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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82/190)

77화

보통 정우진이 저런 표정일 땐 좋은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나도 모르게 힐끗 카메라를 향해 눈치를 보다가 정우진의 입이 열리기 전에 황급히 말했다.

“야, 야. 이거 방송이야.”

내 말에 정우진이 어쩐지 조금 낮아진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무슨 말 할 줄 알고 계세요?”

“아니……. 그건 아닌데……. 진짜 보증이야?”

보증 얘기가 아닐 거라는 건 당연히 알지만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는데, 또 게이 같은 말이나 지껄일 거냐고 물을 수는 없지 않은가? 내 뜻을 알아들은 건지 못 알아들은 건지 정우진이 입을 꾹 다물었다가 작게 웅얼거렸다.

“그건 아니지만……. 방송에서 말하기 좀 그래요.”

“……뭐? 뭐라고?”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 되물었다. 제발 내가 잘못 들었기를 바랐지만 정우진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방송에서 말하기 좀 그래서…….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이 새끼가 진짜 미친 건가? 지금 방송 중인 거 아는 놈이 이런 말을 한다고? 이게 생방송이 아니라는 것에 감사하며 나는 최대한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억지로 웃었다.

“야, 그게 뭐야. 그러면 보시는 분들이 궁금하실 거 아니야. 진짜 뭔데? 보증 서 달라는 것만 아니면 다 들어줄 테니까 말해 봐.”

“다 들어준다고요? 뭐든?”

“그래, 내 능력 안의 일이면…….”

“…….”

그때 우연히 정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운전을 하고 있어서 오랫동안 시선을 맞추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잠깐 사이 나는 정우진의 눈에서 안광이 튀는 걸 보았다. 갑자기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서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버, 법에 저촉되는 일도 안 돼.”

“그런 거 아니에요. 선배님은 도대체 절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보증도 아니고 법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에요.”

억울하기라도 한 건지 갑자기 말이 빨라졌다. 하지만 지금 가장 억울한 건 나였다. 아무리 송철 피디가 카메라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둘이 여행하는 느낌으로 찍으라고 했다지만 이건 해도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무슨 컨셉이든 어쨌든 촬영을 하는 건 결국 시청자에게 보여 주기 위함인데, 우리끼리만 아는 얘기를 하고 나중에 말해 주겠다는 소리나 하고 있는 정우진의 정신 상태가 궁금했다.

“그럼 지금 말해 봐.”

“그건 좀……. 그럼 휴게소 가서 몰래 말씀드릴게요.”

아, 그러니까 왜 몰래 말하느냐고! 무슨 나쁜 짓 하려고 하는 사람처럼!

버럭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었다. 이쯤 되니 방송이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 저 입에서 소원이랍시고 무슨 말이 나올지 그게 더 걱정이었다.

그냥 가벼운 게임일 뿐이고 뭐든 다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그리고 정말 곤란한 거라면 거절해도 되는 일이지만, 나는 정우진이 말을 이런 식으로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화법이라고 해야 할까? 표정도 그렇고, 눈빛도 그렇고, 그냥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꼭 저런 식으로, 기분 나쁘게……. 나쁜 게 맞나? 아무튼 잘 모르겠지만 좋은 느낌은 아니라 싫었다.

그리고 나야 정우진이 워낙 특이한 놈이고 희한한 말을 많이 한다는 걸 알지만, 시청자나 스태프들은 그런 걸 모를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삐끗해도 정우진은 진짜 이상한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런 것처럼…….

“지금 말 안 하면 안 들어줄 거야.”

“그런 규칙은 없었잖아요. 아까 연습 게임도 그렇고, 선배님은 왜…….”

“야, 싫으면 하지 마.”

솔직한 심정으로는 그 소원이라는 게 무슨 내용인지 듣고 싶지가 않았다. 전혀 궁금하지도 않고 차라리 안 들었으면 했지만, 진짜 이걸 말도 안 하고 지나가면 방송을 보는 사람도 너무 찝찝할 것 같아서 하는 수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내 마음을 안 건지, 정우진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러면…….”

“…….”

나도 모르게 정우진의 입을 빤히 보면서 숨을 삼켰다.

“나중에, 휴게소 가서…….”

“가서 뭐? 또 가서 말한다고?”

내가 인상을 팍 찌푸리면서 급하게 묻자 정우진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휴게소 가서 저랑 같이 사진 찍어 달라고요.”

“뭐?”

“같이 사진 찍어 주세요.”

도대체 뭐 얼마나 대단한 소원인가 했는데, 사진이라니? 고작 사진? 아니면 원래 다른 소원이 있었는데 얘도 생각이 있을 테니 다른 걸 말한 건가?

갑자기 헷갈려서 혼란스러운 눈으로 정우진을 바라보며 눈만 깜빡거리다가 물었다.

“그게 소원이라고?”

“네.”

“사진 찍어 달라는 게?”

“네.”

“…….”

잘못 들은 게 아니잖아…….

이게 진짜 소원인 건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생각했던 것보다 별거 아니라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진 찍어 달라는 말을 왜 그렇게 어렵게 해? 소원이 아니라도 그냥 찍자고 하면 당연히 찍지. 휴게소 가서 찍자고? 내가 가서 네 화보도 팔백 장쯤 찍어 줄게.”

긴장을 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나 보다.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기대자 정우진이 우물쭈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아니라……. 저희 사진만 찍으면 이상하게 좀 안 좋은 일들이 생기는 것 같아서…….”

그 말에 나는 다시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정우진이 말하는 안 좋은 일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걸 굳이 우리가 먼저 말을 꺼내도 되려나? 회사에서 고소 공지도 올렸는데 괜한 말을 했다가 다시 불이 붙을까 봐 걱정이었다.

너무 말도 안 되는 루머들이 많아서 한 번 짚고 넘어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기는 했지만……. 사전에 이야기한 것도 없이 갑작스럽게 시작된 주제라 혹시 말실수라도 할까 봐 그것도 조금 걱정이 되기는 했다.

아, 그래서 혹시 방송에서 말하기는 좀 그렇다고 했던 건가?

“…….”

도대체 나 혼자 무슨 이상한 생각을 했던 거지?

갑자기 치미는 자괴감과 죄책감에 눈을 질끈 감는데 정우진이 말을 이었다.

“그래서 같이 사진 찍고 싶을 때 많았지만 선배님 곤란하실까 봐 말 못 할 때도 많았거든요. 저희 호두파이 먹으러 갔을 때랑 영화 보러 갔을 때랑 토스트 먹을 때도 그렇고, 선배님 저희 집에 오셨을 때도…….”

정우진은 옆에서 주절주절 떠들었지만 나는 아직도 스스로에게 받은 충격에서 회복이 되질 않아 눈앞이 어질어질했다. 그래도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다음부터는 그냥 나한테 말 안 해도 되니까 네가 사진 찍고 싶으면 마음대로 찍어.”

“정말요?”

방긋 웃으며 묻는 정우진을 보고, 나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보다 정우진이 이런 걸 신경 쓰고 있을 줄은 몰랐다. 별말을 안 해서 그런 건 안 찾아볼 줄 알았는데, 대충 상황은 다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나중에 휴게소 가서 사진 엄청 찍어야겠다.”

혼잣말처럼 말하는 정우진을 보다 조금 전 끝말잇기 대신 하려고 했던 게 떠올라 아, 하고 물었다.

“너 평소에 사진 찍는 거 좋아해? 그럼 쉬는 날에도 사진 같은 거 찍으러 가고 그래?”

내 물음에 정우진은 잠시 생각하는 것 같더니 말했다.

“음……. 원래 그런 취미는 딱히 없었는데 최근에 생긴 것 같아요.”

“그래? 풍경 같은 거 찍어?”

“풍경도 찍고 사람도 찍고…….”

그런 것치고 정우진의 사진 찍는 기술은 그다지 좋지 못한 것 같긴 했지만……. 특히 자기 얼굴을 찍은 사진은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각도도 좀 이상하고 역광은 기본에…….

최근에 생긴 취미라고 했으니 앞으로 점점 괜찮아지지 않을까?

“사진 찍는 거 말고 또 뭐 해?”

“아, 저 선배님 기사 찾아봐요.”

“뭐?”

“선배님 관련 기사랑 영상이요.”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나는 조금 당황하다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찾아볼 만한 기사가……. 없을 텐데?”

최근이야 여러 논란도 있고 예능 출연 소식도 있고 하니까 기사가 뜨는 게 당연했지만, 그 전에는 활동을 안 한 지 꽤 오래됐기 때문에 따로 뜬 기사가 없을 터였다.

“있어요. 그리고 데뷔 영상이랑 선배님 예능 출연하셨던 거랑 라디오 나온 것도 있고…….”

줄줄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물었다.

“그걸 왜……. 왜 찾아봐?”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건데 정우진은 오히려 이런 질문을 받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님이시니까요.”

“…….”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얼굴로 덤덤하게 하는 말에 순간 발바닥부터 정수리 끝까지 소름이 끼쳐 버린 나는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카메라 눈치를 보면서 다급히 말했다.

“야, 너 이러면 내가 시킨 줄 알잖아!”

당황해서 언성을 높이자 정우진이 웃었다.

“진짜예요. 제가 말했잖아요. 엄청 팬이고 선배님 때문에 아이돌 되려고 했다고. 제가 말한 거 잊어버리셨어요?”

거짓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보이는 순수한 눈빛에 압도당해 다시 말문이 막힌 나는 최대한 정우진과의 거리를 벌리면서 차 문에 바짝 붙었다.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냥 너무 민망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몸 둘 바를 모르겠어서 몸을 최대한 쭈그리고 있는데, 정우진이 그런 나를 보며 또 웃었다.

“갑자기 왜 그렇게 떨어지세요?”

“어? 아니……. 안 떨어졌는데?”

“이쪽으로 좀 오세요.”

정우진이 손을 뻗어 내 팔뚝을 잡더니 조금 힘을 줘 자기 쪽으로 당겼다. 조금이라도 거리를 둬야 마음이 편안해질 것 같았는데, 속절없이 끌려가 결국 다시 똑바로 앉게 된 나는 정우진의 손을 떼어 내며 말했다.

“예, 예. 아무튼 고맙습니다…….”

“그럼 나중에 사인해 줘.”

“네네, 오백 장 해 드릴게요.”

“보증도 서 줘.”

“그럼요, 그럼요. 보증도 서 드릴게요.”

내 말에 정우진이 소리를 내서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걸 보니 민망한 게 좀 가시는 것 같아서 나도 정우진을 따라 실실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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