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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87/190)

82화

그래도 다행인 건 거실이나 방처럼 사각지대 없이 여러 곳에 카메라가 달린 게 아니라, 구석에 딱 하나만 있어서 어떻게 각도만 잘 조절하면 찍히는 건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메라가 저절로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아직도 내 뒤에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자리를 옮기면서 떼어 내려는데 마침 정우진이 말했다.

“선배님, 옷은 이걸로 입어야 하나 봐요.”

그 말에 나는 이때다 싶어 몸을 돌려 정우진을 밀어내며 말했다.

“어떤 거?”

“근데 디자인이 달라서……. 어떤 거 입으실 거예요?”

내가 밀어내자마자 정우진은 정확하게 딱 밀려난 만큼 다시 다가오며 내게 옷을 건넸다. 고개를 들면 얼굴이 너무 가까이에 있을 것 같아서 나는 정우진에게 받은 옷만 보면서 말했다.

“꽃무늬네.”

“꽃이랑 나비도 있어요.”

일명 몸빼 바지라고 불리는 헐렁헐렁한 바지 두 개를 보며 잠시 당황했다. 하나는 짙은 남색 바탕에 붉은색 꽃과 초록색 이파리들이 빼곡하게 박혀 있었고, 다른 하나는 밝은 보라색 바탕에 분홍색 꽃과 노란색 꽃들이 만발해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 뭘 입어도 이상할 것 같았지만 조금이라도 어두운 색이 그나마 나을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보라색 바지를 정우진에게 건넸다.

“내가 이거 입을 테니까 네가 이거 입어.”

정우진은 내가 건네주는 바지를 군말 없이 받고 하얀색 티셔츠를 내게 줬다. 티셔츠는 둘 다 아무런 무늬도, 모양도 없는 흰색 무지 티였다.

카메라 각도상 허리 밑으로는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바지를 갈아입는 건 괜찮을 것 같은데, 티셔츠를 갈아입을 땐 어쩔 수 없이 상체가 조금 노출될 것 같았다. 그 정도는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알아서 편집해 줄 테니 상관없을 듯해서 티셔츠부터 입으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갑자기 내게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쳐다봤다. 한 발자국씩 뒤로 물러서다 보니 결국 구석까지 몰린 나는 더 이상 정우진이 다가오지 못하게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뭐야?”

“여기서 갈아입으세요. 여기서는 안 찍힐 것 같아요. 아니면 카메라 뗄까요?”

“카메라를 뗀다고? 그럼 안 되지 않아? 찍혀도 뭐……. 편집해 주시겠지.”

그렇게 말했지만 정우진은 자기가 입을 옷을 마치 커튼처럼 펼치더니 내 상체를 가려 주었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정우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제가 가려 드릴게요.”

“어차피 여기서는 안 보이지 않아? 괜찮으니까 그냥…….”

내 앞을 가리고 있는 옷자락을 잡아 내리면서 말하다가 멈칫했다. 옷이 찢어질 것처럼 팽팽해졌는데도 움직이질 않았다. 당황한 눈으로 정우진을 보자 고개를 돌리고 있다가 힐끗 나를 쳐다봤다.

잠시 시선을 맞춘 채 가만히 있다가 비키라는 의미로 어깨를 다시 밀었지만 돌덩어리처럼 꼼짝도 하질 않았다. 계속 비키라고 하는 것도 왠지 모양새가 이상할 것 같아서, 결국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한 꺼풀씩 옷을 벗었다.

도착하자마자 정우진에게 받았던 겉옷을 천천히 벗고 있는데, 정우진은 여전히 계속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였다. 얼마나 필사적인지 목에 핏대까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걸 보니 정말 기분이 너무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차라리 빨리 옷을 갈아입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급하게 후드티를 위로 쑥 벗었다. 그냥 맨몸에 입었던 거라 바로 이제 이대로 티셔츠를 입기만 하면 됐다. 근데 무지 티셔츠라 그런지 앞뒤 구분을 하기가 어려웠다.

티셔츠를 잡아 쫙 펼쳐서 이리저리 만지며 입을 방향을 확인하고 있는데, 문득 정우진의 손이 아주 작게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그걸 보자 발밑으로 피가 빠지는 느낌이 났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일부러 정우진의 얼굴은 보지 않은 채 다급하게 티셔츠를 머리에 쑤셔 넣었다.

아니, 씨발……. 남 옷 갈아입는 걸 빤히 쳐다보는 것도 이상하지만, 저렇게 부들부들 떨면서 목에 핏대가 설 만큼 옆으로 고갤 돌리고 있는 것도 좀 이상한 거 아닌가? 내가 여자도 아니고 우리 둘 다 어차피 남잔데…….

이럴 거면 가려 주겠다는 소리를 왜 했지? 그냥 각자 알아서 구석 보고 빨리 갈아입는 게 낫지 않나? 도대체 이게 뭐냐고…….

찝찝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어 뚱한 표정으로 티셔츠와 바지를 다 갈아입자 고개를 돌리고 있던 정우진이 어떻게 알고 그제야 펼치고 있던 옷을 천천히 내렸다. 말도 안 했는데 딱 맞게 내린 걸 보면 옆으로도 다 보였다는 건데, 굳이 저렇게 고개를 돌리고 있을 필요가 있었나?

황당한 얼굴로 정우진을 빤히 보다가 나도 혹시 옷으로 가려 줘야 하는 건지 의문이 생겼다. 근데 난 이미 옷을 입어서 가려 줄 만한 게 딱히 없는데……. 좀 전에 벗어 놓은 겉옷으로라도 가려 주려고 하는데 정우진이 갑자기 아무런 말도 없이 티셔츠 밑단을 잡고 팔을 올리면서 옷을 벗었다.

“……!”

예고도 없이 코앞에 보이는 맨살에 화들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려 했지만, 등 뒤는 벽이라 물러설 곳이 없었다. 빠른 동작으로 티셔츠를 머리에 끼우는 정우진을 보며 너무 당황해서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목욕 용품을 올려 둔 선반을 치는 바람에 우당탕 소리가 났다.

“아.”

바닥에 굴러 떨어지는 통들을 보면서 반사적으로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아 주우려는 순간, 정우진이 바지를 내렸다.

이 사태는 모두 아주 짧은 시간 동안,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러면 안 됐는데, 나는 당황한 나머지……. 그러니까 사람이 놀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움찔 몸을 떠는 것처럼,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어 버렸다.

“…….”

“…….”

바지를 무릎 정도까지 내린 어정쩡한 자세의 정우진과 눈이 마주치자 뭐에 홀린 것처럼 나는 모든 동작을 멈춰 버렸다. 옷을 갈아입으려면 당연히 바지를 벗어야 하는 거고, 사람이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처음 본 것도 아닌데 굳이 이렇게까지 당황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코앞에서 벗은 몸을 보면 당황하는 건 당연했지만 내가 여자도 아니고, 실제로 숙소에서도 유노을이 씻고 나와서 알몸으로 돌아다닐 때가 많아서 이게 그렇게까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어쨌든 정우진은 속옷은 입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내가 이렇게 잘 쉬던 숨까지 멈출 정도로 놀란 이유가 있었다.

보고야 만 것이다…….

아주 짧은 그 찰나의 순간에 팔과 옷자락 틈 사이, 아주 작은 공간으로…….

“하…….”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한숨을 내쉬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그대로 고개를 숙여 버렸다.

씨발…….

씨발…….

씨발…….

마음 같아서는 악, 하고 고함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지금이 촬영 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선배님, 괜찮으세요? 혹시 어디 부딪치셨어요?”

“…….”

내가 뭘 본 건지, 자기가 나한테 뭘 보여 준 건지 정우진은 당연히 모를 터였다. 그냥 정말 우연히 내가 앞을 보고 있는데 그게 있어서 봤을 뿐이지, 일부러 보려고 본 게 아니었다.

무슨 씨발, 다리 사이가 한 바가지…….

“아악!”

다시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모습에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러 버렸다.

“선배님, 왜 그러세요?”

“아, 아니……. 이거 떨어뜨려서.”

정신력에 크게 크리티컬 대미지를 입은 나는 아무 말이나 지껄이면서 주섬주섬 샴푸 통을 주웠다.

정우진이 그나마 드로어즈를 입고 있었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씨발……. 내 눈…….

속으로 우는소리를 내면서 눈을 벅벅 비비자 정우진이 내 손목을 잡았다.

“눈에 뭐 들어갔어요? 아까부터 왜 그러세요?”

“어, 눈에 뭐 들어갔나 봐.”

“어디 봐요.”

“아니야, 이제 괜찮아. 다 입었으면 나가자.”

옷을 챙겨 욕실 밖으로 나오자 그나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가방 안에 대충 옷을 구겨 넣다가 문득 의문이 생겼다.

우리 도대체 옷을 왜 같이 갈아입은 걸까? 그냥 한 명씩 갈아입어도 되는 거 아니었나?

“…….”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미 시간은 지나갔고, 우리는 같이 옷을 갈아입었고, 나는 봐 버렸는데…….

“손수건 다시 해 드릴게요. 옷 갈아입다가 좀 풀렸나 봐요.”

인생무상…….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있는 내 뒤로 와 정우진이 목에 묶어 둔 손수건을 풀어 다시 만져 주고 있었다. 나는 목 뒤에서 느껴지는 손길에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인생사 새옹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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