나무 몇 개를 들고 와 모탕 위에 두며 말했다.
“안 다치게 조심하세요.”
“혹시 모르니까 넌 일단 멀리 좀 떨어져 있어 봐.”
저리 가라고 손을 휘휘 흔들었지만 정우진은 꼼짝도 하지 않고 오히려 한 발자국 더 다가오며 말했다.
“저는 선배님을 믿어요.”
“뭔 소리야. 저리 가라고.”
“네…….”
다시 한번 말하자 정우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좀 더 뒤로 갔으면 싶었지만 웬일로 내 말을 듣나 싶어서 그냥 내버려 뒀다.
나는 심호흡을 하면서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모탕 위의 나무를 바라봤다. 그리고 도끼를 양손으로 잡고 머리 위로 살짝 올렸다가 정확히 정중앙을 향해 내려찍었다.
혹시 몰라서 너무 빠르게 하지도 않고 세게 찍지도 않았는데, 도끼가 가운데를 찍자 쩍 하고 나무가 반으로 갈라졌다.
“와! 선배님 완전 나무꾼 같아요!”
옆에서 구경하던 정우진이 박수를 치면서 좋아했다. 나무꾼 같다는 게 칭찬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쉬워서 오히려 머쓱해진 나는 도끼를 내려놓고 쪼개진 나무를 들며 말했다.
“이거 별로 안 어려운데?”
“정말요?”
“그냥 찍으니까 바로 쪼개져. 뭔가 결 같은 게 있어서 정확하게 치기만 하면 조금만 힘 줘도 금방 반으로 갈라지나 봐. 너도 해 볼래?”
내 물음에 정우진이 조금 망설이는 듯하다가 내가 놔둔 도끼 쪽으로 손을 뻗었다. 어딘지 모르게 겁을 집어먹은 것 같은 표정이라 모탕 위에 나무를 하나 놔주며 말했다.
“세게 칠 필요도 없고 빨리 할 필요도 없고, 그냥 중간에 맞히기만 하면 돼.”
“중간에요?”
“어, 그러면 그냥 갈라지던데…….”
정우진은 어정쩡한 자세로 도끼를 들고 우물쭈물하다가 천천히 팔을 들었다. 표정도 그렇고 자세도 너무 자신이 없어 보여 저러다가 다치면 어쩌나 걱정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천천히 하라고 한 번 더 말하려던 순간, 정우진이 도끼를 내려쳤다.
쩌억, 하고 내가 장작을 팼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커다란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가 뜨자 도끼가 장작을 반으로 가른 것도 모자라 모탕에 깊숙이 박혀 있는 게 보였다.
“…….”
“…….”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나와 스태프들도 놀라긴 했지만 정우진도 많이 놀란 건지 황당한 얼굴로 나무에 박혀 있는 도끼를 보다가 나를 쳐다봤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얼굴을 보며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니, 돌쇠야…….”
“어떡해요?”
“너 무슨 힘이…….”
“도련님이 주신 쌀밥을 먹었더니…….”
그 와중에도 내 말에 맞장구를 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돌쇠야, 일단 도끼부터 좀 빼 봐.”
내 말에 정우진이 발을 들어 모탕을 고정하고 도끼를 잡더니 몇 번 힘을 줬다. 단단히 박혀 있던 도끼가 쑥 빠지자, 모탕 정중앙에 깊고 넓게 갈라져 있는 상처가 보였다. 잡고 조금만 힘줘도 저 큰 통나무가 반으로 뚝 갈라질 것처럼 보였다.
“…….”
“…….”
남의 집 재산을 망가뜨린 나와 정우진은 그 커다란 흠집을 가만히 보다가 서로 짜기라도 한 듯 송철 피디를 바라보며 SOS 신호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