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김밥도 자세히 보니까 종류가 여러 가지였다. 야채김밥도 있었고 참치김밥도 보였고, 치즈가 들어간 것도 보이고……. 그러다가 문득 어쩐지 익숙한 게 보여서 설마설마하고 물었다.
“이거 땡참김밥이야?”
“아, 네. 너무 매워서 하나밖에 못 먹어 봤는데 대충 맛은 비슷한 거 같아요. 인터넷에 만드는 방법이 있더라고요.”
“이건 뭐야?”
“그건 묵은지 참치김밥이요.”
와, 진짜 이걸 도대체 어떻게 다 만든 거야? 설마 종류까지 이렇게 다양할 줄은 몰라서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과자 몇 개밖에 안 가지고 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뭐라도 좀 챙겨 올 걸 그랬다.
“이거 만드는데 시간 엄청 많이 걸렸겠다.”
“별로 안 걸렸어요.”
“밤새웠다며? 근데 이거 지금 먹어도 되지?”
“네, 드세요. 그리고 밤새운 건……, 다른 이유도 있었어요.”
“설마 설레서?”
나무젓가락을 뜯으며 묻자 정우진이 또 웃었다.
“네.”
“하긴, 너 어릴 때부터 연습생 생활 하느라 잘 놀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무슨 김밥부터 먹을까 보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다. 키토김밥처럼 밥 대신 지단이 잔뜩 들어가 있는 김밥이 보였는데, 그게 세 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 줄이 아니라 딱 세 개.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궁금해서 물었다.
“이건 왜 세 개밖에 없어?”
“어떤……. 아.”
내 물음에 힐끗 이쪽을 본 정우진의 표정이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혹시 내가 물어보면 안 될 걸 물어본 건가?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어 덩달아 심각해지는데 정우진이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뜨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그거 자르다가 다 터져서……. 세 개밖에 못 건졌어요.”
웅얼웅얼 변명하듯 하는 말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라 멀뚱멀뚱 정우진을 보다가 푸핫 하고 웃음이 터졌다.
“웃지 마세요.”
내가 웃는 게 싫었는지 정우진이 칭얼거렸다. 그것조차 그냥 웃기기만 할 뿐이었다.
김밥을 자르다가 다 터졌다는 것이 웃긴 게 아니라 김밥 좀 자르다가 터질 수도 있는데, 그게 뭐라고 저렇게 웅얼거리면서 심각한 건지, 그게 너무 웃겼다.
“김밥 자르다가 터진 게 부끄러워?”
“…….”
내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뚱한 표정으로 앞만 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들키기 싫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모르고 딱 꼬집어서 왜 이건 세 개밖에 없냐고 캐물었으니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다.
“이건 편집해 주세요.”
나는 카메라를 보며 작게 말했다.
“김밥 싸다가 터져서 세 개밖에 없는 거 비밀이래요.”
“아, 하지 마세요.”
내가 카메라를 보며 작게 소곤소곤 말하자 정우진이 또 칭얼거렸다. 나는 세 개밖에 없는 김밥을 젓가락으로 집어 하나 먹어 보았다. 너무 차갑지도 않고 계란은 고소하고 촉촉했다. 간도 적당했고 안에 야채도 아삭아삭하고 참기름도 너무 고소한 게 사 먹는 김밥보다 훨씬 맛있었다.
“이거 진짜 네가 만든 거 맞아?”
“네, 맛있어요?”
“진짜 미친 거……. 아, 욕하면 안 되지. 죄송합니다. 진짜 엄청 매우 많이 대단할 만큼 맛있어.”
“진짜요?”
“너도 먹어 봐.”
나는 새 젓가락을 뜯어 그걸로 김밥을 하나 집어 정우진의 입에 갖다 댔다. 저번에 운전하고 있을 땐 그렇게 먹여 달라고 해서 금방 받아먹을 줄 알았는데 정우진이 멈칫했다.
김밥을 들고 계속 가만히 있다가 뭔가 이상해서 더 가까이 갖다 댔다. 김밥이 입술에 닿자 그제야 정우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갑자기 뭔가 또 이상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빨리 입 안에 김밥을 넣어 주고 다시 젓가락을 바꿔 다른 김밥도 먹었다.
“너 만들 때 안 먹어 봤어? 맛있지?”
“네.”
내 물음에 정우진이 짧게 대답했다.
나는 김밥을 입에 넣으며 그냥 눈만 깜빡거렸다.
“…….”
괜히 먹여 줬나? 아니, 근데 옆에서 힘들게 운전하고 있는데 혼자 낼름낼름 먹을 수는 없잖아. 보통 운전하고 있으면 옆에 앉은 사람이 먹여 주기도 하고…….
갑자기 헷갈려서 맹렬히 머리를 굴리다가 나는 옆에 정우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한 번 상상해 봤다. 만약 우리 멤버들이나 송철 피디, 혹은 매니저가 운전을 하고 있었다면…….
그래도 나는 김밥 하나 먹어 보라고 먹여 줬을 것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래, 이게 맞지. 잠도 못 자고 밤까지 새우며 김밥 싸 온 사람을 옆에 두고 이걸 나만 먹는 게 더 이상한 거지. 그건 완전 사이코패스나 다름없었다.
괜히 정우진이 움찔하면서 이상하게 굴고, 입도 천천히 벌려서 나까지 기분이 묘해졌다.
“또 줄까? 무슨 김밥 먹을래? 땡참은 매워서 못 먹으니까 빼고.”
“네? 어……. 저, 그냥 야, 야채…….”
정우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말 더듬은 거야 그렇다 쳐도 꼭 자동차 내부에 붙여 두는 소품 인형처럼 끄덕끄덕끄덕끄덕, 끝도 없이 고개를 움직이는 게 더 이상했다.
이 새끼 고장 났나? 마음 같아서는 뒤통수라도 붙잡고 그만 좀 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냥 야채김밥 하나를 집어 정우진의 입에 넣어 줬다. 그러자 연료를 바르고 부드러워진 양철 인형처럼 정우진의 이상 행동도 멈췄다.
“김밥 진짜 맛있다.”
“국도 좀 드세요.”
“그건 차 흔들려서 흘릴 수도 있으니까 나중에. 너 계란말이 먹을래? 줄까?”
“네.”
김밥도 먹고 계란말이나 문어 모양 소시지 등등 도시락을 먹어 치우고 있는데 정우진이 갑자기 날 불렀다.
“선배님.”
입에 잔뜩 먹을 게 있어서 대답도 못 하고 고개를 돌리자 정우진이 창밖으로 어느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으로 가면 우리 저번에 같이 냉면 먹었던 가게 나와요. 기억하세요?”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앞으로 내밀어 정우진이 가리킨 곳을 바라봤다. 냉면도 맛있었고 같이 먹은 돼지갈비도 엄청 맛있었는데.
“냉면이랑 같이 먹은 갈비도 엄청 맛있었는데.”
그때 정우진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말을 했다. 뭔가 좀 신기해서 나도 방금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말하려다가 이건 또 좀 너무 이상한가 싶어서 그냥 입에 있는 걸 삼키고 짧게 말했다.
“그치.”
“김밥 안 매우세요?”
내가 땡참김밥을 먹는 걸 봤는지 정우진이 조금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맵긴 한데 맛있어. 왜? 너도 먹어 볼래?”
“네? 주, 주시면 먹어 볼게요.”
말을 더듬으면서 말하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우리가 자기소개 같은 것도 안 했던 게 떠올랐다. 왜 이제야 생각이 난 건지 모르겠지만 아차 싶어 카메라를 힐끗힐끗 보다가 정우진에게 물었다.
“야, 근데 우리 소개도 안 하고 그냥 이렇게 가기만 해도 되는 거야? 생각해 보니까 인사도 안 하고……. 먹기만 했네.”
내 말에 정우진이 아, 하고 먼저 카메라를 힐끗 보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비비 세가온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어나더 원입니다.”
갑자기 존댓말을 하며 인사를 하니까 식은땀이 날 것 같았다. 편안하기만 했던 마음이 무거워지고 자꾸 카메라 눈치를 보게 되고……. 순간 정적이 도는 것을 못 참고 나는 다시 카메라를 보면서 주절주절 떠들었다.
“아, 저희가 만나면 서로 이름을 부르거든요. 활동명 말고……. 그래서 방송하는 내내 저희 둘 다 서로 본명으로 부를 것 같아요. 얘는 본명이 정우진이고, 저는 강서주예요.”
“네네, 맞아요.”
“……그리고 저거, 뭐야……. 김밥을 싸 와서 먹었는데 너무 맛있고…….”
“와.”
“…….”
“…….”
갑자기 너무 어색해져서 입을 다물자 침묵이 흘렀다. 그 지독하게 무거운 침묵을 먼저 깬 건 나였다.
“하…….”
내가 한숨을 내쉬면서 웃자 옆에서 가만히 있던 정우진이 입을 꾹 다물고 웃기 시작했다.
“…….”
“…….”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말없이 숨을 죽여 웃기만 했다. 어깨를 들썩거리다가 크게 숨을 내뱉고 허리를 쭉 펴자 정우진이 말했다.
“어색하죠?”
“죽을 거 같아.”
“그냥 카메라 없는 것처럼 하는 게 나은 것 같아요.”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 것 같은데……. 그래도 걱정이 되기는 했다. 진짜 이렇게만 해도 분량이 나올까? 나중에 송철 피디가 카메라 확인하고 낙담하면 어쩌지?
“우리 진짜 그냥 먹기만 하고 이렇게 가도 되는 거 맞지?”
걱정스러운 마음에 묻자 정우진이 조금 고민하는 것 같더니 말했다.
“그럼 끝말잇기라도 할까요?”
갑자기 끝말잇기는 무슨 끝말잇기? 그게 재미있을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나는 고민하다가 말했다.
“진 사람이 소원 들어주기, 어때?”
내 말에 별안간 정우진이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그 진지한 표정에 나도 모르게 움찔 어깨를 떨었다.
“소원이요?”
“어? 어……. 그냥 하는 것보다 그런 거 걸고 하는 게 더 낫지 않냐?”
“좋아요.”
“…….”
갑자기 투지가 불타오르는 정우진을 보며 나는 찝찝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뭔가 이상했지만 어차피 하기로 한 거 나는 힐끗 카메라를 봤다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사과.”
“과수원.”
“원숭이.”
“이리듐.”
“…….”
고작 두 번 만에 져 버린 나는 멀뚱멀뚱 앞을 보다가 멜론을 하나 집어 먹고 정우진에게도 하나 먹여 줬다.
“처음은 연습 게임이지.”
“연습 게임이란 말 없었잖아요.”
“원래 그게 국룰이야. 이제부터가 진짜 본 게임.”
“…….”
정우진의 표정이 불만스럽게 일그러졌지만 나는 못 본 척하고 선심 쓰듯 말했다.
“네가 먼저 해.”
“해 질 녘.”
“양아치 색……. 흠흠, 처음부터 그러면 어떡해?”
하마터면 욕이 나올 뻔해서 황급히 헛기침을 하자 정우진이 또 뚱한 표정으로 앞을 보다가 말했다.
“사기.”
“…….”
설마 지금 내가 연습 게임이라고 사기 쳤다는 걸 돌려서 말하는 건가? 표정을 보면 확실했지만 물증이 없어서 나는 가만히 정우진을 보다가 마음을 다스리고 차분히 말했다.
“기러기.”
“기쁨.”
“…….”
하지만 겨우 되찾은 차분함은 한순간에 박살이 났다. 나는 다시 멜론 하나를 입에 넣고 정우진도 하나 먹여 주며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끝말잇기보다는 그냥 얘기하면서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너 평소에 개인적인 얘기는 잘 안 하니까 팬들이 많이 궁금해하지 않아? 쉬는 날에는 뭐 해?”
내 물음에 정우진이 입에 있는 멜론을 씹어 삼킨 뒤 말했다.
“제 소원 들어주시는 거예요?”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도대체 무슨 대단한 소원을 빌고 싶어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 나는 불안한 눈으로 정우진을 보며 물었다.
“소원이 뭔데?”
끝말잇기 한 판에 목숨을 걸었던 사람처럼 전투적으로 할 땐 언제고, 갑자기 정우진이 입을 다물었다.
“…….”
“…….”
조금 더 기다려도 계속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하고 말할 생각이 없어 보여 결국 참다못해 물었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설마 보증 서 달라는 건 아니지?”
내 물음에 정우진이 힐끗 나를 바라봤다. 착각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눈가가 조금 전보다 살짝 붉어진 것 같았다.