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6/190)

81화

군것질도 하고 이런저런 실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달리다 보니 시간은 금방 갔다. 고속도로를 벗어나니 풍경은 금세 바뀌었고, 우리는 점점 산속으로 들어갔다.

“완전 시골이네. 이 근처인가?”

“아직 좀 더 가긴 해야 하는데…….”

정우진이 내비게이션을 힐끔거리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이 동네 어디이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내비게이션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시골 동네를 벗어나 우리는 도로조차 포장되어 있지 않은, 그야말로 진짜 산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차가 덜컹덜컹해서 의자 등받이에 몸을 바짝 붙이고 불안한 얼굴로 앞을 보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전기는 있겠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 말이었는데, 정우진은 마냥 신나기만 한 건지 웃으며 말했다.

“전기 없어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전기가 없어도 재미있겠다고?”

“네, 불 피우면 되잖아요.”

참 긍정적이구나…….

근데 또 정우진 말대로 불을 피우면 문제가 될 건 없을 것 같아서 나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전기 없으면 장작 패서 음식 해야 하나? 그럼 장작은 제가 팰게요.”

“네가? 장작을?”

내 말투가 좀 이상하다고 느꼈는지 정우진이 나를 보며 황당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왜요? 저 못 할 것 같아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래도 널 어떻게 시켜? 장작은 내가 팰게. 너 그거 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온 지구가 떠들썩해질 거 아니야.”

“선배님이 다치시면 제 가슴이 떠들썩해져서 차라리 제가 다치는 게 나아요.”

“…….”

예고도 없이 치고 들어오는 멘트에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이것도 계속 듣다 보니까 좀 적응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멀뚱멀뚱 정우진을 보다가 카메라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여러분, 얘 말투가 이래요. 우리 모두 적응해야 됩니다…….”

“제 말투가 왜요?”

“아니, 말투가 예쁘다고.”

“선배님 말투도 예뻐요.”

“어, 고마워.”

나는 카메라를 보면서 웃음을 참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다시 포장도로가 나왔다. 다행히 정말 산골짜기 한복판은 아닌 듯싶었다. 혹시 길을 잘못 들었던 걸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조금 더 가니 여러 대의 자동차와 촬영 장비들, 그리고 스태프와 송철 피디가 보였다.

지정된 곳에 주차를 하고 대충 짐을 챙겨 차에서 내리자, 카메라 여러 대가 우리를 찍고 있었다. 완전히 풀어져서 늘어져 있다가 카메라를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오는데 별일 없으셨죠?”

차에서 내려 송철 피디와 여러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우리가 2박 3일 동안 지내게 될 통나무 집 앞에 섰다.

“프로그램 제목이 오두막집이라고 해서 엄청 허름할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니네요.”

산속이라 그런지 좀 쌀쌀해서 팔뚝을 문지르며 말하자, 캐리어를 끌고 내 옆으로 온 정우진이 물었다.

“선배님, 추우세요?”

“추운 건 아닌데 그냥 좀…….”

쌀쌀하다고 하려는데 정우진이 갑자기 흙바닥에 캐리어를 눕히더니 지퍼를 열기 시작했다. 주춤하고 옆에서 그걸 보다가 활짝 열리는 캐리어를 보며 나는 놀라서 물었다.

“뭐 해?”

“걸칠 것 좀 꺼내려고요. 아니면 담요 드릴까요? 아, 손수건도 꺼내야겠다.”

“아니…….”

카메라 여러 대가 정우진의 모습을 여러 각도에서 찍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하다가 나는 웃음이 터져 버렸다.

“우진 씨, 지금 바닥에서 뭐 하시는 거예요?”

송철 피디가 우리에게 다가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아, 선배님이 춥다고 하셔서 걸칠 것 좀 꺼내고 있었어요.”

“저희가 입으실 옷은 다 준비해 놨는데……. 근데 그걸 그렇게 바닥에서…….”

당황한 건 송철 피디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그러다가 웃고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피디도 웃기 시작했다.

“선배님, 이거 입으세요.”

“어, 고마워……. 근데 걸칠 거 달라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아무튼 잘 입을게.”

정우진은 다시 캐리어를 주섬주섬 챙기고, 나는 정우진이 준 옷을 받아 어깨에 걸쳤다. 대충 주변이 다 정리되자 송철 피디가 우리에게 물었다.

“오시다가 휴게소 들르셨다면서요?”

“네, 간단하게 뭐 좀 먹으려고…….”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돈가스랑 우동이랑 라면이랑 볶음밥이랑 해장국이랑 아이스크림도 먹고 맛밤도 먹었어요.”

“사진도 찍지 않으셨어요? 인터넷에 다 떴던데.”

송철 피디의 말에 나는 좀 놀라서 정우진을 쳐다봤다. 사진 찍을 때 사람들이 많이 몰린다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때 찍힌 듯했다.

“처음에는 주변에 사람이 없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좀 많이들 계시더라고요. 어떡해요? 혹시 저희 촬영하는 거 비밀이에요?”

“아니요, 괜찮아요. 어차피 이미 기사 다 나갔어요.”

“아, 다행이다. 그럼 사진 찍은 거 이별에 올려도 되죠? 우진이 찍은 거 보실래요? 엄청 웃기게 나왔는데.”

내가 웃으면서 핸드폰을 꺼내자 송철 피디가 어디 한번 보자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정우진이 모델처럼 온갖 포즈로 찍은 사진을 보여 주며 말했다.

“이거 손 올리고 있는 건 컨셉이 약간……. 흑염룡이 봉인된 그런 느낌이에요.”

“와, 사진 엄청 잘 찍으셨네. 이 선글라스 어디 거냐고 궁금해하시는 분들 많으시데요.”

“네? 선글라스요? 이거 그냥 휴게소에서 만 원 주고 산 건데…….”

내 말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선글라스를 내 얼굴에 끼워 줬다. 나는 선글라스를 낀 얼굴로 송철 피디를 바라봤다.

“그 선글라스예요?”

“네, 모자랑 같이 샀어요. 저도 우진이랑 같이 샀는데 저는 안 가지고 왔어요.”

정우진이 내 머리에 모자까지 씌워 줬다.

“아, 혹시 저번에 알감자 먹여 주는 사진 찍을 때 같이 찍혔던 그?”

“네네, 맞아요.”

“휴게소에서 알감자는 사 드셨어요? 엄청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아니요, 문을 안 열어서……. 대신 맛밤 먹었어요.”

아쉽다는 표정으로 대답하고 있는데, 아까부터 정우진이 자꾸 혼자 사부작거리고 있었다. 송철 피디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내 뒤로 시선을 주며 물었다.

“근데 우진 씨는 아까부터 뭘 그렇게 열심히 하고 계세요?”

“아, 선배님이 목 아프다고 하셔서요.”

그 말에 나는 손을 들어 목 부근을 더듬더듬 만졌다. 그리고 최대한 고개를 숙여 손에 잡히는 걸 당겨 보자 붉은색 손수건이 보였다.

“혹시 서주 씨 매니저로 오신 건가요?”

“네, 거의 그렇다고 보면 돼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뻔뻔하게 대답하는 정우진을 보며 송철 피디도, 스태프들도 웃음이 터졌다.

“야, 이건 좀…….”

설마 목에 손수건을 묶어 놓은 건가 싶어 당황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자 정우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잘 어울려요.”

정우진의 말에 웃고 있던 송철 피디도 거들었다.

“네, 엄청 잘 어울려요.”

“거보세요.”

“…….”

목에 뭐가 걸리적거리는 걸 싫어해서 목 티도 안 입고, 목 뒤에 태그도 다 잘라 버리는데 이걸 계속 하고 있으려니 불편했다. 그래도 기껏 해 줬는데 바로 풀어 버리기도 좀 그래서 그냥 일단 이대로 있기로 했다.

“그럼 우선 두 분 들어가셔서 옷부터 편한 걸로 갈아입으시죠.”

그 말에 화색을 띠자 송철 피디가 나를 보며 말했다.

“손수건은 빼고요.”

옷을 갈아입으면서 자연스럽게 손수건도 빼려고 했는데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

우리는 짐을 가지고 아담해 보이는 통나무집 안으로 들어갔다. 송철 피디가 우리 뒤를 따라오며 자연스럽게 집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여기 집주인 분께서 귀농한 부부이신데 뒤에 텃밭도 키우시거든요. 거기서 필요한 만큼 가지고 오셔서 요리해 드시면 돼요. 안에 주방이 작게 있긴 한데, 야외에서 하시는 게 편할 거예요.”

그런 말을 들으며 안으로 들어오자 은은한 편백 향과 함께 아담한 거실이 보였다.

“여기가 거실이고 저쪽이 안방인데, 말씀드렸다시피 집주인 분들이 부부시라 침대가 하나밖에 없어요. 뭐, 두 분이 같이 주무시든가……. 아니면 가위바위보 같은 거 해서 한 분은 바닥에서 주무시든가 그렇게 하세요.”

게임 같은 걸 해서 정하면 되겠다고 혼자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정우진이 내게 귓속말로 작게 물었다.

“안쪽이 좋아요, 바깥쪽이 좋아요?”

“뭐?”

“저는 아무 데나 다 좋아요.”

얘는 도대체 아까부터 왜 자꾸 귓속말을 하는 거지? 귀를 가리고 잠시 당황하고 있는 사이 송철 피디가 이번에는 우리를 욕실로 데리고 갔다.

“여기 욕조랑 사우나도 있으니까 사용하셔도 돼요.”

욕실은 거실보다 컸는데 안에 커다란 욕조와 간이 사우나까지 있었다. 욕조는 그렇다 쳐도 사우나까지 있는 게 신기해서 눈을 크게 뜨자, 송철 피디가 우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일단 두 분 옷부터 갈아입고 나오세요.”

“네.”

“네.”

송철 피디와 카메라맨까지 나가자 순식간에 집 안에는 우리만 남게 되었다. 나는 가장 먼저 집 안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의 위치를 확인했다. 거실이나 방은 그렇다 쳐도 욕실까지 카메라가 붙어 있었다.

“야, 카메라가 욕실에도 있어.”

카메라 앞을 얼쩡얼쩡하면서 말하자 정우진이 내 뒤에 바짝 붙어 어깨에 턱을 올리며 말했다.

“씻을 땐 어떡해요?”

“……수건 같은 걸로 가려야 되나?”

갑자기 왜 이렇게 달라붙는 건지 모르겠지만 촬영 중이라 별말도 못 하고 그냥 한 박자 늦게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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