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정신을 차리고 전신 거울 앞에 서자 게임에 져서 벌칙으로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 같은 모습이 비쳤다. 헛웃음이 나와서 웃자 정우진이 내 옆에 서서 거울로 나를 보며 웃었다.
“귀엽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말에 나는 똑같이 거울 속으로 정우진을 보며 웃었다.
“너도 내가 귀엽게 만들어 줄까?”
그리고 손수건 하나를 찾아 똑같이 정우진의 목에 묶어 줬다. 이로써 괴상한 모습의 쌍둥이 덤 앤 더머 같은 패션이 완성되었다.
“선글라스도 써.”
“선배님도 가지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진작 말하지. 그럼 나도 가지고 왔을 텐데.”
시무룩한 표정으로 선글라스를 쓰는 정우진의 웃긴 모습을 보며 나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가지고 와서 같이 썼으면 진짜 웃겼을 텐데. 선글라스를 쓴 정우진이 멀뚱멀뚱 거울을 보다가 나에게 물었다.
“선배님, 저 어때요?”
“가관이야.”
갑자기 개그 욕심이 나서 나 역시 뭐라도 머리에 뒤집어쓸까 하다가 너무 오버하면 또 보는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이쯤 하고 밖으로 나갔다.
“세상에.”
우리의 모습을 본 송철 피디가 놀란 얼굴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마음껏 비웃으라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자 정우진도 옆에서 날 따라 한 바퀴를 돌았다.
“아주 찰떡 호흡이세요, 두 분이. 처음부터 계속 여기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 같아요.”
“네, 앞으로 여기가 2박 3일 동안 저희 집이죠.”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희가 같이 운영하는 민박집이에요.”
갑작스러운 말에 나는 놀란 얼굴로 정우진을 바라봤다.
“민박집이라고? 갑자기?”
“귀농해서 뭐 먹고 살까 하다가 민박집을 하기로 한 거예요.”
“야, 민박집 좋네. 우리 둘이?”
“네, 부부가 같이 운영하는 민박집이에요.”
정우진이 말하는 대로 받아 주려다가 부부라는 말에 다시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부부라고? 너랑 내가?”
“네, 왜요?”
정우진이 뻔뻔하게 되물었다.
“아니, 부부는 좀……. 그냥 동업자 정도로 하면 안 될까?”
“어떤 동업자가 이렇게 커플로 옷을 입어요?”
“커플 옷 입는 동업자가 있을 수도 있지. 그럼 이걸 그냥 우리 민박집 유니폼이라고 하면 어때?”
“그럼 민박집 망해요.”
단호한 말에 말문이 막힌 나는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제시했다.
“근데 남자끼리 어떻게 부부가 될 수 있어? 결혼 못 하잖아.”
“여긴 외국이에요, 선배님.”
“외국? 아, 외국이라고? 외국이면 되지. 남자끼리도 결혼 가능하지.”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웃자 정우진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저희 결혼한 지 한 10년 정도 됐고, 도시에서 너무 힘겹게 찌들어 살다가 이제 좀 내려놓고 편안하게 살기 위해 귀농한 거예요.”
“결혼한 지 10년이나 됐어? 근데 여기 너무 외져서 손님이 올까?”
뒷내용이 궁금해서 맞장구를 치며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근데 저희는 도시에서 벌어 놓은 돈이 많아서 사실 손님은 안 와도 돼요. 이 산도 우리 거라서 그냥 농사짓고 산책이나 하면서 느긋하게 사는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쓰읍 하고 곤란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보며 말했다.
“근데 나는 결혼은 여자랑 하고 싶은데…….”
“그럼 제가 여자 할게요, 오빠.”
“…….”
예상치도 못한 상황에서 들린 오빠라는 단어에 나는 다시 당황해서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때 우리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송철 피디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프로그램명을 오두막집 남자들이 아니라 오두막집 부부라고 바꿀까요?”
정우진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찬성할게요. 오빠도 찬성하신대요.”
“내가 언제?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원래 부부는 일심동체예요.”
이 새끼 분명 예능은 처음이라고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다가 나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저기, 갑자기 진지해져서 미안한데……. 나는 도저히 이 콩트를 이어 나갈 자신이 없어…….”
“콩트라니요?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미안해, 진짜……. 나 예능 너무 오랜만이라서……. 적응을 아직 못 했나 봐. 아니, 진짜 미안. 어떡하지?”
당황해서 몸 둘 바를 모르는 나를 보며 주변 사람들은 웃음이 터졌지만, 나는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정우진은 주변에서 아무리 웃어도 40년 차 배우처럼 몰입한 상태로 내게 말했다.
“오빠, 그럼 저희 텃밭에 한 번 가 보실까요? 오늘 수확할 게 있어서요.”
“어, 그래……. 근데 오빠라는 말 좀 안 하면 안 될까?”
“여보라고 할까요?”
“…….”
입 안에 아무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자꾸 뭐가 튀어나올 것 같은지 모르겠다. 저 뻔뻔한 얼굴을 보니 이 컨셉으로 계속 밀고 나갈 것 같아서 나는 좀 겁먹은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기야……. 차라리 그냥 오빠라고 해.”
“네, 오빠.”
나는 도저히 정우진에게 이길 수가 없을 거 같아서 그냥 흐름에 몸을 맡겨 보기로 했다.
***
텃밭이라고 해서 그냥 적당한 크기에 상추 같은 게 심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그냥 전문 농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와, 진짜 엄청 크다. 이걸 두 분이서 다 관리하시는 건가?”
어마어마한 크기의 밭을 보고 내가 놀라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어느새 조금 멀리까지 간 정우진이 중간에 쪼그리고 앉아 뭔가를 만지며 말했다.
“선배님, 이거 쪄서……. 아니, 오빠! 이거 쪄서 먹을까요?”
“뭔데?”
“단호박이요. 단호박 좋아하세요? 쪄서 먹는 거 싫으면 죽 해 먹을까요? 토마토도 있네. 토마토 갈아 마실래요? 목 안 마르세요?”
조잘조잘 떠드는 걸 보니 잔뜩 흥분해 있는 것 같았다. 정우진은 내 대답을 듣지도 않고 또 다른 곳으로 가서 야채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정우진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힐끗 카메라를 향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거 그냥 다 공짜로 주시는 거 맞아요?”
“…….”
내 물음에 카메라맨은 아무런 대답도 하질 않았다. 가만히 카메라를 노려보면서 다시 물었다.
“마음대로 써도 돼요? 아무거나, 다? 네?”
“…….”
“왜 아무 말씀도 안 하세요? 네? 잠시만, 이거 피디님께 한 번 물어봐야겠다. 피디님 어디 계시지?”
다시 왔던 길을 돌아가려고 하는데 멀리서 송철 피디가 보였다. 나는 손을 흔들면서 그를 불렀다.
“피디님!”
“네?”
“이거 마음대로 아무거나 막 뽑아서 먹어도 돼요? 공짜예요?”
“네, 마음껏 드세요! 공짜예요!”
원하는 대답을 들었지만 어쩐지 계속 찜찜한 마음이었다. 힐링 예능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동안 송철 피디의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 이걸 그냥 줄 리가 없는데……. 그것도 몇 년 전이니까 바뀐 건가?
공짜라고 마음껏 먹으라고 해도 왜 이렇게 계속 마음이 안 놓이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좀 더 확실하게 대답을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송철 피디가 있는 곳까지 가려는데,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정우진이 내 손목을 잡았다.
“선배님, 이거 보세요.”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웬 넓적한 초록색 이파리를 든 채 팔랑거리고 있었다.
“이거 쪄서 쌈 싸 먹으면 맛있대요.”
“쌈? 뭔데, 그게?”
“호박잎이요. 인터넷에서 봤어요. 된장찌개랑 같이 먹으면 맛있대요. 묽게 말고 자작하게 끓여서, 애호박이랑 양파랑 이런 거 큼직하게 썰어서 같이 끓이고…….”
한 손에 호박잎을 들고 빙빙 돌리기도 하고 손목을 움직이면서 팔랑거리며 말하는 게 너무 신 나 보여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가 갑자기 웃자 정우진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된장찌개 안 좋아하세요?”
“아니? 좋아하는데?”
내가 계속 실실 웃으면서 말하자 정우진이 멀뚱멀뚱 날 보다가 어쩐지 수줍은 듯한 얼굴로 웃었다.
“저도 좋아해요.”
아까는 그렇게 사기꾼처럼 뻔뻔하더니 지금은 왜 이렇게 순수한 시골 소년 같은지 모르겠다. 이 정도면 거의 이중인격 아닌가?
잠시 정우진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물었다.
“그냥 이파리 따서 쪄 먹으면 되는 거야? 만두 찌듯이?”
“이거 따서, 손질도 해야 돼요. 이렇게, 줄기 쪽 살짝 부러뜨려서 위로 벗기면……. 껍질 같은 거 보이시죠? 이렇게 해야 안 질기대요.”
“오, 신기하다.”
“저도 인터넷에서 보기만 하고, 실제로 처음 해 봐요. 이거 막 손으로 이렇게 비비고, 이렇게 막……. 막 이렇게 해야 안 뻣뻣하고 부들부들해진다고 하던데…….”
정우진이 갑자기 커다란 호박잎을 양손으로 구기면서 비비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나는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렇게 하는 거 맞아?”
“맞아요, 이렇게 하라고 했어요.”
“확실해?”
“네, 확실해요. 이렇게 해야 부드러워진대요.”
그래도 먹는 걸 이렇게 막 비비는 게 정말 맞는 건가? 나는 정우진이 어설프게 하는 것을 가만히 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정우진이 내 손 위에 호박잎을 놓았다. 나는 정우진이 조금 전 그랬던 것처럼 잎을 양손으로 구기면서 비벼 봤다.
“이렇게?”
“네, 너무 세게 하지는 마세요. 그러다가 찢어질 수도 있잖아요.”
“이러고 그냥 찌면 되는 거야? 그리고 된장찌개랑 같이 밥 싸 먹어? 상추에 싸 먹는 것처럼?”
“네, 맛있겠죠?”
나는 잔뜩 구겨져서 정말 부들부들해진 이파리를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