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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85/190)

80화

정우진은 잠시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해서 먼저 차에 타 기다리기로 했다.

문을 닫고 조용한 차 안에 혼자 있으니 긴장이 풀리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섹시한 표정이니 뭐니 하며 민망한 걸 시켜서 안 그래도 당황했는데, 갑자기 몰린 인파에 순간적으로 거의 반쯤 정신을 놓은 것 같았다.

별로 대단한 걸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사진 몇 장 찍은 건데, 이렇게 기가 빨릴 줄은 몰랐다. 아무래도 카메라 앞에 서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그 영향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우진이 갑자기 긴장한 티를 너무 내서 나 역시 덩달아 더 긴장했고…….

멍하게 앉아서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나는 조금 전 정우진이 내 허리에 손을 얹을 때 지나치게 떨고 있던 걸 떠올렸다. 혼자 그 생각을 하고 있으니 별안간 웃음이 나왔다.

진짜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입술을 꾹 깨물고 실실 웃고 있는데, 운전석 쪽에 문이 열리면서 정우진이 들어왔다.

“선배님, 이거 드세요.”

“뭐야, 이게?”

“아이스크림이랑 맛밤이요. 편의점에서 사 왔어요. 아까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리고 맛밤은 알감자 없어서 대신 사 온 거예요.”

봉지 안을 확인하다가 문득 정우진의 머리카락이 젖어 있는 걸 발견했다. 저게 땀일 리는 없고……. 나는 가만히 정우진을 살피다가 물었다.

“세수했어?”

“네? 아, 네. 잠깐 좀 더워서…….”

말꼬리를 흐리면서 얼버무리는 말투에 나는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아 한숨을 내쉬듯 웃었다.

“아까 엄청 당황했지?”

나도 당황했다고 말하려는데 정우진이 화들짝 놀라면서 나를 쳐다봤다. 두 발로 걸어 다니는 악어라도 본 것 같은 과한 표정이라 나도 모르게 움찔 놀랐다.

“왜? 당황한 거 아니었어? 우리 사진 찍고 있는데 갑자기 사람들 엄청 몰려서……. 난 너 찍고 있어서 몰랐거든.”

“아……. 네, 갑자기…….”

“……? 아무튼 난 방송 너무 오랜만이라 순간적으로 진짜 당황했어. 네가 모자랑 선글라스 씌워 주기 전에 완전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변해서……. 나 그때 혼자, 사진 그냥 화장실 가서 찍자고 할까? 그런 생각까지 했다니까.”

내가 웃으면서 말하자 정우진이 주섬주섬 안전벨트를 하면서 말했다.

“저는 화장실 가서 찍는 거 좋아요.”

아직도 긴장이 덜 풀렸는지 정우진이 이상한 소리를 했다. 자연스럽게 무시하려다가 좀 전에 모자랑 선글라스 씌워 준 게 고마워서 입을 열었다.

“그럼 다음 휴게소에서는 화장실에서 찍든가.”

“정말요?”

“어어.”

대충 대꾸하면서 나도 안전벨트를 매고 봉지 안을 살폈다. 포도 맛 폴라포와 스크류바, 호두마루 그리고 맛밤 두 봉지가 있었다.

“넌 무슨 아이스크림 먹을 거야? 이거 먹고 출발할까?”

“네, 저는 아무거나 다 괜찮아요.”

포도 맛 폴라포는 분명 나 먹으라고 사 온 걸 테고, 스크류바도 전에 가끔 먹는다고 어디서 말했던 기억이 났다. 조금 고민하다가 나는 한 번도 언급한 적 없는 호두마루를 정우진에게 건네며 말했다.

“그럼 넌 이거 먹어.”

아이스크림을 받는 정우진의 표정을 유심히 살피니 아주 잠시 밝아지는 게 보였다. 그걸 보면서 속으로 혀를 차다가 아이스크림 껍질을 뜯었다. 별로 크지도 않아서 세 번 정도 베어 먹으니 나무 막대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아이스크림 하나를 다 먹는 동안, 이제 두 입째 먹고 있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하는 수 없이 폴라포도 내가 먹었다. 아이스크림이라 두었다 나중에 먹을 수도 없고, 정우진이 먹는 속도를 보니 이미 배가 부른 것 같아서였다.

“선배님, 피곤하면 주무셔도 돼요.”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이제 출발하려고 할 때 정우진이 말했다. 먹고 나니 슬슬 졸린 것도 사실이었지만 피곤한 건 정우진도 마찬가지였다. 얘는 김밥 싸느라 밤까지 새웠다고 했는데,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옆에서 쿨쿨 잘 수는 없지 않은가.

“괜찮아. 근데 맛밤은 왜 샀다고?”

“알감자 대신이요.”

알감자랑 맛밤이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 먹어 보니 맛있어서 됐다 싶었다. 이제 또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잠시 생각하고 있는데, 내 고민이 무색하게 정우진은 쉬지도 않고 떠들었다.

“가서 벌레 많을 수도 있으니까 바르는 약도 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이제 아침저녁으로 쌀쌀해서 걸칠 것도 가지고 왔는데, 혹시 몰라서 선배님 것도 챙겨 왔어요.”

“그치, 이제 아침에 일어나면 춥더라. 해 져도 쌀쌀하고.”

처음에는 나도 정우진의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대답했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말에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가서 음식 해야 하는 것도 걱정이에요. 집에서 연습 많이 했는데 만약 실패하거나 그러면 그땐 아무것도 못 먹는 거예요? 선배님 굶으시면 안 되는데 너무 걱정이에요. 만약 요리에 실패하면 저수지 있다고 했으니까 제가 물고기 잡아서 구워 드릴게요. 쪄서 먹어도 맛있대요. 근데 선배님은 물고기 넣고 끓인 탕이나 국 같은 건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예전에 라디오에서 들은 것 같은데…….”

“…….”

이제 대답도 잘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면서 앞을 보다가 정우진을 바라봤다.

말도 많이 하면 엄청 피곤한데, 안 그래도 밤새우고 와서 그게 좀 걱정이기는 했다. 혹시 분량 때문에 걱정이 돼서 계속 말하는 건가? 그래도 일단 지금은 목적지에 도착해서 또 촬영해야 하니까 체력을 좀 비축해 두는 게 나을 듯한데.

내 시선을 느낀 건지 정우진이 힐끗 나를 쳐다봤다.

“왜요? 혹시 배고프세요?”

도대체 저놈은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돼지인 줄 아나?

순간 울컥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너 목 안 아파?”

“목이요? 왜요? 선배님 혹시 목 아프세요?”

“아니, 그게 아니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우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목 아프면 따뜻한 물 마셔야 하는데……. 가다가 마트나 카페 보이면 주차하고 잠깐 사야겠어요. 아니면 보온병에 담아 온 국이라도 좀 드세요. 저 손수건도 가지고 왔거든요. 나중에 도착하면 그거 목에 해 드릴게요. 계속 아프면 약국에서 약 사거나 병원…….”

“내가 아파서 물어본 게 아니라 너 괜찮냐고.”

어지간하면 다 말하고 물어보려 했는데, 그냥 뒀다가는 끝이 안 날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말을 끊고 물었다. 그러자 정우진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조금 시무룩하게 물었다.

“저 말이 너무 많아요?”

“……아니…….”

“말을 좀 줄일까요? 저는 선배님 심심하실까 봐…….”

“아니, 말을 많이 해서 물어본 거긴 한데, 듣기 싫다거나 그래서 그런 게 아니라 너 피곤할까 봐 물어본 거지. 밤에 잠도 잘 못 잤다며? 근데 운전도 너만 하고 그래서 체력은 괜찮은가 싶어서…….”

갑자기 또 저렇게 말하니까 미안하기도 하고 정말 그런 뜻이 아니었기에 다급하게 말하자 정우진이 물었다.

“그럼 계속 말해도 돼요?”

“당연히 되지. 너 피곤할까 봐 물어본 거였다니까? 밤도 새우고 왔다며.”

“제가 졸음운전 할까 봐 걱정되세요? 혹시 사고 날까 봐? 정신 바짝 차릴게요.”

“…….”

그런 뜻이 아닌데 자꾸 이상한 헛소리를 해 대는 정우진을 가만히 보다가, 또 실실 웃고 있는 걸 보니 일부러 저러는 게 분명했다.

“하.”

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웃자 정우진이 옆에서 또 웃었다.

처음에 떡볶이 사 달라고 왔을 땐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고 말도 똑바로 못 하더니 이제는 내가 많이 편해지긴 했나 보다. 황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쭈뼛거리는 것보다는 이게 훨씬 나아서 별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너 오늘 왜 이렇게 초딩 같냐?”

“제가요? 왜요? 귀여워서요?”

“…….”

내가 정색을 하고 빤히 쳐다보자 정우진이 힐끗 나를 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말을 말자.”

“선배님, 근데 제가 혼자 운전하는 거 걱정되시면 나중에 면허 따세요. 제가 도와 드릴게요.”

그 말에 별생각 없이 그래야겠다고 하려다가 멈칫했다. 괜히 잘못 대답했다가 또 정우진이 차를 사 준다느니, 자기를 기사처럼 쓰라느니 그런 말을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대답을 망설이다가 사이드포켓을 열어 안에 넣어 뒀던 군것질거리를 뒤적거렸다. 아침에 정우진이 생각나 챙겼던 포도 맛 젤리를 뜯으면서 말을 돌렸다.

“너 젤리도 좋아해? 새콤달콤은 맛있다며.”

“뭐예요?”

“마이구미. 먹을래?”

“네, 주세요.”

정우진은 먹여 달라는 듯 앞을 보면서 슬쩍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고 입을 벌렸다. 하지만 젤리 크기가 너무 작아서 이걸 먹여 주는 것도 좀 이상했다. 나는 뜯은 봉지를 들고 고민하다가 정우진의 한쪽 손을 가지고 와 손바닥에 젤리를 쏟아부었다.

“입에 털어 넣어.”

“털어 넣으라니요? 알약도 아니고…….”

“너무 작아서 하나씩 먹기는 좀 그래.”

“너무 많아요.”

그 말에 나는 손바닥 위의 젤리를 하나만 남기고 가지고 와 내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럼 하나만 먹어.”

정우진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못 본 척하고 계속 앞만 바라봤다. 그러자 한참 그 상태로 가만히 있던 정우진이 입을 열었다.

“안 먹을래요.”

“어, 먹지 마.”

나는 손바닥 위에 남아 있는 젤리 하나를 가지고 와 또 내 입에 넣었다. 다시 한참을 가만히 있던 정우진이 손을 자기 얼굴 쪽으로 가지고 가 손바닥을 코와 입 가까이에 대더니 크게 숨을 들이켰다.

“뭐 해?”

요상한 행동에 미간을 구기며 묻자 정우진이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못 먹는데 냄새라도 맡으려고요.”

“누가 먹지 말래?”

“네.”

짧은 대답에 황당한 얼굴로 정우진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혀를 찼다.

“어휴, 저 초딩…….”

“선배님은 유치원생 같아요.”

“어, 넌 갓난아기야.”

별 생각 없이 대꾸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초딩 때문에 말려서 나까지 유치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다시 혀를 차면서 고개를 완전히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자 작게 꿍얼꿍얼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아까는 피곤하지 않냐고, 목 안 아프냐고 그런 거 물어보더니……. 젤리 그까짓 게 뭐라고 사람을 이렇게 면박을 주고…….”

“야, 내가 언제 또 면박을 줬냐? 네가 안 먹는다고 해서 그럼 먹지 말라고 했지.”

“밤새워서 도시락 싸고 하루 종일 운전해도 젤리 하나 못 얻어먹고…….”

자꾸 신세 한탄을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나는 결국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야, 입 벌려.”

내 말에 정우진이 얼른 고개를 돌려 입을 벌렸다. 나는 완전히 정우진 쪽으로 몸을 돌리고 문에 등을 붙인 다음, 젤리를 대충 입 쪽으로 던졌다. 그리고 검보라색 젤리는 입 안으로 정확히 골인했다.

“……?”

“……?”

저게 설마 들어갈 줄은 몰랐던 터라 나도 놀랐고, 갑자기 입 안으로 뭐가 들어오자 정우진도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우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잠시 보다가 웃음이 터졌다.

“이게 들어가네?”

“저도 던져 보고 싶어요.”

“야, 너 앞에 봐.”

“저도 한 번만 던져 보면 안 돼요?”

초딩의 간절한 말에 이대로 가다가는 사고 날 것 같아서 결국 갓길에 차를 세우고 입을 벌려 줬다.

“좀 더 크게 벌려 주시면 안 돼요?”

“커게 버려서!”

“너무 작아서 안 들어갈 것 같아요.”

“야, 이씨! 그냥 던져!”

내가 버럭 고함을 지르고 다시 입을 벌리자 정우진이 진지한 표정으로 젤리 하나를 던졌다.

“악!”

딱 소리가 나면서 젤리가 정확하게 내 왼쪽 눈을 강타했다. 손으로 눈을 가리며 고개를 푹 숙이자 정우진이 웃으면서 양손으로 내 얼굴을 잡았다.

“괜찮으세요? 어디 봐 봐요. 얼굴 좀 들어 보세요.”

그 말에 고개를 들자 정우진이 갑자기 내 눈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후후 바람을 불기 시작했다. 황당해서 나는 정우진의 손을 뿌리치고 어깨를 밀어내며 말했다.

“바람을 왜 불어?”

“선배님, 입이 왜 그렇게 작으세요?”

“넌 커서 좋겠다, 이 새끼야.”

“네, 좋아요.”

헤헤 웃는 정우진에게 들고 있던 젤리 봉지를 통째로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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