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한참 말도 없이 그냥 웃고 있기만 하는데 정우진이 뜬금없이 말했다.
“선배님이 저한테 샴푸 주셨을 때 엄청 좋았어요.”
“갑자기 샴푸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몰라 되묻다가 멈칫했다. 샴푸라면 설마 내가 줬던 그걸 말하는 건가? 나는 순간 당황해서 정우진을 보며 말했다.
“야, 너는 무슨 그런 거까지 다 말을 하고 난리야. 그거 별로 비싼 것도 아닌데.”
“말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근데 가격을 떠나서 제가 달라고 엄청 떼쓰니까 선배님이 숙소에서 바로 가지고 나와서 저한테 주신 거잖아요. 그래서 너무 좋았어요.”
“떼를 쓰긴 무슨 네가 떼를 써. 그냥 냄새 좋다고 해서 준 거지.”
어쩌다가 샴푸를 주게 된 건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냥 정말 별거 아닌 일이었고, 정우진이 떼를 써서 준 것도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날 같이 차에서 토스트 먹고……. 아, 맞다. 영화 본 것도 엄청 재미있었는데. 그거 다시 보러 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또 보셨어요?”
“아니, 못 갔지.”
“그때 팝콘이랑 오다리도 먹고 알감자도 진짜 맛있었는데……. 또 토스트 살 때 선배님이…….”
정우진이 그날 있었던 모든 일들을 주절주절 떠들기 시작했다. 그걸 듣고 있는 나는 점점 불안해졌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니 말해도 상관이 없기는 하지만 그냥 왠지……. 너무 개인적인 거라서 그런가?
가만히 정우진이 하는 말을 듣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야, 너 진짜……. 기억력 엄청 좋다.”
“선배님이랑 같이 간 건데 당연히 다 기억하고 있죠.”
“…….”
예고도 없이 들리는 느끼한 말에 또 소름이 돋아 버렸다. 내가 움찔하고 어깨를 떨면서 슬금슬금 차 문 쪽으로 몸을 붙이자 정우진이 또 손을 뻗어 내 팔뚝을 잡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왜요? 이 말은 하지 말까요? 비밀로 할까요? 저희 혹시 비밀리에 만나는 거였어요? 근데 이미 사진 다 찍혔잖아요.”
“비밀은 뭔 비밀이야, 그게 아니라……. 아, 진짜.”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뒷목을 벅벅 긁자 정우진이 웃었다.
“알았어요, 그럼 이 말은 안 할게요. 아무튼 샴푸 주셔서 너무 좋았어요. 그거 냄새 엄청 좋았거든요.”
하지만 또다시 나오는 샴푸 얘기에 나는 아예 쥐구멍으로 숨고만 싶어졌다. 특히 샴푸 냄새 어쩌고 하면서 정우진이 무슨 말을 할지 알 수가 없다는 게 가장 불안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불안은 현실이 되고야 말았다.
“연습실에 있다가 숙소에서 씻고 바로 나오셨을 때 있잖아요. 그날 제 차에 선배님이 타셨을 때 진짜 너무 좋은 거예요.”
“냄새가?”
“네.”
주어를 빠트리니 뭔가 이상한 것 같아서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도대체 남자 둘이서 샴푸 냄새 얘기를 왜 자꾸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이상해 보이지 않게 수습하려고 주절주절 떠들었다.
“근데 그거 진짜 싼 거야. 엄청 흔한 거고……. 마트에서 세일할 때 원 플러스 원으로 산 거라 이름이 뭔지도 잘 몰라. 냄새가 그렇게 오래가는 것 같지도 않고……. 씻고 나와서 좀 있으면 금방 없어지던데?”
향수라든가 그런 건 잘 모르지만 딱히 특출하게 좋은 냄새도 아닌 것 같고 엄청 흔한 냄새인데, 도대체 왜 그렇게 그걸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엄청 비싼 고급 샴푸만 써서 오히려 싼 샴푸의 흔한 냄새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가?
뭔가 그럴듯한 가설에 혼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정우진이 갑자기 뭔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휙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아, 어쩐지 안 그래도 차 안에서는 엄청 좋았는데 집에 가지고 가서 써 보니까 그 냄새가 안 나서 의아했거든요. 그럼 선배님한테 났던 냄새는 무슨 냄새였지? 살 냄새 같은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혼잣말처럼 하는 말에 나는 사색이 되고야 말았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이제 더 이상 수습할 수도 없을 것 같아 카메라를 보며 이실직고했다.
“여러분……. 정우진의 말투가 원래 이래요……. 얘가 신비주의 같은 거 때문에 방송에서 말을 잘 안 하잖아요. 근데 알고 보면 이렇게 섬세하고 세심하고 감수성이 뛰어난 아이랍니다…….”
“이게 감수성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 내며 말하고 있는데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정우진이 눈치 없이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머리라도 한 대 쥐어박고 싶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입을 열었다.
“그만큼……. 네가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아주 사소한 것에도 관심이 많다는 거지. 예를 들면 비 오는 날에 비 냄새라든가, 뭐 그런 것처럼…….”
“비 냄새는 모르겠고 선배님한테 좋은 냄새 나는 건 알아요. 지금도 엄청 좋아요.”
“…….”
이쯤 되니 이 새끼가 일부러 이러나 싶어 차게 식은 눈으로 정우진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표정이 누가 봐도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았다. 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던 정우진이 입술을 꽉 깨물고 힐끗 시선을 돌려 나를 봤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풉 하고 웃어 버렸다.
“…….”
얼마나 웃는 건지 차가 휘청거리기까지 했다. 놀라서 의자 뒤로 바짝 몸을 붙이자 정우진이 갑자기 갓길에 차를 세우더니 다시 웃기 시작했다. 아예 핸들 위로 엎어져서 어깨까지 들썩거리는 걸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야, 너 일부러 그런 거지?”
정색을 하고 묻자 소리 내서 웃던 정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니 갑자기 머리 꼭대기까지 열이 뻗쳐서 나는 엎어져 있는 정우진의 등을 퍽퍽 때렸다.
“너 씨발, 내가 그따위로 말하지 말라고 했지!”
“앗, 아파요.”
심한 욕을 한 것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흥분한 나는 정우진이 날 놀렸다는 생각에 쉽게 진정할 수가 없었다.
“아니, 앗. 선배님이 자꾸 막 엄청 당황하고……. 막 움찔움찔하는 게 웃겨서……. 아, 잘못했어요.”
정우진이 주먹을 쥔 양손을 가슴 쪽에 모으고 어깨를 잔뜩 웅크리며 불쌍한 척을 했다. 말하는 게 열 받아서 더 때리고 싶었지만 뒤늦게 카메라가 보여 한숨을 내쉬며 화를 다스렸다.
“이 새끼는 툭하면 놀리고…….”
“지금 촬영 중이에요.”
“촬영만 아니면 진짜……. 하.”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대신 저도 다음에 보증 서 드릴게요.”
그 말에 또 열불이 나서 뭐라고 하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정우진이 재수 없게 웃는 얼굴로 전화를 받으며 검지로 자기 입을 가리고 말했다.
“네, 여보세요. 아, 별일 아니에요. 다시 출발할게요. 네, 네. 아, 그리고 저희 다음에 나오는 휴게소에 잠시 들를게요. 네.”
갑자기 차를 세워서 스태프에게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전화를 받는 동안에도 계속 나를 주시하며 처웃는 얼굴에 나는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 수밖에 없었다. 실수인 척하고 딱 한 대 더 때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전화를 끊은 정우진이 말했다.
“아, 이건 진짜 편집해야겠다.”
“…….”
“선배님 방금 표정이 너무, 악!”
편집해야겠다는 말에 나는 고민도 없이 정우진의 어깨를 한 대 더 때렸다. 별로 세게 때린 것도 아닌데, 비명 지르는 걸 보며 나는 어차피 편집될 거 이를 악물고 말했다.
“너 한 번만 더 살 냄……. 그딴 소리 하면 진짜 죽는다.”
“왜 자꾸 때렸던 곳만 때리세요?”
“네가 처맞을 짓을 하잖아.”
“다음에는 좀 골고루 때려 주시면 안 돼요? 맞은 곳만 계속 맞으니까 아파요.”
그 말에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정우진을 바라봤다.
“안 맞을 생각을 해야지, 골고루 때려 달라는 건 뭔 소리야?”
“맞는 건 좋아요.”
“…….”
“……왜 그렇게 미친 사람 보듯 하세요?”
내 눈빛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어 낸 정우진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몰라서 묻는 건지, 나는 다시 문 쪽으로 몸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정우진이 내 팔뚝을 붙잡고 당기려고 해서 손을 철썩철썩 때렸지만, 다섯 대나 맞아도 놓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라 결국 똑바로 앉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 때려 놓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웃겼지만,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럼 앞으로 절대 안 때릴게.”
“선배님은 제가 좋아하는 꼴을 보기가 싫으세요?”
“네.”
“왜?”
짧게 묻는 말에 나는 허리를 돌려 뒤를 보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스태프가 탄 자동차를 보며 말했다.
“빨리 출발하기나 해. 이러다가 고속도로에서 날 새겠다.”
“그럼 노숙하면 되죠. 차박 안 해 보셨어요? 다음에 저랑 같이 가실래요?”
“아니요? 싫은데요?”
“왜?”
차가 다시 출발할 때 나는 힐끗 카메라를 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계속 편집할 수도 없으니까 이제 진짜 제대로 하자.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하고.”
“전 계속 제대로 하고 있었어요.”
“시끄러워. 아무튼 이제 진짜 제대로 해.”
나는 우물쭈물하다가 카메라를 보며 박수를 한 번 짝 쳤다. 나름대로 편집 점이라는 걸 알려 주기 위해 한 행동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게 의미가 있나 싶었다. 우리가 편집해 달라 요청한다고 해서 그게 전부 받아들여지는 건 아닐 텐데…….
그래도 아까 내가 욕까지 했으니 그 부분은 무조건 편집이 될 것 같기는 했다.
“휴게소까지 얼마나 남았지?”
자연스럽게 묻자 정우진이 내비게이션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선배님, 근데 혹시 차박 해 보셨어요?”
“…….”
다시 위기가 왔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입꼬리를 씰룩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안 해 봤어.”
“저도요. 다음에 저랑 같이해 보실래요?”
“……그래, 뭐……. 다음에 시간 맞으면 그래도 되지.”
싫다고 하면 계속 물고 늘어질 게 뻔해서 대충 대답하자 정우진이 정색했다.
“맹세해 주세요.”
“뭐?”
“가슴에 손을 얹고 무슨 일이 있어도, 천지가 개벽해도 우진이랑 같이 외박하겠다고 맹세해 주세요.”
“…….”
나는 말없이 가만히 정우진을 보다가 주먹을 쥐고 생각에 잠겼다.
운전을 하고 있는 애를 또 때렸다가는 다시 차를 세울지도 모르고, 촬영 중인데 계속 쌍욕을 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화병이 날 것 같아서 나는 창문을 열어 얼굴을 내밀고 가슴속에서 너울거리는 울화를 토해 냈다.
“아아아아아악!”
우렁찬 소리 사이로 정우진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